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야시홀 연가의 오후
1970년 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길을 열던
한 시인의 이름이
시간의 먼지 위에 조용히 내려앉는다.
고향을 부르던 목소리
토속의 서정으로 바다를 품던 언어는
영덕의 바람 속에서 천천히 젖어가고
“마른 나뭇가지에서 떨어지는
작은 잎새 하나……”
노래처럼 흘러나오던 기억은
여전히 그의 입가에 머물러
지나온 계절을 흔든다
문이 열리면, 오래 기다린 손님처럼
빛이 먼저 들어오고
따뜻한 숨결이 먼저 손을 내민다
우리가 가져간 과일들은
조용히 바구니에서 풀려나
한 알씩 손바닥 위로 옮겨지고
딸기의 붉은 속살마다
햇살이 미세하게 번지며
거실은 다과의 온기로
천천히 숨을 고른다
귀의 어지럼으로
세상 바깥의 소리를 내려놓은 시간 속에서도
삶은 물결처럼 낮게 흐르고 있었다
“요즘은 좀 괜찮습니더”
따님의 말끝에 묻어나는 평온은
방 안 공기 위에 잔잔히 내려앉아
걱정의 자리를 조용히 비워낸다
오늘도 따님의 간곡한 청에
나는 송민도의 ‘여옥의 노래’를
가만한 숨결로 건네듯 부르자
세 사람의 손바닥에서
박수가 낮은 햇살처럼 퍼져나간다
노래의 여운이 가라앉은 자리
시집 『야시홀 연가』의 바다 위로
작은 조각배 하나가
끝내 고향 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영덕의 바다는 물결을 풀어놓고
우리의 마음 또한 그 결에 젖어
천천히 흔들린다
창가로 기울어가는 해
하루의 가장 부드러운 끝자락에서
작별은 소리 없이 바닥에 스며들고
돌아서는 발걸음 뒤로 문가에 남은 눈빛 하나
늦은 빛처럼 오래 머문다
“다음에 오시면 그 노래 또 불러주이소”
그 말은 길이 되어 우리는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손바닥 위에 조심스레 올려둔다
대구로 돌아오는 길
차창 밖 흔들리던 손 인사위로
노을이 끝내 따라와
끝나지 않는 여운처럼 도로를 물들였다
사람의 내일은 누구도 알지 못하고
시간은 늘 조용히 방향을 바꾼다
불과 한 달 뒤 서늘한 종이 한 장이
문틈으로 미세한 바람처럼 도착했다
그는 이미 이 세상에 없었다
2022년 4월 6일 아흔셋의 생이
고요히 접히는 순간
종이배처럼 접힌 시간 위로
긴 바람 한 줄기가 지나갔다
이제는 그곳에서 고향의 바람이
더 깊은 물결로 들려오기를
그의 이름 위에 조용히 띄운다.
이 작품은 회고적 산문시의 형태로, ‘한 시인의 생애’와 ‘방문 기억’, ‘죽음 이후의 시간’이 겹쳐지면서 하나의 긴 애도 서사를 완성하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는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한 기록이면서도, 개인의 삶을 넘어 “사람의 시간” 자체를 다루는 방향으로 확장되어 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가장 두드러지는 힘은 감각적 이미지의 축적입니다. “딸기의 붉은 속살마다 햇살이 미세하게 번지며”, “박수가 낮은 햇살처럼 퍼져나간다” 같은 구절들은 시각과 촉각을 동시에 건드리면서 공간을 매우 구체적으로 만들어냅니다. 특히 실내의 온기, 과일, 손바닥, 노을 같은 요소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면서 ‘방 안의 시간’이 거의 물리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밀도 있게 형성됩니다. 이로 인해 독자는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실제 방문 현장 속에 들어가 있는 듯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또 하나의 핵심은 시간 구조입니다. 작품은 현재의 방문 → 과거의 기억 → 사후의 통보(부고)로 이어지면서 선형적 시간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마지막의 “불과 한 달 뒤 서늘한 종이 한 장이 도착했다”는 문장은 앞선 따뜻한 장면들을 급격히 재구성하며, 전체를 애도 시편으로 전환시키는 장치로 작동합니다.
이 반전은 감정적으로 강하지만, 동시에 구조적으로도 매우 계산된 배치입니다.
다만 이 작품이 갖는 한계도 몇 가지 보입니다. 첫째는 이미지의 밀도에 비해 서사의 초점이 다소 분산된다는 점입니다. 시인의 이름, 가족의 말, 노래, 방문 장면, 영덕의 바다, 대구로의 귀환, 사후 통보까지 많은 층위가 겹치면서 핵심 정서가 어디에 중심을 두는지 흐려질 수 있습니다. 독자가 감정적으로는 따라가지만, ‘이 작품이 가장 붙들고 있는 하나의 핵심 장면’은 상대적으로 희미해집니다.
둘째는 정서의 방향이 일정하게 유지되기 때문에 긴장감이 약해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전반적으로 따뜻함과 회상의 정조가 유지되다가 마지막에 죽음이 들어오면서 급격히 전환되는데, 그 사이의 균열이 더 서서히 쌓였다면 결말의 충격이 더 깊어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가장 큰 성취는 “애도의 방식”을 매우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적인 감각으로 끌어올렸다는 데 있습니다. 특히 노래(송민도의 「여옥의 노래」)를 매개로 기억과 현재를 연결하는 방식은 단순한 추모를 넘어 ‘목소리의 지속’이라는 주제를 형성합니다. 이는 죽음 이후에도 언어와 소리가 남는다는 감각을 효과적으로 전달합니다.
종합하면, 이 작품은 감각적 이미지와 기억의 흐름을 통해 한 인간의 생애를 부드럽게 복원한 뒤, 마지막에 시간의 단절을 통해 그 전체를 애도로 전환시키는 구조를 가진 작품입니다. 이미 충분히 완성도 있는 상태이며, 다만 핵심 응축 지점을 조금 더 선명하게 설정하면 더 강한 여운이 남을 수 있습니다.
**종합평
이 작품은 문학적 스승에 대한 존경, 노년의 품격, 그리고 사람 사이의 따뜻한 정을 잔잔하게 그려낸 생활 서정시입니다. 특별한 사건 없이도 한 번의 방문이 얼마나 깊은 감동으로 남을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무엇보다 마지막 노을의 이미지는 시 전체를 은은하게 감싸며 독자의 마음에도 오래 머무는 여운을 남깁니다.
평점으로 표현한다면 ★★★★☆(4.5/5) 수준의 완성도를 지닌 작품으로, 지역 문예지나 동인지에 발표하기에 충분한 감동과 진정성을 갖춘 작품이라 평가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