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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교만과 용연서원

작성자마리아|작성시간26.04.10|조회수23 목록 댓글 0

국립중앙도서관이 증명하는
'800년 역사속 용연서원과 홍교만'
통문으로 본 포천 유림의 정신


경기 포천의 대표 유학 공간인 용연서원을 지키기 위한 노력과 그 중심에 선 인물, 홍교만(洪敎萬)의 행적이 한 장의 통문을 통해 다시 주목받고 있다.


홍교만은 조선 후기 포천 유림을 대표하던 인물로, 학문과 신앙, 그리고 공동체를 향한 책임을 함께 실천한 인물이다.

포천에 위치한 용연서원은 이덕형과 조경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1691년 남인계 유학자들이 세운 서원이다. 이후 수백 년 동안 지역 유림의 교육과 정신적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최근 확인된 통문에 따르면, 용연서원은 이미 “창건된 지 800여 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르며 여러 차례 기울고 무너질 우려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에 따라 지역 선비들이 힘을 모아 보수를 이어왔으나, 당시에도 원우와 강당, 재실이 점차 훼손되고 있어 대대적인 중수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 통문은 1774년(영조 50년, 갑오년)에 작성된 것으로, 홍교만을 비롯해 조영우, 이명규, 유형기, 이의신, 정식, 윤필양 등 여러 유림이 연명하여 발송한 문서다. 특히 홍교만의 이름이 첫머리에 기록된 점은 그가 당시 포천 유림 사회에서 중심적 역할을 했음을 보여준다.

통문에는 “경외의 뜻있는 이들에게 사정을 널리 알리니, 힘이 닿는 대로 재물을 보태어 서원 보존에 힘써 달라”는 간곡한 요청이 담겨 있다. 이는 단순한 건물 보수가 아닌, 학문과 도덕의 전통을 지키려는 공동체적 의지의 표현으로 해석된다.

홍교만은 이후 1777년 진사시에 합격하며 학문적 기반을 다졌고, 고종사촌인 권철신과의 교류를 통해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된다. 아들 홍인이 먼저 신앙을 받아들였고, 부자 모두 세례를 받아 각각 ‘프란치스코 하비에르’와 ‘레오’라는 이름으로 신앙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이들의 선택은 곧 박해로
이어졌다. 신해박해 당시 정약종의 서적을 숨겨주다 발각된 홍교만은 아들 홍인과 함께 체포되어 한성으로 압송되었다. 이후 홍교만은 서소문 밖에서 순교하였고, 아들 홍인 레오는 포천으로 이송되어 포천천 일대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진다.


한 장의 통문은 단순한 행정 문서를 넘어, 당시 지역 유림의 책임감과 공동체 정신, 그리고 한 인물의 삶의 방향을 보여주는 역사적 기록이다.

오늘날 용연서원과 포천천은 이러한 이야기를 간직한 공간으로, 포천의 정신적 뿌리를 되새기게 하는 중요한 문화유산으로 자리하고 있다.


사도요한 김승한 문화역사 해설사가
자료 제공하고, 이상천 (전)용연서원
장이 기획하고, 김나경 작가가 편집한 <홍교만 & 용연서원> 소책자를 수기로 제작해 용연서원에 통문과 함께 비치 했다. 크리스찬과 유림의 800년이란 인연이 역사속에 숨쉬고 있음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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