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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 시 작품

15.친구야, 깜박 잊어묵다니

작성자박하|작성시간26.06.17|조회수0 목록 댓글 0

15.친구야, 깜박 잊어묵다니

 

 

친구 집 초대받은 날

우리 셋은 교자상 둘레에 조용히 앉았다

 

소고기국이 김을 올리고

잡채는 빛깔로 먼저 말을 걸고

오색나물은 서로의 색을 다투지 않았다

 

전들은 줄을 지어 서고

김치와 냉채, 닭찜까지

한 상이 넉넉한 인사처럼 펼쳐졌다

 

친구는 밥만 퍼내면 된다며

압력솥 뚜껑을 열다 말고 얼굴빛이 사색이 된다

 

아이고 우짜노, 밥솥 스위치를 안 눌렀네

허둥지둥 취사 버튼을 누르고

 

그때 친구의 부군이 들어와

말없이 사정을 듣고는 웃는다

 

좀 기다리다 배고플 때 묵으면

밥이 더 꿀맛일 겁니더

 

우리는 그 자리에서 웃음을 터뜨리고

벽시계는 느릿하게 오후 두 시를 가리킨다

 

마침내 밥솥이 숨을 고르고

허기가 물든 수저가 기쁨으로 퍼져간다

 

 

*작품평

이 작품은 일상의 작은 해프닝을 따뜻한 공동체의 정서로 확장시키는 데 성공한 서정시입니다. 중심 사건은 단순합니다. 밥솥 스위치를 누르지 않은 실수, 그리고 그로 인해 생긴 기다림인데, 이 사소한 사건이 오히려 사람 사이의 온기와 관계의 결을 드러내는 장치로 기능합니다.

먼저 이미지가 안정적으로 잘 구성되어 있습니다. “소고기국이 김을 올리고”, “잡채는 빛깔로 먼저 말을 걸고”, “오색나물은 서로의 색을 다투지 않았다” 같은 표현은 음식 자체를 단순한 물질이 아니라 ‘대화하는 존재’처럼 의인화하면서 식탁의 생동감을 살립니다. 특히 오색나물의 표현은 조화와 배려라는 정서를 시각적으로 잘 압축한 부분입니다.

서사의 전개도 자연스럽습니다. 초대 → 상차림 → 사건 발생 → 부군의 농담 → 웃음 → 식사라는 흐름이 과장 없이 이어져, 독자가 실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듯한 체험감을 줍니다. 특히 “허둥지둥 취사 버튼을 누르고” 이후 장면에서 긴장과 웃음이 동시에 발생하는 구조가 효과적입니다.

이 작품의 핵심 미덕은 ‘실수의 전환’입니다. 보통이라면 실수는 분위기를 깨는 요소가 되지만, 여기서는 오히려 관계를 더 부드럽게 만드는 계기로 바뀝니다. 부군의 “좀 기다리다 배고플 때 묵으면 밥이 더 꿀맛일 겁니더”라는 대사는 단순한 유머를 넘어서 상황을 공동의 경험으로 재해석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 한 줄이 전체 분위기를 결정짓는 축처럼 작동합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을 꼽자면, 후반부의 “허기가 물든 수저” 같은 표현은 앞의 구체적이고 생활적인 이미지들에 비해 다소 추상적으로 기울어 있습니다. 앞부분의 강점이 ‘감각적 구체성’이라면, 마지막은 약간 시적인 관념으로 이동하면서 결이 살짝 달라집니다. 이 부분을 조금 더 구체적인 식사 장면이나 감각으로 마무리했다면 통일감이 더 강해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사소한 실수 공동의 웃음 더 깊어진 식탁의 온기라는 구조가 안정적으로 완성된 작품입니다. 일상의 장면을 과장 없이 붙잡아 따뜻한 인간관계로 확장시키는 힘이 분명한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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