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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 시 작품

49.바늘귀를 통과하는 시간

작성자박하|작성시간26.06.19|조회수0 목록 댓글 0

49.바늘귀를 통과하는 시간

 


일곱 살 무렵부터

나는 바늘귀를 길들이던 아이였다

숨을 고요히 접어 넣으면

세상은 잠깐 정지한 듯했다

눈보다 먼저 손이 기억을 열었다
바늘귀는 비밀의 문처럼 나를 받아주었다

 

고희가 되던 어느 날,

1.2의 시력은 미세하게 어긋나기 시작했다


먼지 하나가 초점 위에 내려앉았다
실 끝은 더 이상 선이 아니라

흔들리는 그림자가 되었다

가까이 갈수록 멀어졌다
집중이 먼저 피로해지고

바늘귀는 사라지는 쪽으로 이동했다

 

수십 번의 실패 끝에

손끝의 확신이 닳아 조용해질 때

 

성경의 말처럼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듯

세상은 한순간 더 좁아졌다

 

마지막 숨을 천천히 접어 넣는 순간

흔들리던 실 끝이

어둠의 가장 얇은 틈을 찾아가고

 

마침내 바늘귀는

아주 작은 빛의 점으로 열리며

그 속을 통과한 실 한 올이

공기 속에서 가늘게 떨렸다

 

그 순간 방 안의 시간은

잠시 바느질을 멈춘 사람처럼

고요히 숨을 고르고 있었고

 

창가에는

늦은 오후의 빛이 실처럼 내려와

손등 위에 오래 머물렀다

 

*작품평

이 시는 “시력의 저하”라는 매우 물리적인 경험을 출발점으로 삼아, 그것을 시간·집중·삶의 통과 경험으로 확장시키는 방식이 인상적입니다. 단순한 노화의 묘사가 아니라, ‘통과’라는 구조를 반복적으로 쌓아 올리면서 존재의 감각을 점점 좁혀가는 흐름이 잘 설계되어 있습니다.

초반부의 “바늘귀를 길들이던 아이”는 매우 좋은 이미지입니다. 바늘귀는 보통 인간이 통과해야 하는 대상인데, 여기서는 아이가 그것을 ‘길들인다’고 표현함으로써 관계를 전복시킵니다. 이 한 줄만으로도 화자의 세계가 이미 예사롭지 않다는 인상을 줍니다. 이어지는 “숨을 고요히 접어 넣으면 / 세상은 잠깐 정지한 듯했다”는 문장은 집중 상태를 시간 정지로 치환하면서 시의 핵심 정서를 예고합니다.

중반부로 가면 시력 저하가 단순한 신체 변화가 아니라 세계 인식의 붕괴로 이동합니다. “실 끝은 더 이상 선이 아니라 / 흔들리는 그림자”라는 구절은 매우 효과적입니다. 사물의 기능이 아니라 지각의 불확실성으로 이동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가까이 갈수록 멀어졌다”는 역설은 시 전체의 감각 구조를 압축한 문장처럼 작동합니다.

후반부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은 “성경의 말처럼 /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듯”입니다. 이 인용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개인의 시각적 실패를 보편적·영적 난관으로 확장시키는 장치입니다. 다만 이 부분은 해석의 폭이 넓어지는 대신, 앞서 구축된 매우 개인적이고 촘촘한 감각과 약간의 거리감이 생길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종교적 비유가 들어오면서 시의 결이 “개인적 감각 → 보편적 상징”으로 이동하는데, 이 전환을 더 미세하게 다듬으면 긴장이 더 유지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은 이 시의 강점이 가장 잘 드러납니다. “바늘귀는 / 아주 작은 빛의 점”이라는 전환은 시각의 상실이 완전한 붕괴가 아니라 다른 형태의 감각적 재구성임을 보여줍니다. 실이 통과하는 순간조차 “공기 속에서 가늘게 떨렸다”로 마무리되는 것은, 성공과 완결보다는 지속되는 긴장과 미세한 생동을 남겨 둡니다. 결말의 “창가의 늦은 오후의 빛이 실처럼 내려와”는 시작 이미지(바늘귀, 실)와 자연스럽게 호응하면서 구조적으로 닫히는 느낌이 좋습니다.

종합하면, 이 시의 핵심 미덕은 다음 세 가지입니다.
첫째, 바늘귀라는 단일 이미지를 시간·집중·존재의 은유로 확장한 점.
둘째, 시력이 약해지는 경험을 단순한 결핍이 아니라 인식의 변형으로 바꾼 점.
셋째, 마지막까지 통과의 긴장을 유지하면서도 완전한 해결 대신 여운을 남긴 점입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움은, 중반의 종교적 인용이 들어오면서 시의 내밀한 감각이 잠시 외부 상징으로 이동하는 느낌이 있다는 점입니다. 이 부분을 조금 더 개인적 경험 속에서 자연스럽게 발아시키면, 전체가 더 단단하게 응집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좁아짐”과 “통과”라는 상반된 운동이 끝까지 유지되는 잘 구성된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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