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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철인권상

제8회 박종철인권상에 김석진 씨(현대미포조선 현장노동자투쟁위원회 의장)

작성자민들레87|작성시간12.06.05|조회수155 목록 댓글 0

 

첨부파일 보도자료(제8회 박종철인권상).hwp

사)민 주 열 사 박 종 철 기 념 사 업 회

(140-111)서울시 용산구 원효로1가 133-3 용산 리첸시아 101동 404호 / 전화 070)4141-4497

e-mail : jcpark610@gmail.com / 사무국장 김학규 010-4529-9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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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번호 : P M A 12-0604

 

시행일자 : 2012. 06. 4

 

수 신 : 각 언론사 담당 기자

 

참 조 :

 

 

 

일 자

시 간

 

 

 

번 호

 

 

 

처 리 과

 

 

 

담 당 자

 

 

 

제 목 : ‘제8회 박종철인권상’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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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리사회의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 그리고 자유로운 언론문화 창달을 위해 노력하고 계신 귀 언론사와 기자님께 경의를 표합니다.

 

2.‘박종철인권상’은 지난 2003년에 제정된 이래 국가권력의 부당한 폭압에 맞서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와 인권 신장을 위해 노력해 온 사람이나 단체, 소수자-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지키고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해 온 사람이나 단체를 선정하여 시상함을 통해, 우리 사회 민주화의 결정적 분수령이 되었던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 역할을 했던 박종철 열사의 ‘의로운 죽음’을 기리고, ‘신의’와 ‘약속’을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기며 끊임없이 민중과 함께 하고자 했던‘박종철 정신’을 되새기며,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와 인권향상에 기여하고 앞장서는 분이나 단체를 격려하는 역할을 해 왔습니다. 올해는 특히 6월항쟁 25주년이 되는 해로 열사가 돌아가신 지 사실상 한 세대가 흐른 시점이어서 올해의 박종철인권상 시상은 더욱 더 뜻깊은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습니다.

 

3. 이에 제8회 박종철인권상 수상자로 김석진 씨(52세, 현대미포조선 현장노동자투쟁위원회 의장)를 선정하여 오는 6월 8일(수) 오전 10시 30분에 아래와 같이 시상식을 개최하고자 하오니 언론의 적극적인 취재와 보도 부탁드립니다. (붙임 자료 참조)

- 아 래 -

제8회 박종철인권상 시상식

일 시 : 2012년 6월 7일(목) 오전 10시 30분~

장 소 : 경찰청인권보호센터(구 남영동대공분실) 7층 강당

수상자 : 김석진(52세, 현대미포조선 현장노동자투쟁위원회 의장, 010-7294-9477)

주 관 :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주 최 : 6월항쟁25주년행사국민추진위원회

후 원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붙임자료 내용 : 1. 심사평(심사위원회 구성현황 포함) 2. 수상소감(김석진 씨 약력 포함)

3. 박종철인권상 역대 수상자 명단

6. 박종철열사 소개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이사장 안승길

 

 

□ 심 사 평

- 제8회 박종철 인권상 수상자로 김석진 씨를 선정하며

 

박종철인권상은 생전에 열사가 열망하던 민중해방의 정신을 가장 열성적으로 실천하는 이들에게 수여해 왔습니다. 올해 심사위원회에는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와 인권, 민중해방을 위해 실천하는 가장 열성적인 수상 후보자들이 추천되었습니다. 그분들 모두 수상 자격이 있음은 물론입니다.

심사위원들은 고심 끝에 자본과 권력의 유착에 맞서 장기간의 해고 투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복직한 이후에는 정규직의 신분임에도, 테러를 당하면서 까지도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생존권 보장과 정규직화를 위해 헌신해 온 김석진 씨에게 격려와 연대의 뜻을 전한다는 의미로 박종철인권상 수상자로 결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김석진 씨는 1980년 현대미포조선에 입사한 이후 6월항쟁에 이은 7 8 9노동자대투쟁을 거치면서 민주노조운동에 앞장서 왔으며, 1997년에는 부당해고를 당해 자본과 권력의 유착 속에 무려 8년 3개월의 시간을 끌었지만 이에 흔들리지 않고 180일간 철야노숙투쟁과 43일 단식투쟁 등을 전개하면서 마침내 2005년에 이르러 복직판결을 받아냅니다. 그 과정이 얼마나 험난했겠습니까. 그러나 그에게 닥친 시련은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2008년부터 사내하청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적극 나서면서 자본의 감시와 탄압은 더욱 심해져 마침내는 2009년 초에 이르러 경찰의 방조 속에 현대중공업 경비대로부터 테러를 당하는 사건까지 당합니다. 회사에서는 동료들과 심지어는 사내하청 노동자들까지 그와 접촉을 꺼리고 피하면서 ‘왕따’ 신세를 감내해야 했습니다. ‘노동자도 인간이다. 인간답게 살아보자!’며 노동운동에 뛰어든 민주노조운동가 김석진은 자본과 권력의 횡포 앞에 노동운동가 김석진은 물론 한 인간 김석진의 존재마저 위협받는 어려운 상황에 놓였던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가족과 동료들의 아픔은 또 얼마나 컸겠습니까. 이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현장을 먼저 생각하고 동료를 먼저 생각하면서 변함없는 연대의 의지, 투쟁의 의지를 밝히고 계시는 김석진 씨는 모든 이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판단했고, 보다 많은 이들의 따뜻한 연대의 손길이 전달되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상이 김석진 씨와 그의 가족, 그리고 동지들에게 조금이라도 위로와 격려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고 싸우는 민중들에게도 격려가 되기를 바라며, 연대의 마음을 전합니다.

이런 이유들로 제8회 박종철인권상 심사위원회는 김석진 씨를 수상자로 결정했음을 밝힙니다.

 

2012년 6월 4일

제8회 박종철인권상 심사위원회

 

 

※ 제8회 박종철인권상 심사위원회 구성

- 심사위원장 : 진관스님(불교인권위원회 위원장)

- 심사위원 : 김거성(한국투명성기구 회장, 한국기독교장로회구민교회 목사

박동호(신정동성당 주임신부, 천주교서울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 위원장)

박래군(인권재단 사람 상임이사), 정도스님(양산 전법회관 주지),

조 국(서울대 법대교수), 한홍구(성공회대 교양학부교수)

 

□ 수상 소감

1) 수상자 김석진 약력

■1961년 1월17일생 (52세)

■1980년 현대미포조선 입사

■1988년 제1대 노동조합 체육부장

■1994년 94.95.96.97 노동조합 대의원, 금속연맹 대의원

■1994년 노동조합 운영위원, 임,단협교섭위원, 풍물패,

■1996년 현대미포조선 민주노동자동지회 설립 및 초대의장

■1997년 노조활동탄압 부당해고

■2000년 180일간 철야노숙투쟁과 43일 단식투쟁

■2002년 6.13 지방선거 울산광역시의원 출마

■2003년 울산지역해고자 협의회 의장, 전해투 부위원장

■2003년 용인기업 불법파견인정과 고용승계 울산대책위원회 공동대표

■2004년 4.15총선 민주노동당 비례대표 국회의원 후보

■2005년 해고무효화 소송 지법,고법,대법원 승소판결 (원직복직)

■2006년 현대차비리사태 울산노동자투쟁본부 상임대표

■2006년 현대미포조선 단협,규약 사수!! 현장조직 공동투쟁본부 공동대표

■2008년 사내하청 용인기업 복직연대투쟁 정규직 현장대책위원회 대표

■2009년 미포조선 하청 용인기업 복직연대투쟁과정에서 2009년1월17일 현대중공업 경비대의 심야테러 당함 (1년간 병원통원치료)

■2010년 비정규직 철폐, 정규직화를 위한 동구 공동대책위원회 공동대표

■2011년 12월3일부터 중등도 우울증에피소드 병명으로 산재요양중(현재)

■2012년 현재 현대미포조선 현장노동자투쟁위원회 의장

 

2) 수상 소감

 

‘죽지 않고 일하고 싶다. 또 한 명의 사내하청 노동자가 죽어 나갔다. 서른다섯, 결혼한 지 2개월 되었단다. 혼인신고도 아직 하지 않았단다. 몇 개월 전의 일이다. 살얼음 걷듯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조선소 노동자는 살아도 산목숨이 아니다. 며칠만 지나면, “젊은 사람이 참 안됐구먼. 에이, 죽은 놈만 불쌍하지....” 슬픔은 잠시뿐, 죽음의 마무리 조건인 보상액수에 대한 얘기만 오고가고, 오늘도 노동자 죽음을 뒤로한 채, 우리가 만든 배의 명명식을 하면서 휘황찬란한 식장에는 높으신 나리들 손뼉 치는 소리와 뱃고동 소리는 하늘을 찌른다. 저 배 어딘가에는 죽어간 동료의 땀 냄새가 배어 있는데.’

 

미포조선소에서 사내하청노동자 산재사망 추도제를 지내면서 원·하청 노동자들 앞에서 외쳤던 추도사 일부입니다. 박종철 열사께서 독재정권에 살인을 당하고 터져 나온 민주항쟁과 노동자대투쟁 이후로, 조선소 노동자들의 죽음의 행렬이 잠시 멈추는가 싶더니, 이젠 사내하청노동자들이 그 자리를 채웁니다. 사내하청노동자들은 87년 이후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노동조합을 설립할 수조차 없습니다. 이들은 정규직이 민주노조를 설립하기 전의 부당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 해, 한 해 기념해오던 순간에, 비정규직 사이에서 역사와 진보의 시간은 거꾸로 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노동자는 하나인데 자본은 두 세계의 노동자로 갈라놓았습니다. 이 질서에 순응하지 않으면 자본은 무자비한 폭력으로, 생존권을 끊어버리며 조여 옵니다. 목 졸려 죽거나, 머리를 숙이거나.... 이 선택 앞에 놓여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짊어진 잔인하고 고통스런 무게를 조금씩이라도 나누어 짊어지려는 연대의 마음가짐이 우리 사회의 인간다움과 인권을 지키는 마지막 힘이고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한진중공업 85호 크레인으로 달려와 주었던 희망버스와 대한문 쌍용차 분향소로 이어지고 있는 추모물결이 희망의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저 역시 가족과 동지들의 지지와 연대가 아니었더라면 일찍 포기했을 것입니다. 함께 싸워준 가족과 동지들에게 깊은 고마움과 또, 미안한 마음도 전합니다.

 

박종철 인권상 수상자 선정에 감사드립니다. 이에 힘입어 다시 한 번 다짐합니다. 해고된 사내하청노동자들의 복직을 위해, 그리고 현중경비대의 살인적 폭력과 사측의 반인권적 노무관리를 규탄하며 회사와 투쟁해오는 동안, 저들은 저를 보고 거짓과 음모를 꾸며 선동하고 있다고 고립시키려 해왔습니다. 그러나 어떤 노동자도 자신의 인간다운 삶을 놓고 거짓과 음모를 꾸미지 않습니다. 자본에 빼앗기고 당하고 있는 현실 앞에서 거짓과 음모를 꾸밀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또한 참혹한 현실을 진실하게 알리는 것만이 노동자의 무기이기 때문입니다. 세계로 수출하는 자랑스런 대한민국, 세계를 선도하는 일등기업의 허상 아래에는 비정규직 차별과 정리해고 위협, 장시간 노동, 산재라는 이름의 기업 살인, 반인권적 노무관리의 진실이 짓눌리고 은폐돼 있습니다. 이 모순된 현실 앞에서 진실을 말할 수 있는 권리를 결코 내려놓지 않으려 합니다. 또 투쟁의 의무를 벗지 않으려 합니다. 투쟁만이 야만에 짓눌려있는 노동자의 진실을 바꿔낼 수 있습니다. 노동자가 하나 되는 세상,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이 올 때까지 열사의 정신을 가슴에 담고, 머리가 희어질 때까지 투쟁을 멈추지 않을 것을 열사 앞에서 다시 다짐합니다.

 

 

2012년 6월 5일

 

현대미포조선 현장노동자투쟁위원회 의장 김석진

 

※ 제8회 박종철인권상 수상자 김석진 씨 관련 언론보도 자료(참조 부탁)

 

-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2527.html

-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8377.html

-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517359.html

 

※ 박종철인권상 역대 수상자 명단

 

제1회 박종철인권상 시상식(2003년 6월 7일)

: 이인영(전대협 초대의장)

 

제2회 박종철인권상 시상식(2004년 6월 7일)

: 윤기진 황선 부부(범청학련 남측본부 의장과 대변인)

 

제3회 박종철인권상 시상식(2005년 6월 7일)

: 이동진(한총련 조국통일위원장, 경상대총학생회장)

최승환(한총련 의장, 부산대총학생회장)

 

제4회 박종철인권상 시상식(2006년 6월 7일)

: KTX여승무원 노조

 

제5회 박종철인권상 시상식(2007년 6월 8일)

: 이시우(사진작가)

 

제6회 박종철인권상 시상식(2009년 12월)

: 도한영(6.15공동선언실천남측위원회 부산본부 사무처장)

 

제7회 박종철인권상 시상식(2011년 6월)

: 김진숙(민주노총부산본부 지도위원)

 

 

□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 역할을 한 박종철의 ‘의로운 죽음’

대의와 신의를 위해 물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군사독재정권에 맞선 박종철

 

우리 사회 민주화의 결정적 분수령이 되었던 1987년의 6월 민주항쟁. 우리는 지역과 남녀노소를 불문한 전 국민적 참여를 통해 만들어 낸 6월 민주항쟁을 통해 비로소 26년간 지속되어 온 군사독재정권을 끝장내고 대통령 직선제 도입을 포함한 우리 사회 ‘민주화’의 결정적 돌파구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박종철(당시 23세, 서울대 언어학과 84학번)의 의로운 죽음이었다.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으로 알려진 1987년 1월 14일의 이 사건은 당시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한 선배의 소재를 파악하려던 경찰이 박종철을 불법연행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박종철은 사건이 터지기 며칠 전 위기에 처한 조직 재건을 추진 중이던 선배에게 몇몇 인물과의 연락업무를 부탁받은 상황이었다. 박종철은 ‘약속’과 ‘신의’를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겼다. ‘약속’은 단순히 한 선배와의 사적인 약속이 아니었으며,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우리 사회 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민족민주운동의 대의를 지켜내겠다는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종철 열사는 경찰의 물고문을 비롯한 모진 고문에도 선배의 소재를 밝히기를 거부했으며,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민주의 제단’에 바쳤던 것이다.

이러한 박종철 열사의 의로운 죽음은 끝내 6월 민주항쟁으로 활화산같이 폭발하여 우리 사회 민주화의 초석을 놓게 되었던 것이다. 민주주의의 대의를 위해,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을 위해 ‘선배와의 약속’, ‘신의’를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것, 바로 이것이 ‘박종철 정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민중의 삶과 하나가 되고자 했던 박종철의 불꽃같은 삶

 

박종철은 1965년 4월 1일 부산에서 아버지 박정기 씨와 어머니 정차순 여사 사이에서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산토성초등학교, 영남제일중학교, 혜광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는 보통의 공부 잘하는 학생이 걷는 평범하고 모범적인 학생의 길을 걸었다. 하얀 얼굴과 재치있는 언행으로 주위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이런 박종철에게 자극을 준 사건은 1979년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에 조종을 울린 부마민중항쟁이었다. 열사가 중학교 3학년이던 그해 10월, 부산-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유신독재에 반대하며 들불처럼 일어난 부마항쟁의 열기는 어린 열사에게 막연하게나마 자기가 살아가야 할 삶의 방향에 대해 고민하도록 만든다. 열사의 형인 박종부도 박종철이 자신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서강대 운동권이었던 형의 의연한 모습이나 형이 보던 서적은 박종철이 이후 대학교에 진학해서 학생운동에 참여하도록 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

박종철은 재수를 하여 1984년 서울대 언어학과에 입학한다. 박종철이 입학한 그 해는 당시 학생운동을 이완시키고자 전두환 군사정권이 기만적으로 추진한 ‘학원자율화조치’로 제한적이나마 열린 공간이 형성된 시기였다. 박종철은 치열한 고민과정을 거쳐 ‘대학문화연구회’라는 비공개써클에 가입하였고, 체계적인 학습과정을 통해 우리 사회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면서 민중지향적인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2학년 때는 과 대표를 맡았으며, 3학년에 올라가서는 과 학생회장을 맡아 언어학과와 인문대 학생자치활동에도 앞장서면서 학생운동의 선봉에 선다. 공장활동, 농촌활동 등을 통해 노동자-농민 등 민중들의 삶을 체화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전두환 군사정권의 폭압에 직접 저항하는 가두투쟁, 민중들의 생존권 투쟁에 연대하는 민중연대투쟁 등에도 앞장선다. 그 결과 도시빈민들을 거리로 내모는 강제철거에 반대하는 사당동 가두시위로 구류 5일(1985. 5), 한국전쟁이후 최초의 노동자 정치파업이었던 구로동맹파업을 지원하기 위한 연대투쟁인 가리봉동 가두시위로 구류 3일(1985. 6)을 살기도 했으며, 전태일 열사의 혼이 담겨있는 청계피복노조 합법성쟁취대회와 그 시위에 참가했다가 구속(1986. 4)되기에 이른다. 박종철은 이런 시련을 겪으면서도 조금도 위축됨이 없이 자신을 추스렸으며, 그해 7월 감옥에서 나온 이후에도 민중지향성을 끊임없이 추구하면서 전두환 군사정권의 주구에 불과했던 폭력살인 경찰에 의해 죽임을 당할 때까지 동료들과 함께 학생운동에 헌신한다.

 

‘박종철 정신’을 실천하는 사람들;

- 아버지 박정기, 형 박종부, 그리고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박종철의 의로운 죽음은 온 국민의 분노를 자아냈고, 군사정권의 폭압에 숨죽이고 있던 민중들의 가슴 속에 숨기고 있던 ‘민주주의를 반드시 쟁취하고야 말겠다는 열망과 의지’에 불을 지피게 된다. 여기에 전두환의 ‘4·13호헌조치’, 5월 18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박종철군고문·치사·은폐·조작사건’의 진상에 대한 폭로는 급속도로 타 들어가는 도화선이 되어 마침내 6월 민주항쟁으로 폭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두려움에 떨던 전두환 군사정권은 기만적인 ‘6·29선언’을 통해 위기를 회피해나가고자 한다. 이러한 전두환 군사정권의 시도는 민주세력의 분열과 맞물리면서 일단 성공하여 그해 12월에 치러진 대선에서 전두환의 동료였던 노태우의 당선으로 귀결되기도 한다.

6월 민주항쟁은 전두환 군사정권을 즉시 몰아내고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결정적 승리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 더 이상 폭압적인 군사정권이 지속될 수 없도록 하는 ‘우리 사회 민주화의 결정적 분수령’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박종철은 비록 전두환 군사정권의 고문 앞에 쓰러져 갔지만, 온 국민의 마음 속에 깊이 자리잡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박종철의 의로운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는데, 부산의 평범한 공무원이었던 아버지 박정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 박정기는 이후 서울로 거처를 옮겨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에 적극 참여하면서 ‘박종철 정신’을 앞장서서 실천하였다. 아버지 박정기가 연로하게 되자 이제는 형 박종부가 유가협의 청년회장을 맡아 ‘박종철 정신’을 실천해오고 있다. 친구와 지인들을 중심으로 해서는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를 매개로 ‘박종철 인권상’ 제정과 시상, ‘박종철 인권 장학사업’ 등을 추진하면서 ‘박종철 정신’을 실천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박종철 정신’은 25년이 지난 오늘에도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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