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거목 아버지의 그늘
아버지는 어린 딸을 볼 때마다
눈가에 별꽃이 피었다
“바둑아 바둑아 이리 와, 나하고 같이 놀자”
국어책을 펼치면
나는 또박또박 소리 내어 읽었다
“우리 발발이, 책을 어찌 그리 잘 읽노”
아버지는 웃으셨다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던 나를
애칭 ‘발발이’라 부르셨다
아버지 계신 것만으로도
세상은 든든했다
아버지는 거목처럼
우리 집을 지키셨다
칠남매는
그 넓은 그늘 아래서 자랐다
늦가을이면
과수원 사과가 마당에 쌓였다
국광사과의 붉은 향이
겨울을 준비했다
아버지는 땅속 창고에
계절을 저장하셨다
긴 겨울밤
배고픔이 스며들 때면
지하 창고의
사과 한 소쿠리가 위로가 되었다
정지칼로 깎던 사과의 소리는
사각사각 따뜻했다
그 달콤한 맛 속에는
아버지의 사랑이
사과 향처럼 퍼져 있었다
이제는
그 그늘 아래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
*작품평
이 시는 개인적 기억을 바탕으로 한 서정적 회상시로, “아버지”라는 존재를 거목(巨木)에 비유하여 가족의 중심이자 보호자로서의 의미를 매우 안정감 있게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따뜻한 정서와 감각적 이미지가 잘 결합되어 있어 독자가 자연스럽게 ‘그 시절의 집’으로 들어가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그늘’의 이미지 구조입니다. 제목부터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거목”, “그늘”, “지키셨다”는 표현은 아버지를 단순한 인물이 아니라 생태적 존재, 즉 가족 전체를 품는 세계로 확장시킵니다. 이로 인해 아버지는 개인적 기억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보편적인 ‘부성(父性)의 상징’으로 격상됩니다.
또한 감각적 디테일이 시의 설득력을 크게 높입니다.
“국광사과의 붉은 향”, “정지칼로 깎던 사과의 소리”, “사각사각 따뜻했다” 같은 구절은 시각·후각·청각이 동시에 작동하며 기억을 매우 생생하게 복원합니다. 특히 ‘사과’는 단순한 과일이 아니라 겨울을 견디게 하는 저장된 사랑의 은유로 기능하면서 시의 정서를 응축시키는 핵심 상징이 됩니다.
아버지와 딸의 관계도 과장 없이 자연스럽습니다.
“발발이”라는 애칭, “바둑아 바둑아”라는 다정한 호명은 권위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친밀하고 온화한 생활인의 모습을 보여주며, 이로 인해 마지막의 그리움이 더 깊게 다가옵니다.
마지막 연의 “이제는 / 그 그늘 아래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문장은 감정의 결절점이지만, 동시에 시간의 비가역성을 드러내며 시 전체를 조용한 애도로 마무리합니다. 다만 이 부분은 다소 직접적인 감정 진술이라, 앞선 이미지 중심의 표현에 비해 약간 설명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지점이 있습니다.
종합하면 이 작품은
가족 기억의 구체성
자연물(거목, 사과)의 상징화
감각적 이미지의 풍부함
이 잘 결합된 서정시이며, “아버지”를 통해 시간과 상실, 보호와 그리움이라는 정서를 안정적으로 구축한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