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엄마 어릴적에

작성자juhee|작성시간09.06.15|조회수219 목록 댓글 7

 

*인형작가 이승은 작품* 엄마 어릴적에

 

 

 

 

 

 

 

 

 

 

친한 친구가 우리 집에서 조금 떨어진 아파트로 이사를 왔다

사소한 고민도 하며 나누던 사이였지만 결혼한 뒤에는 별로 만나지

못하다가 마침 이웃이 된 것이다.

 

반가운 마음에 곧바로 찾아 갔지만 몇번 오가는 동안 어쩐지 친구를

향한 마음이 예전 같지 않음을 느꼈다. 안정된 직장을 가진 남편, 경제적

여유,넓고 편리한 아파트, 세간을 고루 갖춘 깔끔한 살림 살이가 바보처럼

내 마음을 주눅 들게 했다.

 

대학 시간 강사인 남편 월급으로는 생활비 감당하기도 어려워

경제적으로 불안하고 집은 인형 작업 때문에 늘 어질러져 있는 나의

형편과 비교가 되었던 것이다.

 

초등학교에 갓 입학한 딸 아이에게 예쁜방을 꾸며 주는 대신 짐이

가득 쌓여 있는 작은방에 책상과 의자만 겨우 들어 놓았던 현실, 피아노

학원조차 보내줄 여유가 없는 것이 가슴 아팠다.

 

그러던 어느날 친구 집에 무심한체 하며 차를 마시다가 갑자기

울컥 설움이 받쳤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얼른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친구가

버스 정류장까지 따라 나오며 무슨일 있느냐고 걱정스레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얼버무리다가 다정하게 바라보는 친구의 눈길에,

사실은 늘 쪼들리며 살고 있는게 오늘따라 왠지 숨이 막히고 답답해진다고,

그때 까지 하지 않던 이야기를 하고 말았다.

 

자존심 때문에 그 동안 누구에게도 내색 않던 말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그대 한참 동안 나의 넋두리를 듣고 있던 친구가 이런말을 해주었다

 

'너 호강 하려고 그림 그리는 사람과 결혼했니?

 연애할 때는 그런생각 안하잖아..

 같이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 난 부러웠는데.."

 

친구의 그 말에 뒤통수를 맞는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맞다..호강 하겠다고 그림 그리는 사람과 결혼 한게 아니었는데, 덥석

결혼을 맘먹은 것은 남편의 순수함이 좋아서 였는데..

 

화실에 학생들이 여러명 있어도 레슨비를 받기는 커녕 오히려

아이들 라면값을 댔던 사람 자기 차비를 후배에게 몽땅 털어주고

터덜터덜 걸어오던 그 사람이 내가 사랑한 남자 아니었던가

조금 더 야무진 내가 내조를 잘해주면 남편이 마음 편히 좋은

그림을 그릴수 있었을 텐데..

 

겨우 친구의 넉넉한 살림살이와 비교하면서 이렇게 혼란 스러워하다니..

친구의 말은 엉클어졌던 내 마음을 단번에 풀어 주었다.

그리고 보면 남편은 처음 만났을 때와 변한것이 없었다.

 

주머니는 여전히 텅 비어 있지만 아파트 앞뜰에 심은 제비콩을

'재크의 콩나무 처럼 잘 키워서 동네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기도

했고, 무뚝뚝한 친정 식구들이 모이면 분위기를 즐겁게

이끌어가곤 했다.

그리고 언제부터인지 돈이 없어 쩔쩔맬 대면 신기하게도

 

"에잇, 안쓰는라고 힘들었다"

하며 잔뜩 생색을 내면서 두꺼운 책갈피 속에 숨겨둔

비상금을 꺼내 주기도 했는데..

 

그때 어리석은 가슴 앓이를 심하게 한뒤 다시는 경제적인

이유로 속상해한 적이 없다.

친구의 말처럼 호강 하려고 그림 그리는 사람과 결혼한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이승은 산문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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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리엥 | 작성시간 09.06.15 이승은 님은 정말 좋은 친구를 두셨네요.. 상처를 어루만져주며 달래주는 친구.... juhee님의 포스팅은 항상 감동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juhee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9.06.17 감사합니다 리엥님 ㅎㅎ
  • 작성자장통 | 작성시간 09.06.15 음...그런 깊은 뜻이...
  • 답댓글 작성자juhee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9.06.17 장통님두 어릴적 개구장이 추억이 많으실듯 해요
  • 작성자늘처음처럼 | 작성시간 09.06.17 그랬죠.. 그래두.. 가끔은 인간인지라..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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