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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 시 작품

37.되돌이꽃

작성자박하|작성시간26.06.18|조회수3 목록 댓글 0

37.되돌이꽃


시간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말없이 피어 있는 이름 하나

조선의 끝자락바람도 쉬어가던 날
마지막 내시의 집에 새신부로 들어선

꽃 한 송이 처녀


그녀는 담장 안에 갇힌 하늘 보며
소리 없이 빛을 접고 살아갔다

문틈 하나 자유로이 허락되지 않아
바람은 방향을 잃고 되돌아가고
침묵 속 소리 나지 않는 옷을 입었다

 

어느 날, 아래채에 세 든 젊은 새댁의
젖내 스미는 아기를 보는 순간!

가슴 깊은 곳 잠들어 있던 욕망으로
고민의 늪에 빠졌다

 

사내를 모르는 그녀의 따뜻한 숨결은
어느 날 밤살며시 방문을 열고

아무도 모르게 바깥세상으로 나왔다

흰 눈이 산길 덮은 길 앞만 보며 

발목이 눈 속에 빠져 푹 젖지만
세상의 먼 곳으로 시선을 향하며

끝없이 이어진 눈길 위에 작은 발자국
걸음을 옮길수록 지난 삶이 파노라마로

펼쳐지고 가난 속에서 자신에게 말한

오래된 약속이 귓가를 적시는 게 아닌가

배고프지 않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스스로를 다독이던 그 말이
차갑게 그녀의 목을 죄어 왔다

 

끝없는 눈길에서 앞이 자꾸만 흐려지고
마음은 갈기갈기 찢긴 채 생각에 잠기다가

그녀는 멈추며. 천천히 등을 돌린다


자신의 영혼 깊음 속 아가페 사랑을 위하여

미열이 돋는 이마 쓰다듬으며 눈길을 더듬어
과묵한 내시 남편이 기다리는 집으로

되돌이꽃이 되어 돌아가고 있었다.

 

 

*작품평

 

 이 시 **「되돌이꽃」**은 개인적 욕망과 인간적 그리움, 그리고 책임과 사랑 사이의 갈등을 섬세하게 그려낸 서사적 서정시입니다. 특히 역사적 배경인 ‘마지막 내시의 집’이라는 특수한 공간을 통해 한 여성의 내면을 보편적인 인간의 문제로 확장시키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작품평

「되돌이꽃」은 봉건적 질서와 운명 속에 갇혀 살아온 한 여인의 침묵과 각성을 그리고 있다. 화자는 조선의 마지막 내시에게 시집온 젊은 여인을 ‘꽃’으로 형상화하며, 그녀의 삶을 억압과 인내의 시간으로 펼쳐 보인다. “담장 안에 갇힌 하늘”, “문틈 하나 자유로이 허락되지 않아”와 같은 표현은 육체적 구속을 넘어 정서적 고립까지 함축하며 독자로 하여금 그녀의 삶을 깊이 공감하게 만든다.

시의 전환점은 아래채 새댁의 아기를 바라보는 순간이다. 아기의 존재는 단순한 생명의 상징을 넘어, 그녀가 평생 경험하지 못했던 모성과 인간적 욕망을 일깨우는 촉매가 된다. 특히 “사내를 모르는 그녀의 따뜻한 숨결”이라는 구절은 그녀가 처한 비극적 운명을 함축적으로 드러내면서도 깊은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눈 덮인 산길을 걸어가는 장면은 이 시의 핵심적 상징이다. 바깥세상으로 향하는 길은 자유와 욕망을 향한 탈출의 길이지만, 동시에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순례의 길이 된다. 눈길 위의 작은 발자국과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과거의 기억들은 그녀가 단순히 현실을 벗어나려는 것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다시 묻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배고프지 않다면 그것으로 족하다”라는 독백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정신적 축이다. 가난 속에서 체득한 삶의 윤리가 현재의 욕망과 충돌하며 그녀를 고뇌하게 만든다. 이 대목에서 시는 욕망의 정당성과 절제의 가치라는 두 축을 동시에 성찰한다.

결말에서 화자는 끝내 등을 돌려 집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것은 패배나 체념이 아니다. “자신의 영혼 깊음 속 아가페 사랑을 위하여”라는 구절에서 알 수 있듯, 그녀의 귀환은 더 높은 차원의 사랑과 책임을 선택한 결과이다. 마지막의 “되돌이꽃”은 꺾인 꽃이 아니라 스스로 돌아올 길을 선택한 꽃이며, 희생 속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는 인간 정신의 상징으로 읽힌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역사적 소재를 통해 인간 내면의 보편적 갈등을 깊이 있게 형상화한 점이다. 서사적 전개와 상징적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며, 마지막에 이르러 독자에게 잔잔하지만 오래 남는 울림을 선사한다. 욕망을 넘어 사랑으로 귀결되는 여인의 선택은 오늘날에도 인간다운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깊은 감동을 전한다.

종합 평가

주제성: ★★★★★

서사성: ★★★★★

감동과 여운: ★★★★★

상징성: ★★★★☆

언어의 응축미: ★★★★☆

전체적으로 서정성과 서사성이 균형 있게 결합된 작품으로, 한 여성의 삶을 통해 인간 존재의 존엄과 사랑의 본질을 성찰하게 하는 수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제목 「되돌이꽃」은 작품 전체의 의미를 아름답게 응축한 매우 성공적인 제목으로 평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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