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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 시 작품

79.봄이 머문 안동 구시장

작성자박하|작성시간26.06.22|조회수0 목록 댓글 0

79.봄이 머문 안동 구시장

 

 

입춘 지난 가로수 끝에

연둣빛 숨결 하나 조용히 돋아나

골목마다 푸른 기척이 스며드는 봄날

 

이웃사촌 덕이네 아지매와

안동 구시장 길을 천천히 걷는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안동찜닭을 실은 오토바이 한 대

골목의 결을 가르며 스쳐 지나가고

 

짧은 클랙슨 한 번에

비닐과 장바구니 사이가 잠시 벌어지고

시간이 날카롭게 접혔다 다시 펴진다

 

시장 바닥의 발소리와

엔진의 떨림이 한 겹으로

서로 다른 속도가 같은 공기의 다름

 

그 얇은 틈은 오래 머물지 못한 채

어깨와 웃음 사이로 오가고

찜닭 골목의 짙은 향으로

 

뜨거운 찜닭 앞에서

살아 있다는 온기를 천천히 맛본다

 

서로 계산을 밀고 당기다 끝내

아지매가 웃으며 먼저 지갑을 열고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그 한마디가 가게 안에 오래 남는다

 

어물전 앞에서 마주한

안동간고등어의 단단한 이름

 

이번엔 내가 값을 치르고

두 손에 건네받는 무게만큼

미소가 번진다

 

탑리행 버스에 오르자

다음에 또 안동에 오재이

아지매의 말이 창가에 걸리고

 

창밖으로 멀어지는 등 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하고 웃는다

 

봄은 아직 시장에 남아

천천히 접히고

닿을 듯 말 듯 저녁의 가장자리로 스민다

 

이 작품은 ‘시장’이라는 매우 구체적인 공간을 통해 봄의 감각과 삶의 결을 함께 엮어낸 서정시입니다. 단순한 계절 묘사나 여행기가 아니라, 일상의 움직임 속에서 감정이 어떻게 발생하고 사라지는지를 촘촘하게 따라간 점이 인상적입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감각의 층위입니다. “연둣빛 숨결”, “골목마다 푸른 기척”, “시간이 날카롭게 접혔다 다시 펴진다” 같은 표현은 봄을 시각적 풍경이 아니라 호흡과 물성, 시간의 감각으로 전환합니다. 특히 시장이라는 공간의 소음(클랙슨, 발소리, 엔진 진동)과 봄의 정적(숨결, 기척)이 겹치면서, 계절이 배경이 아니라 하나의 움직이는 기류처럼 느껴집니다.

중반부의 찜닭 골목 장면은 이 작품의 핵심적인 온도 지점입니다. “뜨거운 찜닭 앞에서 살아 있다는 온기를 천천히 맛본다”는 문장은 음식 묘사를 넘어 생존 감각의 자각으로 확장됩니다. 여기서 봄은 자연현상이 아니라 살아 있음의 체감으로 전환됩니다.

또한 인물 관계가 과장되지 않고 생활적으로 유지되는 점이 좋습니다. ‘덕이네 아지매’와의 계산 장면, 서로 지갑을 미루고 웃는 장면은 서사적 사건이 아니라 관계의 온도만 남기는 작은 에피소드로 기능합니다. 그래서 오히려 더 현실적이고 오래 남습니다.

후반부의 “탑리행 버스”, “다음에 또 안동에 오재이”는 공간의 이동과 관계의 여운을 동시에 남깁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작별이 아니라 관계가 완전히 끊기지 않은 채로 보존되는 방식입니다. 창밖으로 멀어지는 장면은 감정 과잉 없이 절제되어 있어 시의 톤을 안정적으로 마무리합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을 꼽자면, 중간의 감각적 이미지들이 매우 풍부한 반면, 후반으로 갈수록 그 이미지들이 다소 ‘정리된 결말’ 쪽으로 수렴하면서 초반의 생생한 긴장이 약간 완화됩니다. 일부 독자에게는 이게 안정감으로 작용하지만, 더 날카로운 인상을 원한다면 마지막 여운을 조금 더 비틀어도 좋겠습니다.

전체적으로 이 작품은

계절(봄)

공간(안동 구시장)

관계(이웃과의 동행)

감각(소리·온기·속도)

이 네 가지를 자연스럽게 겹쳐 놓은 생활 서정시입니다. 과장된 상징 없이도 충분히 시적인 밀도를 만들어낸 점이 이 작품의 가장 큰 강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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