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박하 시 작품

52. 백합꽃 언니

작성자박하|작성시간26.06.20|조회수0 목록 댓글 0

52. 백합꽃 언니

 

 

 

반세기 전,

아니 그보다 더 먼 날의 이야기.

 

우리 세 자매가 아직 어린 꽃봉오리였을 때

신교육을 받으신 어머니는

저녁 등잔불 아래서

리어왕이야기를 들려주셨다.

 

막내딸 코딜리어는 가장 적게 말했지만

가장 깊이 아버지를 사랑했단다.”

 

그 한마디는 씨앗이 되어

작은언니 마음 깊은 밭에 내려앉았다.

 

소풍날이면, 언니는 김밥 몇 줄만 먹고

과일과 과자를 고스란히 남겨 왔다.

형제들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배보다 마음이 먼저 부르다며 환하게 웃었다.

 

그러던 1968.

아버지의 운수업이 무너지던 날,

집안의 기둥도 함께 흔들렸다.

 

스물한 살 언니의 봄은 그날 조용히 접혔다.

무역회사 타자기 앞에 앉아

하루의 햇살을 또각또각 눌러 적으며,

학업을 이어가던 네 남동생의 길 위에

새벽을 밝히는 등불이 되었다.

 

젊음이 누려야 할 모든 것 뒤로 미루고,

보람이라는 이름의 길을 걸었다.

자신은 낮은 곳에서 빛나는 등불처럼

늘 남을 먼저 비추며 살았다.

 

세월은 흘러 1975. 아버지는 다시 일어섰고,

꺼져가던 집안의 불빛은 환히 살아났다.

부모님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고,

온 집안에 기쁨이 번지던 날에도

언니는 한 걸음 뒤에 서 있었다.

 

자신이 흘린 눈물과 젊음은 가슴에 묻은 채,

마치 코딜리어처럼.

 

언니를 보면, 떠오르는 꽃,

향기를 자랑하지 않아도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머무는 꽃,

한 송이 백합꽃.

 

*작품평

이 시 백합꽃 언니는 한 여성의 헌신과 가족애를 백합꽃이라는 상징을 통해 잔잔하면서도 깊은 울림으로 그려낸 작품입니다.

 

작품평

 

시는 어린 시절 어머니가 들려준 리어왕의 코딜리어 이야기를 서두에 배치하여 작품 전체의 정신적 축을 마련합니다. 가장 적게 말했지만 가장 깊이 사랑했던 코딜리어의 모습은 곧 작은언니의 삶을 예고하는 복선이 됩니다. 이 장치는 단순한 가족 회고를 넘어 언니의 희생을 고전적 사랑과 헌신의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효과를 냅니다.

 

특히 소풍날 먹거리를 남겨 형제들에게 양보하는 장면은 언니의 천성을 보여주는 인상적인 대목입니다. 거창한 희생이 아니라 일상 속 작은 배려를 통해 인물의 성품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어 설득력이 높습니다. "배보다 마음이 먼저 부르다"는 표현은 언니의 따뜻한 인성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아름다운 시어입니다.

 

작품의 중심은 1968년 가세가 기울던 시기에 놓여 있습니다.

스물한 살의 젊은 여성이 자신의 꿈과 청춘을 접고 가족을 위해 생계를 책임지는 과정은 담담하게 서술되지만 오히려 그 절제된 어조 때문에 더 큰 감동을 줍니다. "하루의 햇살을 또각또각 눌러 적으며"라는 구절은 타자수로 일하는 언니의 노동을 시적으로 형상화한 뛰어난 표현으로, 반복되는 일상과 희생의 시간을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후반부에서 아버지의 재기가 이루어진 뒤에도 언니가 "한 걸음 뒤에 서 있었다"는 대목은 작품의 정서를 절정으로 이끕니다.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 않고 묵묵히 가족의 기쁨을 바라보는 모습은 코딜리어의 이미지와 자연스럽게 겹쳐지며 깊은 여운을 남깁니다.

 

마지막의 "한 송이 백합꽃"은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상징입니다. 백합은 화려함보다 순결과 헌신, 은은한 향기를 떠올리게 하는 꽃입니다. 언니의 삶 또한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주변을 밝히고, 말보다 행동으로 사랑을 실천한 삶이었기에 백합꽃의 이미지와 매우 잘 어우러집니다.

 

다만 작품은 전반적으로 서사적 성격이 강해 산문적 진술이 다소 많은 편입니다. 몇몇 설명적인 부분을 이미지 중심으로 압축한다면 시적 긴장감과 여운이 더욱 깊어질 수 있습니다.

 

종합하면, 백합꽃 언니는 가족을 위해 자신의 젊음을 기꺼이 내어준 한 여성의 삶을 진솔하게 기록한 서정시로, 희생을 미화하기보다 따뜻한 존경과 감사의 시선으로 그려낸 점이 큰 미덕입니다. 읽고 나면 백합꽃의 은은한 향기처럼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는 작품입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