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볕
유현숙
볕이 참 좋다, 내일 뭐 해?
들도 산도 붉다
올래?
자전거 타이어에 공기 빵빵 채웠어
해거름 둑길 끝까지 달리자
산촌 가을은 짧아
산집은 쉬 어두워지고 추워
저녁엔 장작 패서
난로에 불 지피며 불멍 어때?
건너와
입석이라도 타고
새벽 숲이 가장 숲다운 것 알지?
빨간 장화 신고
노란 꽃 더미 건너
여뀌도 고마리도 이슬 젖은 들길 걷자
좋아하는 커피 내려놓을게
꼭 와.
겨울산
유현숙
산어귀에 까마귀 떼 하늘 검게 웁니다
산새들은 볕 든 풀밭으로 낮게 들고
나뭇가지는 빠른 붓질에 볼긋볼긋 농밀합니다
그늘새김한 계곡으로 방금 대한大寒이 건너가고
쓸어 모은 삭풍에
기다리던 발자국들 지워집니다
산모퉁이 저기
수묵의 여백 위를 건너오는 그대
비로소 완벽한 서경입니다
한 권 서책을 두루마리로 펼쳐놓은
겨울산은 겨울시입니다
푸른 꽃*
유현숙
사월에 P를 만났다
작약꽃 터진 꽃그늘에서 흘러내린 흰 머리칼을
쓸어 올리고 있었다
오래 못 보며 지내왔던 무궁무궁한 사람
늦은 점심으로 쌀국수 먹으며
면발 몇 오라기 남은 국물마저 통째로 들고 마셨다
들고 마신 플라스틱 면기에는
그가 살고
내가 살아온
국숫발 같은 이야기가 가닥가닥 화해했다
국립중앙박물관 겨울 못 뜰의 푸른 꽃
오가며 자주 지나쳤던 그 꽃
산동네 지하방에서 만났던 곰팡이꽃
벽을 기어오르던 푸른 절망과 공생하던 이는
벼린 칼 하나와
바람의 무게를 잴 천칭을 쥐고
마틸테를 찾아 떠난 하인리히처럼
강호를 떠돈다
말言의 고삐를 쥐고
낭만의 나막신을 신고
안개 숲을 지나 지금은 어디까지 걷고 있을까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죽음의 섬 너머에 닿아
눈먼 시간들 그늘만 남기고
유폐된 신화 한 책 펼쳐 놓았을까
작약꽃 터진 꽃그늘에서
사월에 P를 만났다
*노발리스
저녁 소리
유현숙
능선을 태우고
잠든 물바닥을 반쯤 베어 무는 소리
깊은숨 몰아쉬며
뒷산 어깨로 해 떨어지는 소리
화약 터지듯 번진 놀빛이 지상에 남기는
애절한 장송곡 한 소리
풀들이 울며
어둠이 짙은 쪽으로 몸 기우는 소리
그림자 남기고 떠난 기적汽笛이
바지랑대 끝에 매달려 흔들리는 소리
일별도 없이 어스름 눈길이
말 삼키는 소리
짧은 처마 아래서 녹슨 별을 닦으며
놋숟갈로 제 속을 긁는 소리
그 소리들에 귀 털며 발돋움하는
내 숨소리.
-시집 『내일 뭐 해』 2026. 5
유현숙 / 경남 거창 출생. 2003년 『문학 선』 신인상으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서해와 동침하다』『외치는 혀』『몹시』『내일 뭐 해』eBook『우짜꼬!』『고독한 여름』『숲, 스케치 』등. 2017년 미네르바 작품상 수상. 문예바다 소설 신인상을 수상하여 지금은 시와 소설을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