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서울국화
여름 저녁, 대청마루에
엄마가 차려주던 구수한 보리밥
가지나물과 호박된장찌개
둥근 밥상 하나에
칠남매 둘러앉아
수저는 바삐 오가고
입안 가득 번지던 그 시절의 맛
그 풍경이 부러워
자기도 끼워 달라던
샛노란 웃음의 서울국화는
한여름 밤
무더위마저 한순간에 씻어 주었다
세월은 어느새 훈장이 되어
나는 외손자 셋의 할머니
딸네 아파트 텃밭에서
누가 심어 두었는지 모를
유년의 식구 같은 서울국화와 마주 선다
반세기 하고도 십여 년 만의 재회
억수로 반가워
키 큰 서울국화의 허리를 끌어안고
눈을 맞추는 순간
말 대신 번지는 것은
한여름 잎사귀처럼 흔들리는 침묵
반가움은 어느새 푸른 물빛이 되어
늦은 여름 저녁 속으로
천천히 스며든다
이 작품은 ‘서울국화’라는 매개를 통해 유년의 기억, 가족의 식탁, 그리고 시간의 회귀를 한 줄기로 엮어낸 서정시입니다. 전체적으로 정서의 흐름이 분명하고, 감각 이미지(밥상, 보리밥, 된장찌개, 대청마루)가 매우 안정적으로 배치되어 있어 읽는 사람이 자연스럽게 과거로 이동하게 만듭니다.
특히 앞부분의 “칠남매 둘러앉아 / 수저는 바삐 오가고”는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가족 공동체의 리듬감을 잘 살린 장면입니다. 음식의 구체성(보리밥, 가지나물, 호박된장찌개)이 기억의 진정성을 강화하고, 이는 시 전체의 설득력을 높입니다.
중심 전환점은 “샛노란 웃음의 서울국화”입니다. 여기서 국화는 단순한 식물이 아니라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는 인격화된 존재로 바뀝니다. “자기도 끼워 달라던”이라는 표현은 매우 효과적인데, 식물이 사람처럼 기억 속 가족 식탁에 ‘참여’하는 순간이 생기면서 현실과 기억의 경계가 부드럽게 허물어집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시는 개인 서사에서 더 큰 시간 서사로 확장됩니다. “나는 외손자 셋의 할머니”라는 문장은 삶의 연속성을 단정적으로 보여주며, 앞선 유년의 이미지와 강하게 대비됩니다. 이어지는 “딸네 아파트 텃밭”은 전통적 공간(대청마루)과 현대적 공간(아파트)을 연결하는 장치로 기능합니다.
마지막 부분, “억수로 반가워…” 이후의 흐름은 이 시의 정서적 핵심입니다. 재회의 순간을 언어로 설명하지 않고 “침묵”과 “푸른 물빛”으로 전환한 점이 인상적입니다. 특히 결말에서 감정이 직접적으로 터지지 않고 자연 이미지로 흡수되는 방식은 절제된 여운을 만들어냅니다.
다만 몇 가지는 더 다듬으면 시의 밀도가 올라갈 수 있습니다.
첫째, 중간 이후 일부 구간에서 행간과 띄어쓰기가 다소 흐트러져 있어 리듬이 끊기는 느낌이 있습니다. 특히 “억수로 반가워키 큰 서울국화의 허리를…” 부분은 시적 호흡이 과밀해져 이미지가 선명하게 전달되기 전에 숨이 가빠집니다. 이 대목은 의도적으로 끊어 리듬을 살리는 편이 좋습니다.
둘째, ‘서울국화’의 상징성이 매우 좋지만, 초반과 후반의 상징 기능이 약간 달라집니다. 앞에서는 기억 속 공동체의 일부, 후반에서는 재회의 대상(개별 존재)으로 더 강하게 서 있습니다. 이 변화가 의도라면 좋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왜 갑자기 개인적 대상이 되었는가”가 약간 생략되어 느껴질 수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 시는 기억–가족–시간–재회라는 구조가 매우 안정적으로 연결된
작품이고, 감각적 디테일과 정서의 진정성이 강점입니다. 특히 마지막의 침묵으로 감정을 봉인하는 방식은 이 작품의 가장 좋은 지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