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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 서거 21주기 추도사

작성자운영자|작성시간26.06.11|조회수44 목록 댓글 0

박정희 대통령 서거 21주기 추도사 柳陽洙 前 교통부 장관 2000. 12. 1

엄격ㆍ소박ㆍ부끄럼타는그러나 강철 같던 당신의 모습이 그립습니다.

국가다운 모습 갖추게 한 당신 : 朴正熙 대통령 각하, 벌써 그날로부터 21년이 흘렀습니다. 강산이 두 번 바뀌었지만 그날의 충격은 생생하기만 합니다. 때 아닌 밤중에 外務部 李廷彬(이정빈) 阿中東局長이 駐사우디 아라비아 大使이던 저에게 목메인 소리로 알려온 悲報(비보), 그것은 靑天霹靂(청천벽력)이나 茫然自失(망연자실)이란 말이 한가하게 들릴 소식이었습니다. 그해 말로 예정된 각하의 사우디 방문을 준비하고 있던 제가 맨 먼저 해야 했던 일은 대사관과 사우디 전역에 산재해 있던 건설현장에 빈소를 차리는 일이었습니다. 통곡하던 중동건설 근로자들 그리고 각하의 불의의 서거를 아쉬워하던 사우디 王族들과 각계 지도자들의 哀悼(애도)하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가족들과 헤어져 제2의 군대생활과도 같은 고생을 그 뜨거운 사막에서 치르면서도 祖國의 發展相(발전상)과 가족의 행복을 전해 듣고 위안을 삼던 근로자들은 家長을 잃은 것처럼 슬퍼했습니다. 그랬습니다. 그때 우리는 祖國 近代化(근대화)의 旗手를 잃었던 것입니다. 朴正熙 대통령 각하, 당신께서는 18년간 우리 민족의 先頭에 서서 조국 근대화와 民族中興(민족중흥)의 깃발을 흔들었던 분입니다. 우리는 각하를 믿고 그 깃발 아래 모여 힘을 합쳤습니다. 그 결과 대한민국은 戰亂의 폐허 속에서 불사조처럼 다시 일어났고, 세계가 부러워하는 全方位的(전방위적)인 발전을 이루어냈습니다. 민족의 역사는 비록 수천년에 걸치지만 近代國民國家를 건설해간 시기는 수십년에 불과한 세계사의 遲刻生(지각생)이 바로 그때 한국의 참모습이었습니다. 그 한국이 각하의 영도하에 비로소 국가다운 모습을 갖추었고 이제는 그 기분 위에서 새로운 차원의 남북관계 정립이 시도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계기로 한반도를 위요한 국제정세는 예측을 불허할 정도로 급변해가고 있습니다.

 

각하의 통찰력과 영도력이 절실한 지금 : 그러나, 지금 한국의 상황은 결코 낙관을 허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요사이 남북관계의 급진전에 따르는 국민들의 남북관계에 대한 상황인식과 판단에 일대 혼란이 일고 있으며 일부 세력들에 의한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정통성에 대한 부정과 貶下(폄하),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남북관계를 주도하고 있는 지도층에 대한 신뢰의 문제점들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각하의 富國强兵(부국강병) 정책과 自主國防(자주국방) 건설에 힘입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북한을 크게 압도하고 있는 대한민국이 어찌하여 1인 수령지배 체제하의 북한에 대해서 이토록 무기력하고 자신감을 갖지 못하고 있는지? 걱정하면서 우리는 그 어느때 보다도 각하와 같은 원대한 洞察力(통찰력)과 국력을 하나로 묶는 탁월한 領導力(영도력)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한국 현대사의 고비고비에서 武將對峙狀態에(무장대치상태) 놓인 국가가 지도층의 오판과 무능이 방치되고, 미국이 自國(자국)만의 이익을 추구할 때 미국에 안보를 의존한 주권국가의 存立(존립)이 어려워지는 사례를 각하와 함께 일전에서 지켜보면서 苦惱(고뇌)했던 경험을 갖고 있습니다. 48년 8월 제가 육군사관학교 7기 특별반으로 입교하였을 때 각하는 저의 자애로운 중대장이셨습니다. 각하께서 驅步(구보) 훈련중 사망한 생도를 찾아 나설 때 동행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후 각하께서 민간인 신분이 되었을 때 저는 陸本 정보국 전투정보과장으로서 각하와 함께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예고한 1949년도 종합 연말 적정 판단서를 만든 기억이 새롭습니다. 이 판단서에서 저희들은 남북간 군사력의 심각한 불균형을 지적하고 북한은 50년 봄에 對南공격 준비를 완료할 것이며, 적기에 압도적 병력으로 38도선을 돌파하여 全面攻勢(전면공세)로 대한민국을 침범할 것이라고 보고했던 것입니다. 당시 미국측은 우리의 이런 경보를 애써 외면했고, 李承晩 대통령은 정치적 안정에만 주력하고 있었으며, 우리 軍 수뇌부는 북한군의 남침 동향에 대한 저희들의 거듭된 경고를 인정하면서도 「설마」하는 무책임하고 안이한 생각에서 실질적인 대책을 세우지 않은 채 새벽의 奇襲(기습)을 허용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50년 6월25일 새벽 각하께서는 1년 전에 돌아가신 모친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고향에 내려가 계셨고 저는 6사단 정보참모로 전근하기 위하여 原州(원주)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싣고 있었습니다. 부슬비 내리는 서울驛에 전송나온 李永根(이영근) 중위를 비롯한 과 장교들에게 『누가 뭐래도 사태가 심상치 않으니 바짝 정신차려 근무해야 한다』고 당부했지만 바로 그 시간 38선 全 전선에서 적의 砲火(포화)가 炸裂(작렬)하고 있었습니다.『언제까지나 安保를 미국에 의지할 수 없다』그리고 지금도 또렷하게 저의 뇌리에 남아 있는 장면이 있습니다. 72년 10월 당시 越南 駐在 大使이던 저는 월남 정세보고를 위하여 귀국해 있었고, 그 달 23일 오전 대통령 각하께 보고를 드렸습니다. 각하께서는 파리에서 미국과 越盟(월맹)이 합의했다는 월남휴전협정안에 대해 논평과 우려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휴전안이 미군을 비롯한 自由陣營(자유진영) 군대의 철수는 明記(명기)하면서도 월남으로 침투한 14만여 명의 越盟正規軍(월맹 정규군)의 철수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 공산측과 월남정부의 연립정권 구성이 갖는 함정, 그리고 휴전체제에 대한 국제감시의 불명확성 등을 일일이 지적하시면서『이런 식으로 휴전이 되면 월남은 1년도 지탱하지 못하고 공산화되고 말 것이다』고 예언하셨습니다. 각하께서는 주먹을 불끈 쥐시면서 『언제까지나 우리의 안보를 미국에 의존할 수는 없다』『우리가 월남과 같은 처지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하루빨리 輸出産業(수출산업)과 重化學工業(중화학공업)을 발전시켜 국력을 강화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낭비를 최소화하고 효율을 극대화하는 자원 총동원체제를 갖추어야 한다』 『이 길만이 힘의 논리만을 믿는 공산주의자들의 침략 야욕을 저지하는 방법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有備無患(유비무환)이란 警句(경구)와 自助精神(자조정신), 自立經濟(자립경제), 自主國防(자주국방)이란 국가전략이 각하의 信念體系(신념체계)의 骨幹(골간)을 이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 각하의 눈빛은 빛나고 있었습니다. 재떨이에는 각하가 피우신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 갔습니다. 각하는 귀임하면 티우 대통령에게 당신의 見解(견해)를 꼭 전하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저는 티우 대통령을 방문하여 각하의 말씀을 전했고, 티우 대통령도 전적으로 동의하였습니다. 그러나 티우 대통령의 처절하고도 끈질긴 반발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어설픈 휴전협정을 월남측에 강요했고 티우 대통령도 끝까지 버티지 못했습니다. 저는 75년 5월13일 釜山(부산) 부두에 나가 패망한 월남으로부터 철수해 오는 우리 해군의 8·15艦(함)을 맞았습니다. 저는 그 순간 키신저를 생각했습니다. 南월남 정부 머리 너머로 北월맹과 교섭하면서 월남휴전 협상을 주도하고 그 성사의 공으로 노벨평화상까지 받았던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것이 궁금했던 것입니다. 동시에 저는 朴대통령의 말씀을 되씹어 보았습니다. 우리의 안보를 언제까지나 미국에 의존할 수는 없으며 또 그래서도 안 된다는 말씀이 그 순간처럼 실감났던 적은 없었습니다.

 

세계화를 실천으로 추진 : 朴正熙 대통령 각하, 오늘날 우리의 내외상황이 월남 패망 당시의 그것과 크게 다름에도 불구하고 우리 社會 一角에서는 한국의 越南化(월남화)를 우려하는 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저로서도 그 우려가 전혀 근거 없는 것이라고 단정하기 곤란한 상황이 지금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보고를 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 국가의 물질적인 풍요가 곧, 국력의 전부는 아니며 그것이 건전한 국민윤리와 지도층의 높은 수준의 도덕성과 신념에 의해 뒷받침되지 않을 때는 오히려 그 물질적인 요소가 공산주의자들의 침투공작과 분열공작에 온상으로 제공된다는 점, 언론과 지식인들이 공산주의자들의 선전선동에 놀아나면 월맹과 같은 침략자가 애국 세력으로 둔갑하고 자유수호 세력은 反통일 세력으로 매도된다는 점, 권력층을 비롯하여 사회 각계각층에 깊숙이 침투한 수많은 공산프락치들의 위장 전술과 내부 교란작전 등 소위 공산주의자들의 통일 전선 전략에 의하여 敗亡(패망)하고만 월남의 교훈은 바로 오늘날 우리들에 대한 경고로서 깊이 되새겨 봐야 할 것입니다. 요사이 국내 일부세력은 朴正熙 대통령 각하의 위대한 결단, 그리고 국군과 국민과 야당의 전폭적인 호응하에 이루어진 월남파병의 의미까지도 傭兵(용병) 정도로 훼손시키려는 선동을 일삼고 있습니다. 월남파병은 바로 한국의 安保를 강화하려는 國益追求(국익추구)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졌으며, 월남 파병에 따른 경제적 이득과 경험은 조국의 경제발전과 해외진출에의 原動力이 되었다는 점을 그 당시 어느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지만 세월이 흐르다가 보니까 저희들의 후배 교육 미숙으로 각하의 英斷(영단)에 누를 끼쳐 드리지 않았나 송구스럽기만 합니다. 현재의 베트남 정부 지도층은 경제개혁을 추진하면서 부닥치는 문제점을 해결하는 지침으로서 각하의 성공적인 近代化 戰略을 참고하고 있다고 합니다. 티우의 월남 정부는 공산주의자들에게 굴복했지만 각하의 성공적인 근대화 모델은 지금 하노이를 정복하고 있습니다. 각하, 저는 월남대사를 거쳐 駐사우디 대사로서 1970년대 후반을 보내면서 각하의 영도하에 한국인의 활동공간이 월남에서 中東, 중동에서 세계로 확장되어 가는 웅대한 민족의 大드라마를 목격할 수 있었습니다. 각하의 이런 대외 지향적 국가전략은 석유파동을 극복하는 정도가 아니라 이를 轉禍爲福(전화위복)의 계기로 삼아 한국을 선진국 진입궤도에 올려 놓았던 것입니다. 각하는 이미 세계화 구호가 나오기 30여년 전부터 구호가 아닌 실천으로서 세계화 전략을 추진하신 선각자이셨습니다. 수출입국정책, 과감한 외자도입, 월남파병, 중동건설시장 진출 등은 半島(반도)에 갇혀 살았던 우리 민족에게 그 특유의 野性(야성)을 폭발시킬 수 있는 무대를 제공하였습니다. 조국을 떠나야 위대해진다는 한국인들은 조국을 든든한 發進基地(발진기지) 및 보급기지로 삼고 사막으로, 세계 5대양으로, 북극으로, 남극으로, 그리고 선진국 시장의 한복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한 한국인들이 조국을 향하여 뒤돌아볼 때, 거기엔 항상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었고 조국 근대화의 旗手가 미소를 머금은 채 버티고 서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야성의 한국인들은 안심하고 해외를 개척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인생의 보람이 뭣이었는가라고 물으면, 『조국의 富强(부강)과 安泰(안태)와 榮光(영광)을 위하여 낯선 異域(이역)땅에서 뼈가 부서지도록 일하고 일하고, 또 일했다고 자랑할 것입니다』

 

조국근대화는 未完 : 지금도 각하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저희들은 옷깃을 여미면서 조국을 위해 할일은 아직 남아 있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대통령 각하께서 자신과 陸英修 여사의 모든 것을 바친 그 제단에서 이루어진 조국의 번영은 통일을 어떻게 마무리짓는가에 의해서 최종적으로 역사 속에서 정확하게 자리매김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각하의 조국근대화는 未完(미완)의 업적이며, 그 完結(완결)은 우리와 후손의, 책임과 의무일 것입니다. 민족사의 중대 고비에 처한 지금 아직도 이런 걱정과 하소연을 각하의 영전에 드리게 된 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각하가 영도하신 조국 근대화의 과정에서 한국 사회에서는 건강하고 거대한 시민사회가 등장하였습니다. 이들은 결코 공산주의자들과 그 추종자들의 선동과 위선에 속지 않을 것입니다. 이들은 그런 도전을 물리치고 삼키면서 역사를 전진시켜 나갈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때까지 조국의 山河를 굽어살피시면서 저희들을 이끌어 주십시오. 朴대통령 각하, 엄격하시면서도 소박하시고 때론 부끄럼타시면서도 강철 같으시던 그 모습이 날이 갈수록 그리워집니다. 모시던 사람들의 불찰과 시대상황으로 해서 각하의 그런 인간적인 면모가 국민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던 점이 한스럽기도 합니다. 각하께서 그 마지막 자리에서 가슴으로 총탄을 받으시고도『난 괜찮아』라고 말씀하신 그 超人的(초인적) 모습이야 말로「人間 박정희」의 평소의 자세 그대로임을 저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두서없는 저의 말들을 접을 때입니다. 자유와 정의의 기치 하에 조국이 통일된 그날 자랑스러운 보고회를 다시 이곳에서 올릴 것을 기약하면서 그때까지 陸英修 여사와 함께 잘 계십시오. 삼가 명복을 빕니다. 2000. 10. 26. 柳陽洙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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