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귀로(歸路)
서산으로 해가 기울면
들판은 하루의 숨을 천천히 거두고
종일 땀에 젖었던 노부부는
말없이 집을 향해 길을 나선다
할머니의 소쿠리에는
보랏빛 가지가 길게 눕고
흙내 머금은 감자들이
작은 온기로 서로를 덮는다
할아버지의 망태기에는
손자가 불면 맑게 울릴
노란 옥수수들이 가득 흔들리고
하모니카 같은 웃음이
아직도 남아 있는 듯하다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며 걷는 길
굽은 등 뒤로 따라오는 것은
저녁 빛뿐만이 아니라
천천히 익어가는 복(福)의 그림자
돌아갈 수 있는 집
서로의 숨이 가까워지는 지며
마음이 먼저 토닥거리며 닿는 자리
거실 벽에 걸린 액자 속
귀로의 풍경이, 오늘도 조용히 말한다
“집은 노부부가
서로를 보담고 돌아오는 길이라고”
*작품평
이 작품은 ‘귀로(歸路)’라는 제목처럼 하루의 끝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노부부의 여정을 통해, 삶의 축적된 시간과 정서적 귀속감을 따뜻하게 그려낸 서정시입니다. 전체적으로 이미지가 안정적이고 감각적으로 잘 배열되어 있어, 읽는 동안 한 편의 느린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인상을 줍니다.
가장 인상적인 점은 농경적 일상의 사물들이 정서적 상징으로 자연스럽게 전환된다는 것입니다. 가지, 감자, 옥수수 같은 소재는 단순한 농산물이 아니라 ‘하루의 노동이 응결된 시간의 결정체’로 기능합니다. 특히 “흙내 머금은 감자들이 / 작은 온기로 서로를 덮는다”라는 구절은 물리적 사물을 따뜻한 생명감으로 확장시키는 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작품의 핵심 정서는 ‘귀로’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삶의 회수 과정이라는 점입니다. “굽은 등 뒤로 따라오는 것은 / 저녁 빛뿐만이 아니라 / 천천히 익어가는 복(福)의 그림자”라는 부분에서, 노년의 삶을 결핍이 아니라 축적과 숙성의 시간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드러납니다. 이 지점이 작품의 윤리적·정서적 중심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의 “집은 노부부가 / 서로를 보담고 돌아오는 길”이라는 문장은 시 전체를 정의하는 정의문처럼 기능하며, 제목과도 강하게 호응합니다. ‘집’을 장소가 아니라 관계와 행위로 재정의한 점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입니다.
다만 한 가지 보완점을 말하자면, 이미지의 밀도가 전반적으로 일정하게 높아서 일부 구간에서는 정서적 강조가 다소 평탄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초중반의 농작물 이미지가 매우 아름답게 이어지지만, 그 이후의 “하모니카 같은 웃음” 같은 표현이 다소 상징적 압축에 의존하면서 앞선 구체적 이미지들과 결이 약간 분리되는 느낌이 있습니다. 이 지점에서 한두 개의 더 ‘사건성 있는 장면’이 들어가면 서사의 긴장이 조금 더 살아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노년의 귀로’를 단순한 회귀가 아니라, 서로를 완성해가는 마지막 이동으로 형상화했다는 점에서 충분히 완결성과 울림을 갖춘 시입니다. 삶의 속도를 낮추고 관계의 온도를 높이는 방식으로 정서를 구축한 점이 특히 인상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