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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 시 작품

28.눈 먼 세월

작성자박하|작성시간26.06.18|조회수2 목록 댓글 0

28.눈 먼 세월

 

 

 

 

 

금성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의 가락을

작은 방 바닥에 조심스레 풀어놓고

열아홉, 아직 덜 여문 삶을 가진 영이는

숨을 고르며 대학 노트 위에

가사를 한 줄씩 옮겨 적는다

 

검은 글자들은 어느새 푸른 솔숲으로 번져

생각 많은 여대생의 작은 피난처가 된다

 

창 너머 해는 한낮에 멈춰 서서

움직이지 않는 시간을 길게 걸어 두고

라디오에서는 박인희의 ‘세월’이 흐른다

 

하루는 엿가락처럼 느리게 늘어지고

방 안은 잠시 멈춘 작은 우주가 된다

 

그 고요의 가장자리에서

박목월의 ‘윤사월’ 한 구절이 떠오른다

 

“마치 산지기 외딴집

눈 먼 처녀가 문설주에 기대어

멀리의 소리를 더듬듯”

 

나는 눈 먼 봄날의 윤사월이

너무 더디 흘러 답답해하면서도

시간의 페이지를 한 장씩 넘긴다

 

“눈 먼 세월아, 제발 빨리 흘러가다오”

그 빠름 끝에서

나는 언젠가 세련된 숙녀가 되어 있을 것만 같았다

 

반세기 후

나는 그 소원을 다시 고쳐 쓴다

 

눈 먼 세월아

부디 조금만 더 천천히 흘러다오

 

 

*작품평

이 작품은 시간을 매개로 한 회상과 태도의 전환을 중심축으로 삼고, 개인의 성장 서사를 음악·문학적 기억과 겹쳐서 구성한 점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전반적으로는 서정성과 회고성이 강한 산문시 형태에 가깝고, 감정의 흐름이 비교적 명료하게 따라가도록 짜여 있습니다.

 

초반부의 “금성 라디오”, “유행가”, “대학 노트”, “가사 필사” 같은 이미지들은 특정 시대의 생활 감각을 선명하게 호출합니다. 이때 ‘영이’라는 인물은 단순한 화자 분신이라기보다, 과거의 자신을 객관화하는 장치로 기능합니다. 방 안에 “조용히 풀어놓고”라는 표현은 음악이 물리적 공간으로 확장되는 감각을 잘 살려, 정서적 몰입을 효과적으로 만들어냅니다.

 

중반부에서 중요한 전환점은 박인희의 ‘세월’과 박목월 「윤사월」의 인용입니다. 이 두 텍스트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시간 감각’을 이중으로 구조화합니다. 하나는 대중가요가 주는 일상적 시간, 다른 하나는 현대시가 가진 정지된 시간 감각입니다. 특히 “눈 먼 처녀” 이미지가 등장하는 구절을 통해 시간의 흐름이 단순한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인식의 문제로 바뀌는 순간이 형성됩니다.

 

“하루는 엿가락처럼 길게 늘어지고 / 방 안은 잠시 멈춘 작은 우주가 된다”는 대목은 이 작품의 정서적 핵심입니다. 시간의 체감이 외부 세계가 아니라 내부 심리 상태에 의해 왜곡되는 순간을 잘 포착하고 있습니다.

 

후반부의 핵심 반전은 태도의 변화입니다. “빨리 가다오”에서 “천천히 가달라고”로 바뀌는 전환은 흔한 회고 구조이지만, 이 작품에서는 단순한 교훈으로 끝나지 않고 “세련된 어른”이라는 과거의 기대가 현재의 체념 혹은 이해로 재해석됩니다. 즉, 시간이 단순히 지나간 것이 아니라 ‘소망의 방향을 바꿔버린 힘’으로 제시됩니다.

 

다만 보완점을 말하자면, 몇몇 부분은 이미 익숙한 서정 공식(라디오, 봄, 세월, 방 안의 고립, 시간의 느림/빠름 대비)에 기대는 비중이 커서 독자에게 새로운 인식 충격을 주기보다는 안정적인 감상에 머물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한 “눈 먼 세월”이라는 핵심 메타포가 강하게 제시되지만, 그 ‘눈멂’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무심함인지, 비가역성인지, 혹은 인간 인식의 한계인지—가 끝까지 확장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 작품의 미덕은 분명합니다. 개인의 사적 기억을 문학적 인용과 시대적 감각으로 연결해, ‘한 사람의 시간 경험을 비교적 설득력 있게 구축했다는 점입니다. 특히 마지막 한 줄은 전체를 정리하면서도 감정의 방향을 바꾸는 효과적인 마무리로 작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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