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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 시 작품

21.어디까지 왔나/ 21번 다시

작성자박하|작성시간26.06.22|조회수0 목록 댓글 0

21.어디까지 왔나

 

 

어릴 적 골목 끝에서

숨을 고르며 묻고 답하던 놀이

 

어디까지 왔나?”

서울까지 왔다.”

 

어디까지 왔나?”

대구까지 왔다.”

 

까르르 웃음이 돌멩이처럼 굴러가고

서울이며 대전이며 대구며 부산이

한 걸음의 장난 속에서 가벼이 넘어가던 시절

 

손바닥만 한 세상이었지만

우리는 언제나 먼 곳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이제 칠순의 고개에 서서

나는 조용히 나에게 다시 묻는다

 

어디까지 왔나

 

지나온 길을 더듬어 보면

기쁨은 빛으로 남고

눈물은 깊은 흙이 되어

수많은 계절이 내 발밑에 층층이 쌓여 있다

 

이미지로 남는 마지막 길

 

세 그루 외손자들

햇살을 닮은 눈으로 자라나는 아이들

 

서울을 넘어, 부산을 넘어

 

바다 끝 바람 너머까지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 발걸음으로

 

나는 이제

한 그루의 오래된 나무가 되어

그늘이 되어 주고 바람을 막아 주고

때로는 말없이 흙이 되어

 

뿌리 깊은 곳에서

조용히 물을 길어 올리는 사람으로

남은 계절을 살아가고 싶다

 

이 작품은 ‘인생 회고 → 세대 연결 → 존재의 태도 전환’으로 자연스럽게 흐르는 구조를 가진 서정시입니다. 전체적으로는 노년의 자각과 삶의 수용을 “놀이의 기억”과 겹쳐 놓으면서 정서적 울림을 만드는 방식이 인상적입니다.

먼저 시작 부분의 “어디까지 왔나?” 놀이 장면은 매우 효과적인 도입입니다. 어린 시절의 단순한 놀이가 실제 지명(서울, 대구, 부산 등)으로 확장되면서, ‘공간의 이동’이 ‘인생의 여정’으로 은근히 전이됩니다. 이때 웃음과 돌멩이 이미지(“까르르 웃음이 돌멩이처럼 굴러가고”)는 기억의 생동감을 잘 살려줍니다. 다만 이 비유는 다소 직설적이라 감정의 여백보다는 설명성이 조금 더 강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중반부로 넘어가면서 시의 핵심 정조가 분명해집니다. “칠순의 고개”라는 표현은 노년의 위치를 상징적으로 잘 잡고 있고, 기쁨과 눈물을 “빛”과 “흙”으로 나눈 부분은 시간의 축적을 물리적 감각으로 변환해 설득력을 줍니다. 이 대목에서 시는 회고의 감상에 머물지 않고, ‘삶이 쌓이는 방식’을 이미지로 구성하려는 시도를 보여줍니다.

후반부의 “외손자들”과 “세 그루” 이미지는 세대의 지속성을 드러내는 장치로 읽힙니다. 특히 아이들을 “햇살을 닮은 눈”으로 보는 시선은 전형적이지만 따뜻한 계열의 은유입니다. 여기서 시는 개인의 삶에서 가족과 미래 세대로 시선을 이동시키며,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계속되는 시간’으로 확장됩니다.

마지막 부분의 “한 그루의 오래된 나무” 이미지는 이 작품의 중심 상징입니다. 노년의 화자가 스스로를 자연물로 전환하면서, 역할을 ‘성취’가 아니라 ‘기능’(그늘, 바람막이, 흙, 물의 순환)으로 재정의하는 점이 특징적입니다. 이 부분은 시의 메시지를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지만, 동시에 약간은 교훈적으로 정리되는 느낌도 있습니다. 즉, 앞의 서정적 흐름에 비해 결말이 다소 결론형 문장으로 닫히는 경향이 있습니다.

종합하면, 이 작품의 강점은

어린 시절 기억과 노년의 자기 성찰을 자연스럽게 연결한 구조

‘공간 이동’과 ‘생의 여정’을 겹쳐 놓는 발상

나무/흙/물 같은 자연 이미지로 삶을 환원하는 통합적 상징성

이고, 보완 여지는

일부 비유가 설명적으로 들릴 수 있는 지점

후반부 결말의 정서가 다소 정리형으로 닫히는 점

결과적으로 이 시는 “회고의 감상”에서 “존재의 수용”으로 이동하는 흐름이 안정적으로 구축된 작품입니다. 특히 노년의 시선이 자기 연민에 머물지 않고 ‘다음 세대의 시간’으로 확장된다는 점에서 완결성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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