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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하 시 작품

89.혈순이를 다시 만난 날

작성자박하|작성시간26.06.23|조회수0 목록 댓글 0

89.혈순이를 다시 만난 날

 

사십 년의 강을 건너

우리는 병원 엘리베이터 앞에서

뜻밖의 봄처럼 마주쳤다.

"혹시 동촌에 살지 않았나요?"

 

낯선 물음 하나가

잠들어 있던 세월의 문을 두드렸다.

"야야, 니가 그 친구 맞제?"

 

그 한마디에

사십 년은 봄눈처럼 스르르 녹아내리고,

 

교실 맨 앞줄에 앉아

수줍게 웃던 소녀 하나가

다시 내 곁으로 걸어 나왔다.

까무잡잡한 얼굴,

눈가에 번지던 환한 웃음.

 

세월은 머리카락을 희게 했어도

그 웃음만은 조금도 늙지 않았다.

 

손을 맞잡고

우리는 여고 시절을 펼쳐 놓았다.

 

교복 깃에 꿈을 달고

세상을 다 가진 듯 웃던 날들,

 

바람에도 설레고 작은 일에도 깔깔대던

푸른 계절의 이름들.

 

신기하게도 병실도 같고

이곳에 오게 된 사연도 닮아 있었다.

 

휴게실에 번지는 커피 향 사이로

오래된 우정은

마른 가지 끝 새순처럼 다시 피어났다.

 

혈순이가 말했다.

"등 따시고 배부르면

잘 사는 거 아이가."

 

그 말은 된장국 끓는 시골 저녁처럼

소박하고 따뜻해서,

 

나는 한참 동안 마음속 허기를 잊었다.

 

헤어질 시간이 되어

우리는 짧은 약속 하나를 남겼다.

"또 만나자." 돌아서는 길,

 

저녁 하늘 한켠에

푸른 별 하별 하나 떠오르고,

 

나는 알게 되었다.

세월은 많은 것을 데려가도

진심으로 그리운 사람 하나는

끝내 늙지 않는다는 것을.

 

사십 년 만에 다시 만난 친구, 혈순이.

그날의 재회는

잊고 살던 나의 봄을

조용히 다시 피워 주었다.

 

 

*이 시는 사십 년 만의 우연한 재회가 불러낸 우정의 회복과 시간의 초월성을 따뜻하고 담백하게 그려낸 작품입니다.

 

작품평

 

혈순이를 다시 만난 날은 병원이라는 예상치 못한 공간에서 이루어진 재회를 통해, 오랜 세월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인간적 정과 우정의 가치를 아름답게 보여준다. 시의 첫머리인 "사십 년의 강을 건너"라는 표현은 긴 시간의 흐름을 단숨에 압축하면서도, 재회가 얼마나 기적 같은 순간인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특히 "사십 년은 봄눈처럼 스르르 녹아내리고"라는 구절은 기억 속에 잠들어 있던 학창 시절이 한순간에 현재로 되살아나는 감정을 생생하게 전달한다. 세월이 외모는 바꾸어 놓았지만 "그 웃음만은 조금도 늙지 않았다"는 표현에서는 사람의 본질적인 아름다움과 우정의 지속성을 깊이 있게 보여준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과장되지 않은 진솔함에 있다. 친구 혈순이의 "등 따시고 배부르면 잘 사는 거 아이가"라는 말은 화려한 성공이나 물질적 풍요보다 평범한 일상의 안온함이 행복의 본질임을 일깨운다. 시인은 이 한마디를 "된장국 끓는 시골 저녁"에 비유함으로써 삶의 지혜와 정겨움을 독자에게 자연스럽게 전한다.

 

또한 병원이라는 공간은 단순한 배경을 넘어 의미를 가진다. 같은 병실, 비슷한 사연으로 만난 두 사람의 모습은 인생 후반부에 이르러 서로를 위로하고 공감하는 동반자로서의 우정을 더욱 깊고 성숙하게 부각시킨다. "마른 가지 끝 새순처럼 다시 피어났다"는 표현은 오랜 세월 잠들어 있던 우정이 다시 생명력을 얻는 모습을 아름답게 형상화한다.

 

종결부 역시 인상적이다. "진심으로 그리운 사람 하나는 끝내 늙지 않는다"는 깨달음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를 함축하며 독자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다. 마지막의 "잊고 살던 나의 봄을 조용히 다시 피워 주었다"는 구절은 친구와의 재회가 단순한 만남을 넘어 잃어버린 젊음과 순수한 마음을 되찾게 하는 치유의 경험이었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추억을 회상하는 데 머물지 않고, 우정이 가진 회복력과 삶을 따뜻하게 지탱하는 인간관계의 소중함을 잔잔한 감동으로 전한다. 읽는 이로 하여금 자신의 오랜 친구와 지나온 시간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서정성과 진정성이 돋보이는 수필적 서정시라 할 수 있다.

 

 

 

 

 

 

혈순이를 다시 만난 날

 

사십 년의 강을 건너 우리는 뜻밖에도

병원 엘리베이터 안에서 만났다.

 

좁은 공간에 나와 그녀, 단 둘.

 

어디에 눈을 둘까 망설이던 순간

누군가의 시선이

조용히 내 얼굴에 내려앉았다.

"혹시... 동촌에 살지 않았나요?"

낯선 물음 하나가

잠들어 있던 세월의 문을 열었다.

 

자동문이 열리자

우리는 병원 복도로 흘러나왔고,

"야야, 니가 그 친구 맞제?"

그 한마디에 사십 년 묵은 시간이

봄눈처럼 녹아내렸다.

 

맨 앞줄에 앉아 수줍게 웃던 혈순이.

 

까무잡잡한 얼굴도, 오동통한 정감도,

인절미 팥고물처럼 들어붙는 그대로다.

 

우리는 손을 맞잡고

잃어버린 계절을 주워 담듯

여고 시절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교복 깃에 하얀 꿈을 달고

세상을 다 가질 듯 웃던 날들,

갈매기 날아가듯 편지를 쓰고

사랑이라 믿었던 설렘마저 웃음이 된 나이

신기하게도 찾아온 병실도 같았고

문병 온 사연도 비슷했다.

 

우연은 자꾸만 인연의 얼굴로 나타났다.

휴게실 커피 향 사이로 오래된 우정이 피어났다.

잘 사느냐는 물음에

"등 따시고 배부르면 잘 사는 거 아이가."

 

혈순이의 말은 된장 냄새나는 시골 저녁처럼

소박하고 따뜻했다.

마당 한켠 채소밭과 맨드라미꽃 이야기,

"언제든 놀러 온나." 그 한마디에

나는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넓은 밭이 될 수 있는지를

 

병실 창가에도 저녁빛이 스며들었다.

환자들의 코에는 흰 붕대 훈장이 달려있어

우리는 웃음으로 병실 가득 햇살을 풀어놓았다.

 

떠날 시간이 되어 서로의 손을 놓지 못한 채

"또 만나자." 짧은 약속 하나를 남겼다.

 

돌아서는 순간, 내 가슴 깊은 곳에

푸른 별 하나가 떠올랐다.

그 별은 나직하게 말했다.

인생은 만남이라는 꽃을 피우고

헤어짐이라는 바람을 건너며

다시 또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고.

 

사십 년 만에 찾아온 친구 혈순이,

세월은 많은 것을 바꾸어도

진심으로 그리운 사람 하나는

결코 그 마음이 늙지 않는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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