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새우젓의 눈물
TV 속 한 여인이 웃고 있다.
평생 새우젓을 팔아 모은 돈을
가난한 학생들의 꿈에 내어주고
자신은 새우젓처럼 짜게 산 여인.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문득 어린 시절 도분이가 떠오른다.
전쟁이 지나간 장터 한켠,
새우젓 가게 앞 공터는 아이들의 놀이터였다.
고무줄이 하늘로 날고 아이들도 날아오르며
해 그림자 길어질 때까지
우리는 시간도 잊은 채 뛰어놀았다.
커다란 드럼통마다 새우젓과 멸치젓…익어가고
된장과 고추장이 묵은 이야기를 품던 집.
털보 아저씨와 국방색 몸빼의 아주머니,
화를 내다가도 금세 웃던 도분이.
새우젓가게 앞엔 늘 모여 들던 우리들
도분이가 혀끝에 올려주던 작은 새우 한 마리,
“찜!” 하고 터지던 짭짤한 맛.
다들 우물가로 달려가 찬물 바가지 들이켰지.
해 질 무렵 새우젓통을 머리에 인 도분이 엄마가
마을 사이로 모습 드러내고
양손엔 곡식 보리와 콩 자루가 매달려
젓갈과 바꾼 하루가 손끝에 흔들렸지.
설이면 뻥튀기 소리가 하늘을 깨우고
쌀 꽃이 흩어진 튀밥 속 아이들은 웃었고
집으로 돌아오면, 할머니와 어머니는
엿물에 튀밥을 버무려 달콤한 강정을 만들었다.
가래떡을 조청에 찍어 먹으며, 설날에 나이
한 살 더 먹는 일이 벼슬 올라가듯 좋았지.
도분이네 집에는 강정도 없고 떡가래도 없었다.
고향을 북에 두고 내려왔기에 아껴야 했을까.
가난보다 더 깊은 사연이 있었을까
주일이면 도분이네 가족이
깨끗이 빨은 옷 갈아입고 교회에 갔다
어느 해, 엄마가 싸주신 강정과 떡을
도분이네 집에 갖다드렸더니
도분이엄마는 사기종지에 새우젓을 담아주었다.
우리 식구들은 따뜻한 보리밥 위에
연분홍 새우 한 마리씩 얹어 석 달 열흘 먹었을까
그 작은 새우 한 마리에 고마움도 익어 있었다.
국민학교 오학년 때 서울로 이사 간 도분이
그 뒤로 소식은 끊겼지만
깍두기에 새우젓을 넣는 날이면
도분이가 활짝 웃으며 짠맛으로 돌아온다.
그리움은 왜 늘 짠맛일까.
입술에 스며드는 고 한 방울 속에서
“찜” 하고 웃던 어린 날이 조용히 다시 살아난다.
그 시절의 가난과 우정이 오래 삭은 새우젓처럼
내 마음의 풍경 속에서 따뜻하게 익어가고 있다
이 작품은 ‘새우젓’이라는 매우 구체적이고 생활적인 사물을 중심으로 기억·가난·우정·이주 경험을 촘촘하게 엮어낸 서정 산문시로 읽힙니다. 전체적으로는 과거의 공동체 기억을 통해 개인의 정서가 어떻게 “맛(짠맛)”이라는 감각으로 응축되는지를 보여주는 구조가 인상적입니다.
가장 두드러지는 미덕은 감각의 정교한 전이입니다. 새우젓, 멸치젓, 된장, 고추장 같은 발효 음식들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시간의 은유로 작동합니다. “익어가고”, “묵은 이야기를 품던” 같은 표현이 이를 강화하면서, 과거의 기억 자체가 ‘발효되는 시간’으로 설정됩니다. 그래서 회상은 단순한 추억이 아니라, 이미 오래 숙성된 감정의 현재형처럼 느껴집니다.
서사의 중심에는 ‘도분이’라는 인물이 있지만, 이 인물은 구체적인 인물이라기보다 공동체적 기억의 매개입니다. 특히 “짭짤한 맛”, “새우 한 마리”, “사기종지에 담긴 새우젓” 같은 반복된 이미지가 도분이를 현실 인물에서 ‘상징적 존재’로 확장시킵니다. 결국 도분이는 결핍과 나눔, 이별과 지속을 함께 품는 기억의 이름이 됩니다.
또 하나의 강점은 가난의 묘사가 감상적으로 흐르지 않고 생활 감각 속에 녹아 있다는 점입니다. “보리밥 위에 연분홍 새우 한 마리”, “엿물에 튀밥을 버무려 만든 강정” 같은 장면은 빈곤을 직접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면서도 오히려 더 선명하게 체감하게 합니다. 이것이 이 작품의 정서적 설득력을 높입니다.
후반부로 갈수록 ‘짠맛’은 단순한 미각이 아니라 기억의 코드로 전환됩니다. “깍두기에 새우젓을 넣는 날이면 도분이가 돌아온다”는 문장은 특히 효과적입니다. 특정한 행위(김치 담그기)가 기억을 호출하는 의례처럼 기능하면서, 상실된 사람을 현재로 불러오는 문학적 장치가 됩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중반부에서 이미 정서적 핵심이 충분히 형성된 뒤에도 유사한 회상 이미지가 비교적 길게 이어지면서 리듬이 다소 완만해지는 지점이 있습니다. 몇몇 대목은 압축되면 오히려 마지막 “그리움은 왜 늘 짠맛일까”의 여운이 더 날카롭게 살아날 여지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결말은 매우 안정적입니다. “짠맛”을 단순한 감각이 아니라 기억의 저장 방식으로 확정하면서, 개인적 경험을 보편적 정서로 확장합니다. 특히 “오래 삭은 새우젓처럼 마음의 풍경 속에서 익어간다”는 마무리는 이 작품 전체를 하나의 이미지로 다시 봉합하는 역할을 합니다.
정리하자면 이 작품은
‘맛의 기억’을 통해 ‘삶의 기억’을 복원하는 시로,
개인 서사와 공동체 기억이 자연스럽게 겹쳐지는 점이 가장 큰 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