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육이오의 기억
1950년 6·25가 터진 지 며칠 뒤
소방서 나팔꽃 모양 경보기 사이로
확대경처럼 부푼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촌 면민 여러분, 빨리 피난하십시오.”
그 소리에
우리 집도 서둘러 보퉁이를 꾸렸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집을 지키겠다며 버티셨고
삼촌과 숙모는
여기 남으면 포탄에 맞는다며
두 분의 등을 떠밀어 함께 나섰다
쌀과 보리쌀, 미숫가루
간장, 된장, 고추장 올망졸망 항아리들
엄마는 머리에 보따리 이고
남동생 아기를 등에 업고
네 살배기 나는 엄마 곁에 바짝 붙었고
언니들은 손잡고 뒤따르게 하며
과수원집을 떠났다
개와 닭들이 슬픈 눈으로
데리고 가달라고 울었다
아버지는 이미
후생원 아이들을 트럭에 태워
피난길에 오른 뒤였다
우리식구가 겨우 올라탄 기차 안은
사람과 짐보따리 땀냄새로 뒤엉켜
숨 쉴 틈조차 없었다
구석 한 자리를 얻었지만
우리 형제들의 숨결은
사람들 틈에 눌려 가늘어졌다
그때 엄마가 “배 고프제” 건네준 주먹밥
아버지 주먹만 한 튼튼한 밥덩이와
마른명태 포 한 조각
세 자매는 아껴가며 베어 물었다
짭짤한 생선 맛과 조금 단 밥알
그날의 허기 앞에서는 세상진수성찬도
그보다 맛있지 않았으리
전쟁은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길고 긴 피난길이었다
저녁 무렵 월래 바닷가에 닿았다
폭격에 지붕 복판이 날아간 초가집
바람이 주인처럼 드나드는 곳이
우리가 살아갈 집이었다
아침에 언니들은 천막학교로 가고
홀로 남은 나는 바닷가에서
조개껍질에 밥 담고 바닷물 국으로
밥상 차리던 소꿉놀이
갑자기 먹구름이 밀려오고
아기 갈매기 한 마리
어미 찾아 울며 하늘 멀리 날아가며
그 울음 결에 어린 내 가슴도
엄마가 그리움으로 밀려왔다
“엄마, 엄마…” 부르며 뛰어가던
작은 발자국 소리를 듣고
엄마가 달려와 환한 얼굴로
나를 품에 꼭 안아주었다
그 순간 전쟁을 몰랐던 아이는
엄마 품 하나로 온 세상을 다 얻어
엄마 가슴에 웃음꽃 안겨드렸지
이 작품은 6·25 전쟁 당시 피난 경험을 어린 화자의 시점에서 복원한 기억 서사로, 개인의 생애 기억을 통해 전쟁의 비극성과 인간적인 온기를 함께 드러내는 것이 특징입니다.
우선 전체적으로는 **‘피난의 혼란 → 결핍과 생존 → 전쟁의 무지한 체험 → 모성의 품으로 귀결되는 정서적 수렴’**이라는 흐름을 갖고 있습니다. 전쟁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이지만, 서술의 초점은 전투나 이념이 아니라 “네 살배기 아이”의 감각에 맞춰져 있어 사건이 매우 일상적이고 체감적으로 전달됩니다.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구체적인 생활 이미지의 축적입니다.
쌀, 보리쌀, 미숫가루, 된장·고추장 항아리, 주먹밥, 마른명태 같은 식재료들은 단순한 묘사가 아니라 “삶을 붙잡고 이동하는 짐”이자 “생존의 무게”로 기능합니다. 특히 보따리를 머리에 인 엄마, 아기를 업고 걷는 모습은 피난민의 현실을 압축적으로 보여줍니다.
또한 이 작품은 전쟁의 폭력성을 직접적으로 묘사하기보다, ‘공백과 결핍’으로 표현합니다.
“숨 쉴 틈조차 없는 기차”, “바람이 주인처럼 드나드는 초가집” 같은 표현은 파괴된 일상과 불안한 공간감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직접적인 폭격 장면보다 이런 간접 묘사가 오히려 전쟁의 공포를 더 크게 느끼게 합니다.
중간 이후부터는 분위기가 바닷가 피난지에서의 놀이와 상실의 대비로 이동합니다. 조개껍질에 밥을 담아 ‘소꿉놀이’를 하는 장면은 전쟁 속에서도 유지되는 아동의 세계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그것이 얼마나 불완전한 삶인지를 드러냅니다. 이어지는 갈매기의 울음과 “엄마 엄마”의 외침은 자연의 소리와 인간의 정서가 겹쳐지면서 그리움의 절정을 형성합니다.
마지막 부분은 이 작품의 핵심 정서입니다.
아이에게 전쟁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엄마의 부재로 느껴지는 세계의 붕괴”이고, 결국 모성의 품이 세계 전체를 회복시키는 공간으로 제시됩니다. “엄마 품 하나로 온 세상을 다 얻어”라는 문장은 전쟁 서사를 인간 생존의 최소 단위인 ‘품’으로 수렴시키는 강한 결말입니다.
정리하면 이 작품은
전쟁의 역사적 서사보다 기억의 체험성을 중심에 두고
파괴보다 일상의 감각(음식, 냄새, 소리)으로 전쟁을 드러내며
결국 인간 생존의 본질을 **‘모성의 보호와 애착’**으로 귀결시키는 시라고 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