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말의 씨앗
입을 여는 순간
가볍게 흩어질 말을 거두어
먼저, 마음에 귀 기울여라.
쉼 없는 바람 속에서도
고요히 들리는 작은 떨림,
잠들어 있던 그림자까지
조용히 쓰다듬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말은 길을 얻는다.
끝내 남길 한마디라면
별빛 한 줌 품은 숨결이기를.
혀끝을 떠난 온기는
메마른 가슴의 균열 속으로 스며들어
세상보다 먼저 말한 이의 마음을 적신다.
말의 씨앗은 보이지 않는 계절을 건너
삼십 배, 백 배의 햇살로 자라고,
가꾸는 손길마다 깊은 뿌리를 내리며
흙의 향기와 달빛을 머금는다.
시간의 그늘을 지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날들 속에서도
푸르게 숨 쉬며 익어 가는 말.
소망의 열매, 가장 작은 기적.
어느 새벽,
누군가의 침묵 속에 떨어져
오래도록 세상을 밝히는 빛이기를.
*작품평
작품평 – 「말의 씨앗」
「말의 씨앗」은 말의 본질과 책임, 그리고 말이 지닌 생명력을 ‘씨앗’이라는 은유를 통해 깊이 있게 형상화한 서정시입니다. 단순히 말을 조심하자는 교훈적 차원을 넘어, 한마디의 말이 사람의 내면과 시간, 그리고 미래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과정을 아름답고도 사색적으로 펼쳐 보입니다.
시는 “입을 여는 순간 / 가볍게 흩어질 말을 거두어 / 먼저, 마음에 귀 기울여라”라는 구절로 시작합니다. 이는 말보다 먼저 경청과 성찰이 선행되어야 함을 강조하며, 작품 전체의 정신적 중심축을 형성합니다. 특히 ‘마음에 귀 기울여라’는 표현은 타인을 향한 이해뿐 아니라 자기 내면에 대한 성찰까지 포함하는 의미로 읽혀 깊은 울림을 남깁니다.
중반부에서는 말이 단순한 소리가 아니라 상처를 어루만지고 생명을 살리는 존재로 그려집니다. “혀끝을 떠난 온기는 / 메마른 가슴의 균열 속으로 스며들어”라는 구절은 말을 온기와 치유의 매개체로 형상화하며, 추상적인 개념을 감각적으로 전달하는 데 성공합니다. ‘균열’과 ‘온기’의 대비는 말의 위로와 회복의 힘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씨앗의 성장 과정을 통해 말의 지속성과 확장성을 보여 준다는 점입니다. “보이지 않는 계절을 건너 / 삼십 배, 백 배의 햇살로 자라고”라는 표현은 작은 말 한마디가 시간이 흐르며 예상치 못한 결실을 맺는 과정을 함축적으로 담아냅니다. 씨앗·뿌리·흙·햇살·열매로 이어지는 유기적 이미지들은 작품 전체에 통일성을 부여하며 자연스럽고 풍성한 상징 체계를 형성합니다.
후반부의 “아직 태어나지 않은 날들 속에서도 / 푸르게 숨 쉬며 익어 가는 말”은 말의 영향력이 현재를 넘어 미래 세대와 시간 속에서도 살아 있음을 암시합니다. 이는 작품을 개인적 성찰의 차원에서 공동체적·보편적 가치의 차원으로 확장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마지막 연의 “누군가의 침묵 속에 떨어져 / 오래도록 세상을 밝히는 빛이기를”은 씨앗이 결국 빛으로 승화되는 장면으로, 시 전체를 희망과 기도의 정서로 마무리합니다. 강한 주장이나 설교 대신 조용한 소망의 형식을 취하고 있어 독자에게 더욱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종합하면 「말의 씨앗」은 섬세한 이미지와 일관된 상징, 따뜻한 인간애를 바탕으로 말의 책임과 가능성을 아름답게 노래한 작품입니다. 언어가 쉽게 소비되는 시대에 ‘어떤 말을 남길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말과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특히 서정성과 사색성이 균형 있게 어우러져 잔잔하면서도 오래 남는 감동을 선사하는 수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