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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 시 작품

60.주황빛 봉숭아꽃 다시 피는 날

작성자박하|작성시간26.06.20|조회수3 목록 댓글 0

60.주황빛 봉숭아꽃 다시 피는 날

 

오래전 푸른 여름 저녁,

언니들과 장독대 곁 꽃밭에서

봉숭아 꽃잎 소복이 따 모아 이 빠진 사기그릇에 담고

백반 한 줌 넣어 둥근 돌로 정성껏 찧었다.

 

예닐곱 살 작은 손톱 위에

꽃밥을 도톰하게 얹어주고,

 

언니들은 초록 잎사귀를 돌돌 말아

무명실로 정성스레 동여매며 말했다.

 

깜짝 놀라지 말거라. 내일 아침이면 손톱마다

예쁜 꽃이 필 거야.”

 

그 한마디에

목구멍까지 차오르던 웃음과 설렘.

잠은 달아나고

이불 속에서 기다림으로 뒤척이던 밤.

 

다음 날 아침,

손톱마다 환하게 피어난 주황빛 봉숭아꽃 열 송이.

세상을 다 가진 듯

가슴 가득 밀려오던 벅찬 감격이

작은 손끝에서 햇살처럼 반짝였다.

 

이제 기쁨도 그리움도 깊어지는 나이,

희수의 문턱에 서 있다.

 

딸이 문방구에서 사 온 봉숭아 꽃물을

내 손톱 위에 조심스레 발라준다.

순식간에 꽃은 피어나지만 향기는 없지만

어미를 생각하는 딸의 따뜻한 마음이

꽃물보다 먼저 물들어 와

 

생기 잃은 손끝에 고운 꽃 피어난다.

문득 세월 저편으로 흘러간 그 여름이

안개처럼 아련한 그리움 속에서도

여전히 주황빛으로 번져 오고,

 

이 저녁 생각은 어린 날로 돌아가

손톱 끝에 피어 있던 꽃을

다시 가만히 만져본다.

아직도 지지 않은, 그 여름의 봉숭아꽃을.

 

*작품평

이 시는 봉숭아 물들이기라는 한국적 유년의 추억을 매개로 하여,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가족애와 그리움을 따뜻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작품평

 

시는 어린 시절 언니들과 함께 봉숭아꽃을 찧어 손톱에 물들이던 풍경을 섬세하게 재현하며 시작됩니다. 장독대 곁 꽃밭, 이 빠진 사기그릇, 무명실과 같은 구체적 사물들은 독자를 단숨에 과거의 여름 저녁으로 이끌어 갑니다. 특히 내일 아침이면 손톱마다 예쁜 꽃이 필 거야라는 언니들의 말에 설레어 잠 못 이루던 아이의 모습은 순수한 동심의 정서를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중반부에서는 손톱마다 피어난 주황빛 봉숭아꽃을 통해 어린 화자가 느꼈던 충만한 기쁨과 감격이 아름답게 표현됩니다. 단순한 손톱 물들이기가 아니라 세상을 다 가진 듯한 행복으로 확장되는 과정에서 유년의 감수성과 상상력이 자연스럽게 드러납니다.

 

후반부에 이르러 시는 현재의 시간으로 옮겨옵니다. 희수를 앞둔 화자가 딸이 사 온 봉숭아 꽃물로 다시 손톱을 물들이는 장면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감동적인 연결고리가 됩니다. 예전의 봉숭아꽃에는 자연의 향기가 있었지만, 지금의 꽃물에는 딸의 사랑과 배려가 스며 있습니다. 물질적 형태는 달라졌지만 가족 간의 정성과 애정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마지막 연은 이 작품의 정서를 가장 잘 응축합니다. “아직도 지지 않은, 그 여름의 봉숭아꽃은 실제 꽃이 아니라 기억 속에 영원히 살아 있는 사랑과 추억의 상징입니다. 어린 시절의 행복한 순간은 세월이 흘러도 마음속에서 시들지 않는다는 메시지가 잔잔한 여운을 남깁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과장되지 않은 진솔함과 자연스러운 정서의 흐름에 있습니다. 어린 시절의 설렘, 노년의 그리움, 그리고 딸의 효심이 하나의 봉숭아꽃 이미지로 유기적으로 연결되며 독자의 공감을 이끌어냅니다. 특히 오감이 살아 있는 묘사와 부드러운 서정성이 어우러져 읽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유년과 가족을 떠올리게 하는 따뜻한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총평

이 시는 봉숭아꽃이라는 친숙한 소재를 통해 유년의 기억과 세대 간 사랑의 계승을 아름답게 형상화한 서정시입니다. 추억의 재현에 머물지 않고 현재의 가족애로 의미를 확장함으로써, 세월이 흘러도 지지 않는 마음의 꽃 한 송이를 독자의 가슴에도 피워내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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