230.바람이 데려간 모자 하나
세 살 외손자를 업고
나는 천천히 길을 가고 있는데
등 뒤에서 아이는
신이 나서 웃으며
‘아기돼지’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때
바람이 씽! 불어와
가벼운 하루 하나를 들추듯
아이의 모자를 낚아챈다
“할머니, 내 모자 날아가!”
작은 손가락이 허공을 가리키는 순간
모자는 이미
도로 건너편으로 달아나고 있었다
초록 신호가 막 바뀌던
저녁빛 속으로
급히 건너갔지만
바람은 한 번 더 손을 흔들고
그 모자를
어디론가 꼭꼭 숨으며 감춰버려
끝내 찾을 수 없었다
그날 저녁
퇴근한 딸이 말했다
그 모자는
해군 모자를 본떠
정성껏 만든 상품이라며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다음 날
나는 백화점으로 향했다
비어버린 자리를 채워주고 싶어
천만다행히 같은 모자가
딱 하나 있는 게 아닌가
아이의 얼굴에 다시 웃음이 피고
딸의 눈빛이 기쁨이 되는 순간
나는
조용히 하나를 배웠다
바람은 때때로 가져가지만
간절한 마음은
다시 돌아올 수도 있음을!
이 작품은 일상적인 사건 하나(아이의 모자 분실)를 통해 “상실–회복–정서적 깨달음”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비교적 단단하게 구성한 서정시입니다. 큰 사건 없이도 감정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상승하는 점이 가장 두드러집니다.
우선 시작 부분에서 “세 살 외손자”, “아기돼지 노래”, “업고 가는 길” 같은 구체적 이미지가 따뜻한 생활감을 만들어냅니다. 이 평온한 분위기는 “바람이 씽!”이라는 한 줄로 급격히 전환되는데, 이 대비가 작품의 긴장감을 담당합니다. 특히 모자가 날아가는 순간을 “가벼운 하루 하나를 들추듯”이라고 표현한 부분은 단순한 물건의 이동을 일상의 균열로 확장시키는 비유로, 시적인 성과가 있습니다.
중반부의 “초록 신호가 막 바뀌던 / 저녁빛 속으로”는 시간성과 공간을 함께 압축하는 장면인데, 시각적으로 매우 선명합니다. 다만 이 부분은 감정의 서술보다 장면 설명이 중심이라, 독자가 ‘상실의 감정’에 더 깊이 들어가기 전에 서사가 앞서 나가는 느낌도 약간 있습니다.
후반의 전환(딸의 설명 → 백화점에서의 동일한 모자 발견 → 회복)은 구조적으로 안정적입니다. 특히 “천만다행히 같은 모자가 / 딱 하나 있는 게 아닌가”는 약간 구어적인 표현이지만, 오히려 현실감과 즉흥성을 살립니다. 다만 이 대목에서는 감정의 결이 ‘서정’보다는 ‘해결’로 빠르게 수렴되기 때문에, 여운이 조금 짧아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마지막 결구 “바람은 때때로 가져가지만 / 간절한 마음은 / 다시 돌아올 수도 있음을”은 작품의 주제를 직접적으로 정리합니다. 의미 전달은 분명하지만, 다소 설명적 결론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습니다. 이미 앞의 서사에서 충분히 체험된 감정이므로, 이 부분은 조금 더 이미지나 상황으로 마무리했다면 여운이 더 강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종합하면, 이 작품의 강점은
일상적 사건을 통한 감정의 자연스러운 전개
구체적인 생활 이미지(아이, 모자, 길, 신호등)
상실과 회복의 명확한 구조
이고, 아쉬운 점은
결말의 다소 직접적인 교훈화
후반부 감정의 압축 부족으로 인한 여운 약화
입니다.
전체적으로는 “작은 사건이 만드는 정서적 파도”를 잘 포착한 작품이며, 서사시와 서정시의 중간 지점에서 안정적으로 서 있는 작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