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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천노씨 자료실

우리의 盧氏 ! 또 다른 魯氏, 路氏 ....

작성자노학용|작성시간02.05.01|조회수201 목록 댓글 0
盧(노)氏

노(盧)씨의 도시조는 노수(盧穗)라고 한다. 그는 당나라 한림학사로 있다가 아들 아홉을 데리고 뱃길로 신라에 왔다고 한다. 그의 아들 9형제가 모두 신라에 벼슬을 하여 이들이 곧 9관(九貫) 노(盧)씨가 되었다는 것이다.

노씨는 고려말 이후부터 정계에 두각을 나타냈는데 이조에서는 정승 3명, 대제학 1명, 청백리 2명이 나왔다. 고려 때 가장 이름이 높았던 사람은 장연(長淵) 노씨의 중시조인 노단(盧旦)이다. 그는 문종, 선조 때의 학자로 벼슬이 상서좌복야에 이르렀다. 두 차례나 과거의 고시관을 지내면서 많은 인재를 등용시켰고, 스스로 제자를 가르치기도 했다.

광주(광산) 노씨


광산노씨는 도시조 수의 맏아들 해(垓)가 신라조에 벼슬하여 공을세우고 광산백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광주로 하였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조에 공을 세우고 광산군(光山君)에 봉해진 만(蔓)을 1세조로 하는 계통과, 조선 개국원종공신으로 검교 우의정을 지낸 경평공(敬平公) 숭(嵩)의 묘지를근거로 하여 고려조에 감문위 대호군을 지낸 서(恕)를 1세조로 하는 두 계통이 있는데 모두 상계가 실전되어 일조지손이면서도 계촌이불가능하다.

광주노씨는 9관 노씨 중에서도 가장 번성하여 많은 인물을 배출했는데,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을 낳아 더욱 유명하다. 그는 별제 홍(鴻)의 아들로 중종 때 문과에 장원, 호당에 들고 문형을 맡았으며, 선조조에 영의정에 오르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그 외에 이황의 문인 노수(盧遂), 조식(曺植)의 문인 노흠(盧欽) 등도 유명하다

곡산 노씨


곡산노씨의 시조는 도시조 수의 아홉째아들 노원(盧垣)이다. 그는 신라조에 벼슬하여 공을 세우고 곡산백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곡산으로 하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충숙왕 때 영동정 판도판서를 지내고 문경으로 증시된 노조(盧兆)를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곡산노씨는 관적지인 곡산을 중심으로 하여 주로 황해도와 경기도에서 세거해 왔다. 8세 문정공(文靖公) 노경린(盧慶麟)은 이이(李珥)의 장인으로, 성주목사로 있으면서 서원을 세워 유학을 정리하였고, 숙천부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어 가자까지 되었는데, 그 후손들이 해주에 터를 굳혔고, 동생 노경룡(盧慶龍)의 후손들은 용진에서 살았다. 그 밖에 평산ㆍ김포 등지에도 일부 후손들이 살았다.

교하 노씨

교하노씨는 도시조 수의 둘째아들 오가 신라조에서 교하백에 봉해 졌기 때문에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교하로 하였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초에 태조를 도와 개국공신으로 태자태사를 지내고 선성부원군에 봉해진 노강필을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1세조 노강필(盧康弼)은 본래 기계(杞溪) 사람으로 본관이 장산(章山:경산의 옛이름)이었는데 선성부원군에 봉해진 뒤에 교하로 이적하였다.

교하노씨는 10세 책의 아들대에서 4파로 갈리어 크게 번성하기 시작한다. 큰아들 제가 시중을 지내고 서원군에 봉해져서 서원군파로, 둘째 진이 공민왕조에 창성군파로, 셋째 균(鈞)이 경원군에 봉해져서 경원군파로, 넷째 영(渶)이 신양군에 봉해져서 신양군파로 갈린다. 그중 창성군파에서 인물이 많이 나와 세종 때 우의정을 지낸 공숙공(恭肅公) 한은 진의 손자이고 연산군조에 영의정으로 무오사화 때 많은 사림을 구출한 문광공(文匡公) 사신(思愼)은 한의 손자이다.

만경 노씨


만경노씨는 시조 수의 여덟째아들 판(坂)이 신라조에 요동양척(遼東攘斥)의 공이 있어 평양백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평양으로 하였는데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 명종 때 평장사를 지내고 만경군(萬頃君)에 봉해진 노극청(盧克淸)을 1세조로 하고 본관도 1세조의 사적지인 만경으로 개관하였다.

그런데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 등 문헌에는 조선 태종 때 문과에 급제, 홍주목사를 지낸 노혁이 시조로 되어 있으나 노혁(盧革)은 극청의 6대손이고, 또 <국조방목(國朝榜目)>에 본관이 만경으로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노혁이 최초의문과 급제자로 만경노씨를 세상에 드러냄으로써 그가 시조라고 잘못 기재된 것으로 짐작된다.

이 집안은 임진왜란(壬辰倭亂)등 국난 때 의사들이 많이 나와 조국에 공헌하였다. 수암(守庵) 노응환(盧應晥)은 조헌(趙憲)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스승을 따라 창의, 금산 싸움에서 스승과 함께 순절하였다. 그의 아우 응탁(應晫)ㆍ응호(應晧) 역시 의병으로 활약하였고, 응완의 아들 관류당(觀流堂) 숙은 이괄(李适)의 난에 인조가 공주로 몽진할 때 많은 군량을 제공하여 공을 세웠다.

신창 노씨


신창노씨(新昌盧氏)는 교하노씨에서 분적한 계통이다. 1세조 노지유(盧智儒)는 교하노씨 1세조 노강필(盧康弼)의 손자 영순(永醇)의 둘째 아들로 고려 공민왕 때 검교장군으로 훈공이 있어 판도판서에 오르고 신창군(新昌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분적, 그를 1세조로 하고 본관을 신창으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이 집안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노후(老後)와 노순(盧錞)이 있다.

장연 노씨


장연노씨(長淵盧氏)의 시조 노구(盧坵)는 도시조 수(穗)의 아들이다. 수는 원래 당나라 한림학사로 자국의 난을 피해 아들 9형제를 데리고 우리나라에 와서 정착하였는데, 아들 9형제가 양척(攘斥)의 공이 있어 국가에서 봉지(封地)할 때, 구(坵)는 장연백(長淵伯)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였고, 본관은 노안필(盧安弼)이 고려조에서 문하시중으로 거란족을 물리치고 연강군(淵康君)에 봉해짐으로써 실질적으로는 이때부터 장연에 관적하였다고 한다.

안강(경주) 노씨


안강노씨(安康盧氏)는 도시조 수(穗)의 여섯째아들 노곤(盧坤)이 고려조에 벼슬하여 공을 세우고 안강백(安康伯)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안강으로 하였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곤의 후손 광한(光漢)의 아들로 첨정을 지낸 노종선(盧從善)을 첨정공파 1세조로, 목사를 지낸 노희선(盧禧善)을 목사공파 1세조로 하여 각각 세계를 잇고 있다.

주요 분파로는 첨정공파에서 역정공<경필>파, 역락재공<경륜>파, 경암공<경임>파, 동래공<상건>파로 갈리어 경북 선산과 상주 등지에 분포되어 있고, 목사공파는 사간공(司諫公)파 단일파로 경북 군위에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경암공 노경임(盧景任)을 들 수 있다.

안동 노씨


안동노씨(安東盧氏)의시조는 도시조 수(穗)의 다섯째아들 노만이다. 그는 신라조에 벼슬하여 공을 세우고 안동백(安東伯)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안동으로 하였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조에 이부상서 평장사를 지내고 안동에 세거의 터를 마련한 노우를 1세조로 하였고, 손자 노영길(盧永吉)이 고려조에서 안동부원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본관을 안동으로 확정하였다.

안동노씨는 관적지는 안동이지만 안동부원군 노영길이 세거지를 떠나 전북 옥구로 옮긴 이후부터 후손들이 옥구와 완주 등지에 세거해 왔던 것으로 보인다. 그중 7세 노중리(盧重理)의 후손이 완주로 옮겨가 그곳에 터를 닦았고, 6세 노결(盧潔)과 노침의 후손들이 김제와 익산에 세거한 것으로 보인다.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안동노씨가 전북 옥구군 성산면과 임피면, 완주군 봉동읍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영길의 아들 숭(崇)이 있다. 그는 한림학사 지냈고, 아들 4형제가 모두 벼슬길에 올라 가문을 빛냈다.

연일 노씨


연일노씨(延日盧氏)는 도시조 수(穗)의 일곱째 아들 노증(盧增)이 신라조에 벼슬하여 공을 세우고 연일백(延日伯)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연일로 하였다. 그러나 그 후세계가 실전되어 소목을 밝히지 못하고 후손 노경령(盧慶齡)을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보첩을 상고하지 못하여 노경령이 어느 시대 인물인지 또는 그의 행적과 그 이하의 세계를 알 수 없다. 1930년도 국세조사 때는 조사 착오였는지 나타나지 않았다.

풍천 노씨


풍천노씨(豊川盧氏)의 시조 노지(盧址)는 도시조 수(穗)의 셋째아들로서 9형제가 모두 국가에 공을 세우고 분봉될 때 그는 풍천백(豊川伯)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풍천으로 하였다. 그러나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고려조에 국자진사를 지낸 노유(盧裕)를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풍천노씨는 관적지인 풍천을 떠나 주로 경남과 전북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그 까닭은 5세 서린(瑞麟)의 대에 홍건적의 난을 피해 처음 경북 청도로 남하 하였고, 아들 천주(天柱)가 다시 경남 창녕으로 옮겨 그곳에 세거지를 마련하였으며, 그 후대에서 일부가 전북 장수와 진안 등지로 이주 하였다. 그래서 1930년도 국세조사 당시 전북 임실군 삼계면, 남원군 주천면, 순창군 쌍치면과 경남 진양군 문안면, 하동군 악양면, 함양군 일대에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해주 노씨

해주노씨(海州盧氏)는 광주노씨에서 분적한 계통이다. 시조 노시헌(盧始憲)은 광주노씨 1세조 서(恕)의 후손 덕기(德基)의 6대손으로 조선 태종 때 해주(海州)로 이거하여 세거지를 마련하였으므로 후손들이 광주노씨에서 분적,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해주로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광주노씨보>에는 노덕기는 1389년(공양왕 1) 생으로 조선 세종조에 사헌부 장령을 지낸 것으로 되어 있어 연대상 차이가 있는데 확실한 사실은 알기가 어렵다.

한편 <조선씨족통보( 朝鮮氏族統譜)>등 문헌에는 시조가 노세걸(盧世傑)이라 하였는데, 일설에는 현감을 지낸 노열지(盧說之)의 후손이라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현감을 지낸 노열지, 예조정랑을 지낸 노광협(盧光協), 예조좌랑을 지낸 노수(弩手),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노계종(盧繼宗), 부사를 지낸 노성지(盧性之) 등을 꼽을 수 있다.






魯(노)氏

주요 본관은 함평(咸平), 강화(江華)이며, 시조 노계(魯啓)가 고려말 공민왕 때 정윤 벼슬을 한 것으로 보아, 오래 전부터 우리 나라에도 살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노(魯)씨는 조선시대에 3명의 문과 급제자를 냈는데, 역사상으로는 함평노씨의 노인(魯認)과 강화노씨의 노춘근(魯이春根)이 두드러진다.

강화 노씨

시조 노용신(魯龍臣: 일명 休臣, 시호 忠襄)은 진(秦)나라에 의해 주(周)나라가 망할 때 우리나라에 와서 기자조선(箕子朝鮮) 애왕(哀王)을 섬겨 기자의 8조와 정제를 다시 일으키고 갑비군(甲比君:갑비는 지금의 江華)에 봉해진 노중련(魯仲連)의 손자 노계(魯啓)의 후손이라고 한다. 그는 고려 신종 때 문과에 급제, 명종 때 벼슬이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이르고, 1232년(고종 19) 강화현령으로 몽고군의 침입 때 강화 수비에 공을 세워 강화군(江華君)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본관을 강화로 하였다. 이 집안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임진왜란에 참전했다가 전사한 노신손(魯伸遜)과 그의 아들 노춘근(魯春根) 부자를 들 수 있다. 노춘근은 무과에 급제, 수문장으로 재직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李舜臣)의 휘하에 들어가 당포(唐浦)해전에서 크게 전공을 세우고, 다시 고하도(高下島)싸움에서 적장을 끌어안고 바다에 뛰어들어 순절했다. 고향에 정문이 세워지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광주 노씨

광주노씨(廣州魯氏)는 강화노씨와 동원(同源)이면서도 중간 세계가 실전되어 혈연 계보를 가리지 못해 계대가 가능한 노필상(魯弼商)을 시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그는 광주(光州)에 토착한 사족(士族)의 후예로 벼슬은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고 한다. 본관을 광주로 하게 된 연유는 알 수 없으나 그의 선대부터 광주에 세거했기 때문에 후손들이 조상의 세거지를 본관으로 삼은 것으로 본다.

밀양 노씨

시조 노형권(魯衡權)은 강화노씨의 원조(遠祖) 노계(魯啓)의 원손(遠孫)이다. 그는 1359년 (공민왕 8) 문과에 급제, 이듬해 홍건적이 침입하여 왕이 복주(福州: 지금의 安東)로 파천할 때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홍건적을 대파했다. 난이 평정된 후 밀산군(密山君:밀산은 지금의 密陽)에 봉해지고 공조전서(工曹典書)에 이르렀으며, 조선 개국 후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밀양으로 하였다. 형권의 아들 노서(魯恕)는 조선조에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고, 증손 노복(魯馥)은 군수를 지냈다. 복의 아들 노요좌(魯堯佐)는 참의를 지냈고, 요좌의 아들 노식(魯植)이 참판을 지냈다.
숙의 아들 노세보(魯世輔)는 참의를 지냈고, 그의 아들 노열(魯說)은 참판을 지냈다.

함평 노씨

시조 노목(魯穆)은 강화노씨의 원조(遠祖) 노계(魯啓)의 원손이다. 그는 고려조에서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르고 함풍군(咸豊君:함풍은 지금의 咸平)에 봉해졌으며 또 7세손 노신(魯愼)이 공민왕조에 함풍군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본관을 함평(咸平)으로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함평노씨는 시조가 함평으로 관직을 받았다고 하지만 시조의 아랫대에서 함평으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

<함평노씨 족보(咸平魯氏族譜)>에 의하면 시조 노목의 묘소가 합천군 봉산면 대평리에 있었다고 되어 있고, 또 4세 노관도(魯貫道)의 아들 노창문(魯彰文)의 부인이 나주의 손씨(孫氏)이며, 손녀가 화평군(化平君) 김심(金深)에게 출가했다는 사실로 보아 노관도의 대에 함평에 연고를 맺은 듯 싶다. 함평노씨의 중흥조인 무열공(武烈公) 노신(魯愼)은 1359년(공민왕 8) 홍건적의 침입 때 안우(安祐), 이방실(李芳實)등과 함께 개경 수복에 공을 세워 1등공신에 녹훈, 함풍군에 봉해지고, 상호군(上護軍), 정윤(正尹)들을 지냈다. 그는 역전의 용장으로 이성계(李成桂)와는 막역한 사이이면서도 이성계가 고려를 멸할 기미를 보이자 이성계 반대파에 속했다가 조선이 개국되자 고향으로 내려와 은거했다. 그의 묘소는 실전되어 1960년에 함평군 월야면 월악리에 설단, 매년 음력 3월 10일에 향사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노종주(魯宗周), 노인, 노홍(魯鴻) 등을 들 수 있다. 노종주는 단종조에 선전관(宣傳官)으로 있을 때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자 금성대군(錦城大君)과 함께 단종 복위를 추진하다 발각, 나주옥에 갇혔으나 탈옥하여 영암 서호(西湖)의 은적산에 은거했다. 금계(錦溪) 노인은 1597년(선조 30) 남원 전투에서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1년만에 탈출, 명(明)나라로 건너가 무이서원(武夷書院)에서 정주학(程朱學)을 연구하고 돌아왔다. 그의 유고집 <금계일기(錦溪日記)> 는 보물 제 311호로 지정받았다. 관암(冠巖) 노홍(魯鴻)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李舜臣) 휘하에서 진영장(鎭營將)으로 전공을 세우고 원종2등 공신(原從二等功臣)이 되었다. 이 외에 노극명(魯克明), 노연령(魯延齡), 노성택(魯聖澤)등이 각각 문과에 급제한 인물들이다.




路(노)氏

개성노씨는 원래 중국의 성씨로 황제의 후손이 노(路)에 봉해져서 생긴 성이라고 한다. 시조 노은경(路誾儆)은 원나라 한림학사로서 1351(충정왕 3) 노국대장공주를 배종하고 고려에 들어와서 귀화, 개성에 정착했다. 그래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을 개성으로 하였다. 노씨는 문헌에 개성노씨 외에 태원(太原)ㆍ북청(北靑)ㆍ대원(大元) 등 3본이 전해지나 1930년도 국세조사에 개성노씨 외에는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오늘날은 개성노씨만 실존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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