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테(Lethe)의 강
허 열 웅
노년의 인생은 기억하려는 마음과 잊으려는 마음 사이를 건너가는 강이다. 황혼에 도착하고 보니 무엇을 잊으며 살아가는 것이 현명한 일인지 생각해본다. 젊었을 적에는 꿈과 사랑이 세상의 전부 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가면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조금씩 레테의 강물을 마시게 된다.
세계 1위 지성 이라는 이탈리아의 작가 움베르트 에코는 우리는 기억으로 이루어진 존재라고 정의 한다. 내 어린시절의 추억, 사랑했던 사람과의 기억, 내가 읽은 책과, 내가 들은 음악들 이 모든 것들이 합쳐 나라는 사람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기억을 잃는 다는 것은 곧 영혼을 잃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는 또한 동시에 망각 또한 신이 주신 선물임을 인정한다. 모든 것을 다 기억한다면 인간은 미쳐버릴 지도 모른다며 슬픈 일, 괴로운 일, 수치스런 일들은 잊혀져야 우리는 살아 갈 힘을 얻는다고 했다.
레테(Lethe)의 강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저승의 강 가운데 하나이다. 죽은 자의 영혼이 이 강물을 마시면 생전의 기억과 슬픔, 기쁨, 고통을 모두 잊게 된다고 전해진다. 고대 사람들은 죽음 이후 새로운 세계로 가기 위해서는 이전 삶의 기억을 잊어야 한다고 생각 했다
고대인들은 기억이 인간의 고통이라고 생각, 사랑의 상처, 전쟁의 공포, 삶의 후회와 미련, 죽은 영혼이 이런 기억을 계속 안고 산다면 결코 평안해질 수 없다고 보았다. 그래서 레테의 강물은 일 종의 영혼의 쉼 이었다. 낭만주의 시인들은 레테를 고통을 잊고 싶은 인간의 욕망으로 자주 표현했다.
젊은 날의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기억하고 살았다. 타인에게 받았던 작은 상처, 내가 저지른 부끄러운 실수, 채우지 못한 욕망과 질투, 그리고 잃어버린 것들에 대한 집착까지, 그 무거운 기억의 짐들을 짊어지고 달리느라 마음은 늘 과부하였다.
나이가 들어서도 사람은 점점 더 많은 기억 속에 산다. 그리움도 많아지고 후회도 깊어진다. 그래서 어떤 날은 마음속에도 레테의 강 하나 흐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완전한 망각만이 구원은 아닐지 모른다. 어쩌면 인간은 레테의 강을 완전히 건너지 못하기에 시를 쓰고, 음악을 듣고 지난 계절을 그리워하는지도 모른다.
젊은 날에는 왜 그런 강이 필요한지 잘 이해가 되지 못했다. 살다보면 잊지 못해 괴로운 일들이 있다.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후회되는 밤, 끝내 화해하지 못한 사람에 대한 미안함, 다 이르지 못한 꿈의 그림자. 노년의 외로움은 사실 혼자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너무 많은 기억과 함께 살아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인간은 기억으로 이루어진 존재다. 어머니가 끓여주던 된장국 냄새, 젊은 날 빗속을 함께 걷던 사람의 기억, 아이들이 재롱부리던 순간, 그 기억들까지 모두 지워진다면 과연 나는 나일 수 있을까.
기억은 늙지 않고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더 선명해지기도 한다. 그래서 노년의 마음은 때로 거대한 기억의 방처럼 느껴진다. 사람은 하루에 5만 가지 생각을 하며 산다는 말이 있다. 노년이 되면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그러다 보면 별별 생각이 떠오른다. 돌아가신 부모님에게 좀 더 잘해드리지 못한 불효에 대한 죄책감 등이다.
나는 딸 세 명을 줄줄이 낳은 후 태어났다. 그래서 누님 세 분으로부터 늦게까지 많은 사랑과 보살핌을 받았다. 그예 비해 조그만 선물이나 고마웠다는 인사조차 제대로 못 한 채 장례식장에서 눈물만 흘린 기억 때문에 마음이 아퍼 올 때가 가끔 있다.
후회란 놈은 부고가 사람이 죽고 난 후 도착하듯이 어떻게 되돌릴 수도 없고 회복이 불가능할 때만 찾아온다. 그래서 노년에 필요한 것은 모든 것을 잊는 레테의 강이 아니라 아픔만 조용히 흘려보내는 작은 강이 필요한지 모른다. 미움은 흘려보내고 후회는 조금 덜어내고, 이미 지나간 일들을 저녁 강물처럼 고요히 바라보는 마음이 되어야 한다,
노년의 평안은 기억을 없애는 데만 있지 않다. 기억과 화해하는 데 있다. 산다는 것은 결국 잊어가는 일과 기억하는 일 사이를 건너는 일인지도 모른다. 어느 황혼 무렵 창밖의 바람소리를 들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인생의 마지막에는 조용히 마음을 씻어주는 자기만의 레테의 강 하나쯤 품고 있는 사람이 가장 평안한 사람일 것 이라고...
물론 모든 것을 잊어버리는 완전한 망각은 두렵고 슬픈일 일수도 있다. 하지만 노년의 삶에서 찾아오는 적당한 잊힘은, 영혼을 가볍게 만들어주는 고마운 손길이다. 무거운 짐을 많이 내려놓아야 마지막 강을 건널 때 배가 가라앉지 않는 법이니까
기억하는 것이 인간의 의무라면 잊어버리는 것은 신의 은총인지도 모른다. 노년의 삶에서 망각은 깊은 평온을 가져다준다. 억울했던 기억이 흐릿해지니 미워했던 사람을 향한 서운함이 옅어지고, 내가 저지른 과오에 대한 집착이 옅어지니 비로소 스스로를 용서할 수 있게 된다.
날카롭게 서 있던 젊은 날의 목소리들이 레테의 강물에 부딪치고 깎이면서 마침내 둥굴둥글한 조약돌이 되어가는 것이다. 모든 걸 기억하는 영혼은 평화로울 수가 없다. 상처의 디테일을 다 기억하고 있다면 노년의 밤은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적당한 망각은 마음의 방을 청소해준다.
에코는 기억은 단순한 암기력이 아니라 그것은 내 삶의 의미를 엮어가는 과정이라고 믿었다. 그는 노년의 삶을 백과사전을 만드는 편집자에 비유했다. 젊었을 때에는 무작정 정보를 수집했다면 나이들어서는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버려야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고 믿었다.
오늘도 나는 기억의 저편으로 무언가를 조금씩 흘려보낸다. 서운했던 일도, 화려했던 날의 미련도 레테의 강물에 실어 보낸다. 그리고 비워진 마음의 빈터에 오늘 나를 찾아온 따스한 햇볕과 새들의 지저귐을 조용히 채워 넣는다.
기억을 씻어내고 온전히 가벼워진 영혼으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는 것, 그것이 바로 노년이라는 인생의 황혼기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가장 고매하고 아름다운 풍경이다.
노년의 하루는 레테의 강변을 조용히 거니는 산책과도 같다. 지나온 발자국은 밀물에 지워지겠지만 내 마음은 한없이 평온하다. 잡다한 기억의 소음이 사라진 그 고요한 강가에서 우리는 비로소 인생이라는 무대를 아름답게 마무리할 진짜 ‘나’와 마주하게 된다. 비워낼 수 있어서 참 다행인 노년의 오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