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 역할을 한 박종철 열사

작성자민들레87|작성시간11.08.24|조회수401 목록 댓글 0

□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 역할을 한 박종철 열사

 

 

 

대의와 신의를 위해 물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군사독재정권에 맞선 박종철

 

우리 사회 민주화의 결정적 분수령이 되었던 1987년의 6월 민주항쟁. 우리는 지역과 남녀노소를 불문한 전 국민적 참여를 통해 만들어 낸 6월 민주항쟁을 통해 비로소 26년간 지속되어 온 군사독재정권을 끝장내고 대통령 직선제 도입을 포함한 우리 사회 ‘민주화’의 결정적 돌파구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 6월 민주항쟁의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박종철(당시 23세, 서울대 언어학과 84학번)의 의로운 죽음이었다. ‘박종철군 고문·치사사건’으로 알려진 1987년 1월 14일의 이 사건은 당시 민주화추진위원회 사건으로 수배 중이던 한 선배의 소재를 파악하려던 경찰이 박종철을 불법연행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박종철은 사건이 터지기 며칠 전 위기에 처한 조직 재건을 추진 중이던 선배에게 몇몇 인물과의 연락업무를 부탁받은 상황이었다. 박종철은 ‘약속’과 ‘신의’를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겼다. ‘약속’은 단순히 한 선배와의 사적인 약속이 아니었으며,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에 맞서 우리 사회 민주주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민족민주운동의 대의를 지켜내겠다는 약속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종철 열사는 경찰의 물고문을 비롯한 모진 고문에도 선배의 소재를 밝히기를 거부했으며,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민주의 제단’에 바쳤던 것이다.

이러한 박종철 열사의 의로운 죽음은 끝내 6월 민주항쟁으로 활화산같이 폭발하여 우리 사회 민주화의 초석을 놓게 되었던 것이다. 민주주의의 대의를 위해, 민중이 주인되는 세상을 위해  ‘선배와의 약속’, ‘신의’를 자신의 목숨보다 소중히 여기는 것, 바로 이것이 ‘박종철 정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민중의 삶과 하나가 되고자 했던 박종철의 불꽃같은 삶

 

박종철은 1965년 4월 1일 부산에서 아버지 박정기 씨와 어머니 정차순 여사 사이에서 2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산토성초등학교, 영남제일중학교, 혜광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는 보통의 공부 잘하는 학생이 걷는 평범하고 모범적인 학생의 길을 걸었다. 하얀 얼굴과 재치있는 언행으로 주위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이런 박종철에게 자극을 준 사건은 1979년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에 조종을 울린 부마민중항쟁이었다. 열사가 중학교 3학년이던 그해 10월, 부산-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유신독재에 반대하며 들불처럼 일어난 부마항쟁의 열기는 어린 열사에게 막연하게나마 자기가 살아가야 할 삶의 방향에 대해 고민하도록 만든다. 열사의 형인 박종부도 박종철이 자신의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서강대 운동권이었던 형의 의연한 모습이나 형이 보던 서적은 박종철이 이후 대학교에 진학해서 학생운동에 참여하도록 하는데 큰 영향을 미친다.

박종철은 재수를 하여 1984년 서울대 언어학과에 입학한다. 박종철이 입학한 그 해는 당시 학생운동을 이완시키고자 전두환 군사정권이 기만적으로 추진한 ‘학원자율화조치’로 제한적이나마 열린 공간이 형성된 시기였다. 박종철은 치열한 고민과정을 거쳐 ‘대학문화연구회’라는 비공개써클에 가입하였고, 체계적인 학습과정을 통해 우리 사회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면서 민중지향적인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2학년 때는 과 대표를 맡았으며, 3학년에 올라가서는 과 학생회장을 맡아 언어학과와 인문대 학생자치활동에도 앞장서면서 학생운동의 선봉에 선다. 공장활동, 농촌활동 등을 통해 노동자-농민 등 민중들의 삶을 체화하고자 노력하였으며, 전두환 군사정권의 폭압에 직접 저항하는 가두투쟁, 민중들의 생존권 투쟁에 연대하는 민중연대투쟁 등에도 앞장선다. 그 결과 도시빈민들을 거리로 내모는 강제철거에 반대하는 사당동 가두시위로 구류 5일(1985. 5), 한국전쟁이후 최초의 노동자 정치파업이었던 구로동맹파업을 지원하기 위한 연대투쟁인 가리봉동 가두시위로 구류 3일(1985. 6)을 살기도 했으며, 전태일 열사의 혼이 담겨있는 청계피복노조 합법성쟁취대회와 그 시위에 참가했다가 구속(1986. 4)되기에 이른다. 박종철은 이런 시련을 겪으면서도 조금도 위축됨이 없이 자신을 추스렸으며, 그해 7월 감옥에서 나온 이후에도 민중지향성을 끊임없이 추구하면서 전두환 군사정권의 주구에 불과했던 폭력살인 경찰에 의해 죽임을 당할 때까지 동료들과 함께 학생운동에 헌신한다.

 

 

‘박종철 정신’을 실천하는 사람들;

- 아버지 박정기, 형 박종부, 그리고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박종철의 의로운 죽음은 온 국민의 분노를 자아냈고, 군사정권의 폭압에 숨죽이고 있던 민중들의 가슴 속에 숨기고 있던 ‘민주주의를 반드시 쟁취하고야 말겠다는 열망과 의지’에 불을 지피게 된다. 여기에 전두환의 ‘4·13호헌조치’, 5월 18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박종철군고문·치사·은폐·조작사건’의 진상에 대한 폭로는 급속도로 타 들어가는 도화선이 되어 마침내 6월 민주항쟁으로 폭발하게 되었던 것이다.

두려움에 떨던 전두환 군사정권은 기만적인 ‘6·29선언’을 통해 위기를 회피해나가고자 한다. 이러한 전두환 군사정권의 시도는 민주세력의 분열과 맞물리면서 일단 성공하여 그해 12월에 치러진 대선에서 전두환의 동료였던 노태우의 당선으로 귀결되기도 한다.

6월 민주항쟁은 전두환 군사정권을 즉시 몰아내고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결정적 승리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 더 이상 폭압적인 군사정권이 지속될 수 없도록 하는 ‘우리 사회 민주화의 결정적 분수령’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박종철은 비록 전두환 군사정권의 고문 앞에 쓰러져 갔지만, 온 국민의 마음 속에 깊이 자리잡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박종철의 의로운 죽음은 많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는데, 부산의 평범한 공무원이었던 아버지 박정기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 박정기는 이후 서울로 거처를 옮겨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에 적극 참여하면서 ‘박종철 정신’을 앞장서서 실천하였다. 아버지 박정기가 연로하게 되자 이제는 형 박종부가 유가협의 청년회장을 맡아 ‘박종철 정신’을 실천해오고 있다. 친구와 지인들을 중심으로 해서는 (사)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를 매개로 ‘박종철 인권상’ 제정과 시상, ‘박종철 인권 장학사업’ 등을 추진하면서 ‘박종철 정신’을 실천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다. ‘박종철 정신’은 24년이 지난 오늘에도 살아 숨 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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