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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낭송원고

윤동주 시인의 낭송 추천시

작성자한시진|작성시간14.11.25|조회수2,843 목록 댓글 0

윤동주 시인의 낭송 추천시

 

 

참회록


파란 녹이 낀 구리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王朝)의 유물(遺物)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懺悔)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만이십사년일개월(滿二十四年一個月)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 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懺悔錄)을 써야 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告白)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隕石)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달을 쏘다


번거롭던 사위(四圍)가 잠잠해지고 시계 소리가 또렷하나 보니 밤은
저윽이 깊을 대로 깊은 모양이다.
보던 책자를 책상머리에 밀어놓고 잠자리를 수습한 다음 잠옷을 걸치는 것이다.
'딱' 스위치 소리와 함께 전등을 끄고 창 녘의 침대에 드러누우니 이때까지 밖은
휘양찬 달밤이었던 것을 감각치 못하였었다.
이것도 밝은 전등의 혜택이었을까.
나의 누추한 방이 달빛에 잠겨 아름다운 그림이 된다는 것보다도
오히려 슬픈 선창이 되는 것이다.
창살이 이마로부터 콧마루, 입술, 이렇게 하얀 가슴에 여민 손등에까지 어른거려
나의 마음을 간지르는 것이다.
옆에 누운 분의 숨소리에 방은 무시무시해진다.
아이처럼 황황해지는 가슴에 눈을 치떠서 밖을 내다보니 가을 하늘은 역시 맑고
우거진 송림은 한 폭의 묵화다.
달빛은 솔가지에 솔가지에 쏟아져 바람인 양 솨-소리가 날 듯하다.
들리는 것은 시계 소리와 숨소리와 귀또리 울음뿐 벅쩍 고던 기숙사도 절간보다
더한층 고요한 것이 아니냐?
나는 깊은 사념에 잠기우기 한창이다.
딴은 사랑스런 아가씨를 사유(私有)할 수 있는 아름다운 상화(想華)도 좋고,
어린 적 미련을 두고 온 고향에의 향수도 좋거니와 그보다 손쉽게 표현 못 할 심각한
그 무엇이 있다.
바다를 건너온 H군의 편지 사연을 곰곰 생각할수록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감정이란
미묘한 것이다.
감상적인 그에게도 필연코 가을은 왔나 보다. 편지는 너무나 지나치지 않았던가.
그 중 한 토막, "군아, 나는 지금 울며울며 이 글을 쓴다.
이 밤도 달이 뜨고, 바람이 불고, 인간인 까닭에 가을이란 흙냄새도 안다.
정의 눈물, 따뜻한 예술학도였던 정의 눈물도 이 밤이 마지막이다.
또 마지막 켠으로 이런 구절이 있다.
"당신은 나를 영원히 쫓아버리는 것이 정직할 것이오.
" 나는 이 글의 뉘앙스를 해득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나는 그에게 아픈 소리 한 마디 한 일이 없고 서러운 글 한쪽 보낸 일이
없지 아니한가.
생각컨대 이 죄는 다만 가을에게 지워 보낼 수밖에 없다.
홍안서생으로 이런 단안을 내리는 것은 외람한 일이나 동무란 한낱 괴로운 존재요
우정이란 진정코 위태로운 잔에 떠놓은 물이다.
이 말을 반대할 자 누구랴. 그러나 지기 하나 얻기 힘든다 하거늘
알뜰한 동무 하나 잃어버린다는 것이 살을 베어내는 아픔이다.
나는 나를 정원에서 발견하고 창을 넘어 나왔다든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든가
왜 나왔느냐 하는 어리석은 생각에 두뇌를 괴롭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다만 귀뚜라미 울음에도 수줍어지는 코스모스 앞에 그윽이 서서 닥터 빌링스의
동상 그림자처럼 슬퍼지면 그만이다.
나는 이 마음을 아무에게나 전가시킬 심보는 없다.
옷깃은 민감이어서 달빛에도 싸늘히 추워지고 가을 이슬이란 선득선득하여서
설운 사나이의 눈물인 것이다.
발걸음은 몸뚱이를 옮겨 못 가에 세워줄 때 못 속에도 역시 가을이 있고, 삼경이 있고,
나무가 있고 달이 있다. 그 찰나 가을이 원망스럽고 달이 미워진다. 더듬어 돌을 찾아
달을 향하여 죽어라고 팔매질을 하였다.
통쾌! 달은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그러나 놀랐던 물결이 잦아들 때 오래잖아 달은 도로 살아난 것이 아니냐,
문득 하늘을 쳐다보니 얄미운 달은 머리 위에서 빈정대는 것을.
나는 곳곳한 나무가지를 고나 띠를 째서 줄을 매어 훌륭한 활을 만들었다.
그리고 좀 탄탄한 갈대로 화살을 삼아 무사의 마음을 먹고 달을 쏘다.

 

 

 

바람이 불어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 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해 본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꾸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

강물이 자꾸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위에 섰다.

 

 

 

편지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저 긴 세월이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긴 사연을 줄줄이 이어
진정 못 잊는다는 말을 말고
어쩌다 생각이 났노라고만 쓰자

잠 못 이루는 밤이면
울었다는 말을 말고
가다가 그리울 때도
잊었노라고만 쓰자

 


 

바다

 
실어다 뿌리는 바람조차 씨원타
솔 나무 가지마다 샛춤이
고개를 돌리어 뻐들어지고,
밀치고 밀치 운다.
이랑을 넘는 물결은
폭포처럼 피어 오른다.
해변에 아이들이 모인다.
찰찰 손을 씻고 구보로.
바다는 자꼬 섧어진다.
갈매기의 노래에
돌아다보고 돌아다 보고
돌아 가는 오늘의 바다여!

 

 

 

십자가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가 몇 가지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는지에 대해 물을 것입니다.
그때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대답하기 위해
나는 지금 많은 이들을
사랑해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나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얼른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나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냐고 물을 것입니다.
나는 그때 기쁘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꿔가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나는 자랑스럽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나는 내 마음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놓은
좋은 말과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 가겠습니다

 

 


초한대


내 방에 풍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의 제단이 무너지기 전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의 생명인 심지
백옥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라 버린다

그리고도 책상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촛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하듯이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나의 방에 풍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

 


 

쉽게 쓰여진 시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 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은 최초의 악수.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의 호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갑니다.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담아
길 위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 포기 없는 이 길을 걷는 것은
담 저 쪽에 내가 남아 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트루게네프의 언덕

 

나는 고개 길을 넘고 있었다. 그때 세 소년거지가 나를 지나쳤다.
첫째 아이는 잔등에 바구니를 둘러메고, 바구니 속에는 사이다 병,
간즈메통, 쇳조각, 헌 양말짝 등 폐물이 가득하였다.
둘째 아이도 그러하였다.셋째 아이도 그러하였다.
텁수룩한 머리털, 시커먼 얼굴에 눈물 고인 충혈된 눈,
색 잃어 푸르스럼한 입술, 너들너들한 남루, 찢겨진 맨발
아아 얼마나 무서운 가난이 이 어린 소년들을 삼키었느냐!
나는 측은한 마음이 움직이었다.나는 호주머니를 뒤지었다.
두툼한 지갑, 시계, 손수건 있을 것은 죄다 있었다.
그러나 무턱대고 이것들을 내줄 용기는 없었다.
손으로 만지작 만지작거릴 뿐이었다.다정스레 이야기나 하리라 하고
얘들아' 불러보았다.첫째 아이가 충혈된 눈으로 흘끔 돌아다볼 뿐이었다.
둘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셋째 아이도 그러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너는 상관없다는 듯이 자기네끼리 소근소근 이야기하면서 고개를 넘어갔다.
언덕 우에는 아무도 없었다. 짙어가는 황혼이 밀려들 뿐

 

 

 

자화상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 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 집니다
도로가 들여다 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아침


휙,휙,휙 소꼬리가 부드러운 채찍질로
어둠을 쫓아
캄,캄, 어둠이 깊다깊다 밝으오.

이제 이 동리의 아침이
풀살 오른 소 엉덩이처럼 푸르오.
이 동리 콩죽 먹은 사람들이
땀 물을 뿌려 이 여름을 길렀소.
잎,잎,풀잎 마다 땀방울이 맺혔소.

구김살 없는 이 아침을
심호흡하오, 또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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