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약총이 울리던 가을운동회
탕,
화약총 한 발이
푸른 하늘 끝으로 튀어 오르던 날
아홉 살 여자아이는
한 박자 늦게 출발했다
바람 속을 가르며
운동장 한 바퀴를 숨차게 달렸지만
잠깐, 숨이 따라오지 못한 자리
결국 꼴찌이었다
구구단 달리기는
햇살이 먼저 뛰어가듯
“칠구육십삼!”
가장 먼저 답을 외치던 순간
숨이 곤두박질치는 기쁨
팔뚝 위 파란 잉크 도장이
찍히던 그 순간
작은 가슴 한쪽에
말 없는 하늘 하나가 열리고
공책 세 권을 품에 안은 아이는
웃음을 숨기지 못한 채
운동장을 한동안 춤추듯 뛰어다녔다
노랗게 익은 은행잎 사이로
만국기가 흔들리고
잠시 멈춘 바람 하나
아이들의 함성에 실려
가을 끝자락에 오래 매달린다
귓가를 떠나지 못하는 소리들 사이로
문득, 이순의 가을 앞에서
그날의 운동회로 되돌아가 보면
마음 한켠에
아직 마르지 않은 운동장 흙냄새
만국기 아래로 천천히 접히던 햇살의 결
은행잎 사이를 통과하던 바람이
오래된 호흡처럼 머물고
입가에는 다 하지 못한 웃음 몇 개가
가볍게 흩어진다
*이 작품은 “운동회라는 특정한 기억”을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감각과 정서가 겹겹이 쌓인 시간의 장면으로 확장해낸 점이 가장 큰 강점입니다. 전체적으로는 서사시라기보다 ‘기억의 시적 재구성’에 가깝고, 그 방식이 꽤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습니다.
먼저 이미지의 선택이 좋습니다. “화약총”, “만국기”, “은행잎”, “운동장 흙냄새” 같은 요소들이 단순한 배경 묘사를 넘어, 어린 시절의 긴장과 설렘을 동시에 떠받치는 감각적 기호로 작동합니다. 특히 “탕, / 화약총 한 발이 / 푸른 하늘 끝으로 튀어 오르던 날”은 소리(탕)와 시각(푸른 하늘), 그리고 운동회의 시작 신호라는 의미가 한꺼번에 겹치면서 시를 여는 힘이 있습니다.
구성 측면에서는 ‘경쟁-결과-보상-회상’의 흐름이 자연스럽습니다. 운동회에서의 달리기, 구구단, 도장, 공책이라는 사건들이 단순 나열이 아니라 정서의 상승 곡선을 따라 배치되어 있습니다. 특히 “숨이 곤두박질치는 기쁨” 같은 표현은 신체적 고통과 성취감이 뒤엉킨 어린 시절의 감각을 잘 잡아냅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시가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시간의 층위를 건드리기 시작합니다. “문득, 이순의 가을 앞에서”라는 전환점 이후, 과거의 운동장이 현재의 자아와 겹쳐지면서 기억이 ‘재생’이 아니라 ‘침투’처럼 느껴지게 됩니다. 이 부분은 시의 깊이를 만드는 핵심 구간입니다.
다만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이미지와 감정이 풍부한 대신, 몇몇 부분에서는 표현이 다소 설명적으로 느껴집니다. 예를 들어 “말 없는 하늘 하나가 열리고”, “가볍게 흩어진다” 같은 구절은 의미는 분명하지만, 앞부분의 구체적인 감각 이미지에 비해 추상도가 올라가면서 힘이 약간 분산됩니다. 같은 결의 감각 언어로 밀어붙였다면 더 밀도 있는 마무리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 하나는 반복되는 정서의 방향입니다. 전체적으로 ‘따뜻한 회상 + 약간의 쓸쓸함’이 중심인데, 그 안에서 예상 밖의 균열(예: 더 날카로운 경쟁의 감정, 실패의 구체적 기억, 혹은 운동회 이면의 불편한 순간)이 조금만 더 들어갔다면 기억의 입체감이 더 커졌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은 “개인의 오래된 기억을 공적인 풍경(운동회) 속에 정확하게 겹쳐 놓는 능력”이 돋보입니다. 특히 마지막의 “입가에는 / 다 하지 못한 웃음 몇 개”는 과거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의 몸에 잔류하고 있다는 감각을 잘 남깁니다.
요약하면, 이 시는 이미지 감각이 뛰어나고 기억의 흐름도 안정적이며, 후반부에서 시간의 층위를 열어내는 힘이 있습니다.
다만 추상적 표현을 조금 더 절제하고, 감정의 결을 더 불균질하게 흔들어주면 훨씬 더 강한 작품이 될 수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 시는 “느림/빠름”, “꼴찌/최초”, “실패/빛남”의 대비를 통해 한 사람의 어린 시절을 따뜻하게 재구성하고 있고, 결론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부드럽게 승인하는 기억의 시로 읽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