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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 시 작품

27.늦가을 국광 맛

작성자박하|작성시간26.06.18|조회수1 목록 댓글 0

27.늦가을 국광 맛

 

 

찬 서리 한 겹 내려앉은 늦가을 아침

바람은 얇은 유리처럼 투명하게 떨고 있었다

 

작은 언니와 나는 국민학교로 가던 길

말보다 발걸음이 먼저 앞서가던 나이였다

 

탱자나무 울타리, 가시의 침묵을 밀어젖히고

삐걱이는 삽짝문을 지나

우리는 오래된 과수원 안으로 들어섰다

 

가지마다 매달린 국광은

햇빛을 품고 등불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작은 언니는 가장 잘 익은 것을 골라 따서

소매 끝으로 쓱쓱 닦아내고는

여동생인 내 손에 쥐여주었다

우리는 사과를 함께 한 입 베어 물었다

아삭 터지는 소리 속에서

시원하고 달콤한 과즙이 입안 가득히 번져

햇살 한 조각이 혀끝에서 살아났다

서로의 얼굴에 과즙이 튕겨도

웃음으로 환하던 계절이었다

 

그때의 과수원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지고

탱자 울타리도 기억 속에만 남아 있지만

문득 그날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조용히 기억 속 그 사과 한 입을 꺼내어

맛보며 그날을 기억한다

 

국광이 익어가던 그날의 우애의 맛을.

 

 

*작품평

이 작품은 기억 속 풍경과 감각을 통해 유년의 우애를 매우 선명하게 복원해내는 서정시입니다. 중심 정서는 향수이지만,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이라는 감각을 매개로 과거의 시간이 현재로 되살아나는 구조가 인상적입니다.

먼저 시의 가장 큰 강점은 감각적 디테일입니다. “찬 서리 한 겹”, “바람은 얇은 유리처럼”, “아삭 터지는 소리”, “시원하고 달콤한 과즙같은 표현들이 시각·촉각·미각을 함께 자극하면서 장면을 입체적으로 만듭니다. 특히 국광 사과의 맛이 단순한 과일의 묘사를 넘어, 기억의 매개체이자 정서의 응축점으로 기능한다는 점이 좋습니다.

서사 구조도 안정적입니다. 과수원으로 들어가는 장면 → 사과를 따 먹는 경험 → 현재의 회상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자연스럽고, 시간의 단절 이후 “이미 오래전에 사라지고”라는 문장에서 현재의 상실감이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마지막 연에서 “사과 한 입을 꺼내어 맛본다”는 표현은 물리적 행위가 아니라 기억을 재현하는 심리적 행위로 읽히며, 시의 주제를 잘 응축합니다.

또한 “작은 언니”와의 관계 설정이 이 시를 단순한 개인적 회상이 아니라 관계의 기억으로 확장시킵니다. 사과를 나누는 행위가 단순한 간식이 아니라 ‘우애의 의식’처럼 기능하면서, 마지막의 “우애의 맛”이라는 표현이 설득력을 얻습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정서가 매우 일관되고 아름답게 유지되는 대신 긴장이나 변주가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기억의 따뜻함이 끝까지 유지되다 보니, 독자가 감정의 결을 조금 더 깊게 흔들릴 여지는 상대적으로 적습니다. 예를 들어 현재 시점에서의 감정이 조금 더 복합적으로(그리움 + 상실 + 미묘한 거리감 등) 드러났다면 여운이 더 강해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사과의 맛이라는 구체적 감각을 통해 시간을 저장하는 방식이 매우 정교하게 구현된 시입니다. 유년의 한 장면을 과장 없이, 그러나 따뜻하게 붙잡아두는 힘이 분명히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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