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선(鄭敾)의 ‘계상아회도(溪上雅會圖)’
조장빈 / 산악문화연구소
2013년 서울옥션 경매에 출품된 겸재(謙齋) 정선(鄭敾)의 ‘계상아회도(溪上雅會圖)’는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화가 9명의 작품이 담긴 16폭짜리 화첩의 그림이다. 당시 경매에서는 이 작품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우뚝 솟은 산과 굽이쳐 흐르는 계곡의 모습을 시원한 구도로 풀어냈으며, 너른 바위에 모여 앉아 경치를 감상하는 인물들과 나귀를 타고 이들을 찾아가는 또 다른 인물을 그렸다. 겸재 특유의 필치와 화법이 잘 드러나는 수작이다.”
그림에 적힌 화제(畵題)는 “돌부리에 겹겹이 흐르는 물이 먼 곳으로부터 흘러온 기세인데, 어찌 저리도 닮았을까. 능히 그릴 수 없는 것은 물소리뿐이네(石角層流 自遠來勢 何其酷似 所不能者水聲耳)”이다. 여기에는 겸재의 낙관이 찍혀 있으나 정확한 제작 시기는 알려지지 않았다.
동령폭을 찾은 추사(秋史)는 묻는다. “빈 산이라 마음은 고요한데 그대는 끝내 뉘를 생각하는고”
정선의 ‘계상아회도(溪上雅會圖)’와 동령폭포
그림을 보면 높은 산봉우리를 타고 흘러내린 계류 옆 너럭바위에 두 선비가 시동을 데리고 앉아 주변 경관을 한가로이 감상하고 있다. 바위 끄트머리에 쭈그리고 앉은 또 다른 시동은 나귀를 타고 뒤늦게 찾아오는 선비를 바라본다. 마음이 급해진 선비는 나귀를 몰고 있으며, 그 뒤에서는 허리춤에 술통을 두른 시동이 채찍을 들어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그런데 선비들이 앉아 있는 너럭바위와 그 뒤로 우뚝 선 입석(立石)의 풍경이 무척 낯익다. 이 바위는 탕춘대(蕩春臺)의 차일암(遮日岩)이다. 이긍익(李肯翊)은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 “바위가 매우 험하고 높아 냇물을 베고 있으며, 바위 위에 장막을 쳤던 구멍이 있고, 바윗돌은 층층으로 포개져 계단과 같다”라고 기록했는데, 이는 훗날 세검정(洗劍亭)이 건립되는 바로 그 바위를 말한다.
총융청(摠戎廳) 감관(監官)이었던 김상채(金尙彩)의 『창암집(蒼巖集)』에 따르면, 1747년 총융청을 이곳으로 옮긴 후 이듬해 군사들이 쉴 수 있도록 세검정을 지었으며, 1754년에는 탕춘대를 연융대(鍊戎臺)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1754년 가을, 영조는 “탕춘대라는 이름은 바르지 않다. 이미 경영(京營)을 설치하고 때때로 나아가기도 하니 바로잡지 않을 수 없다. 이름을 연융대라 고치도록 하라”면서 홍상한(洪象漢)에게 ‘鍊戎臺(연융대)’라는 바위 글씨를 새기도록 명했는데, 그림 속의 입석이 훗날 영조의 어명에 의해 글씨가 새겨진 바위다.
정선의 세검정도와 일제강점기 세검정 사진의 입석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입석 뒤로 길게 이어진 언덕이 바로 탕춘대다. 연산군은 이 꼭대기에 탕춘정(蕩春亭)을 짓고 산 안팎에 두견화(杜鵑花)를 심었으며, 시내를 막아 물을 모아두고 경치를 즐겼다고 전한다. 지금은 주택이 들어섰지만, 정원 건물 틈새로 보이는 보현봉의 우뚝 솟은 모습은 여전히 가깝고 웅장하게 다가온다. 당시에는 맞은편 시내 건너로 백석동천(白石洞天)을 향해 오르는 석벽과 그곳을 타고 흘러내리는 폭포까지 한눈에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탕춘대의 뛰어난 경치를 두고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대문장가인 강백년(姜栢年)은 「「한경잡영(漢京雜詠)」에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어지러이 흩어진 바위들은 모두 화악(華嶽, 삼각산)에서 흘러왔고, 쏟아지는 폭포수는 온 골짜기를 뒤흔드는 천둥소리를 더하네. 물과 바위가 서로 다투며 밤낮으로 시끄럽게 울려 대고, 물살에 씻겨 영롱한 자태를 만들다가는 무더기로 흩어지네.”
그는 이곳을 두고 몇 번째 신선의 동천(洞天)이냐며, 기이하고 빼어난 경치로는 탕춘대만 한 곳이 없다고 극찬했다.
탕춘대 앞을 흐르는 시냇물은 사천(沙川)이라고도 불렸다. 북한산 대남문에서 시작된 구기계곡의 물과 보현봉에서 흘러내린 평창계곡의 물이 탕춘대 위쪽에서 합쳐져 물돌이를 이루며 차일암 앞을 흘러간다. 지금은 주로 구기계곡을 통해 대남문에 오르지만, 근대까지만 해도 구기동 평창에서 사자능선을 타고 보현봉 아래를 거쳐 구기계곡 상단으로 내려와 대남문이나 문수사를 찾았다. 『한경지략(漢京識略)』에서 “사천(沙川)을 거슬러 올라가면 동령폭포가 있다”라고 기록한 것처럼, 이 물길의 근원은 바로 동령폭포다.
동령폭포는 지금의 형제봉 서쪽 계류에 위치한다. 상단에는 너른 반석이 겹겹이 쌓여 있고 계단을 이룬 절벽을 따라 시원한 물줄기가 쏟아지는데, 폭포 아래의 못(潭)이 작은 것이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여기서 ‘동령(東嶺)’은 형제봉을 뜻한다. 장혼(張混)은 「입동령폭(入東嶺瀑)」에서 “형제처럼 나란한 산봉우리를 바라보았다”라고 하였고, 김신겸(金信謙)은 「유북성기(遊北城記)」에서 이곳을 선유봉(仙遊峯)이라 부르기도 했다.
또한 1831년 신석우(申錫愚)는 「동령심폭기(東冷尋瀑記)」에서 ‘東冷’으로 표기했으며, 1869년 폭포를 찾은 한장석(韓章錫)은 「동령관폭기(東泠觀瀑記)」에서 ‘嶺(고개 령)’ 자를 ‘泠(서늘할 령)’ 자로 고쳐 부르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했다. 한편, 『여재촬요(輿載撮要)』(1893)의 「경성오부도(京城五部圖)」에는 이곳이 ‘향림폭(香林瀑)’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북한산 향로봉 뒤편에 있는 향림폭포와의 오기로 보인다. 물론 폭포 서쪽에 미타사가 있고 그 위쪽으로 동령사(東嶺寺, 훗날 神王寺)가 있어 사찰림을 뜻하는 ‘향림’으로 칭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이 지도 외에 다른 문헌에서는 이를 폭포명으로 사용한 사례를 찾을 수 없다.
1720년 4월, 김신겸은 북성(北城)을 유람하며 동령폭포를 감상한 뒤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
“경성이 바로 지척이다. 하지만 이 외딴곳은 그 어떤 선현이나 안목 있는 사람의 눈에도 띄지 않고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다. 공미(公美, 朴昌彦)로 인해 그 아름다움이 드러났다. 이 샘과 바위 하나가 유명해지거나 잊혀지는 것 또한 미리 정해진 것일까? 이는 참으로 기이하고 탄식할 일이다.”
이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동령폭포는 이 무렵 박창언에 의해 본격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흥미롭게도 이날 북성 유람에는 정선도 함께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그는 일행이 폭포를 구경하고 내려온 뒤에야 뒤늦게 경리창에 도착했다. 비록 폭포를 직접 보진 못했더라도, 김신겸 일행에게서 동령폭포의 절경에 대해 상세히 전해 들었음은 자명하다. 나아가 정선은 박창언과 막역한 외사촌간이었으므로, 어쩌면 일행보다 훨씬 전부터 이 폭포의 존재를 이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동령폭포가 이름을 알린 후, 문인들은 즐겨 찾던 인왕산 수성동(水聲洞)과 동령폭포의 우열을 논하곤 했다. 심상규(沈象奎)는 벗 김조순(金祖淳)이 수성동에 다녀왔다는 소식을 듣고 편지를 보냈다. 그는 수성동의 물이 맑고 빠르지만 도심의 소음으로 더럽혀지는 것이 아쉬운 반면, 동령폭포를 유람할 때는 밤비 속에 귀를 맴돌던 폭포의 굉음이 대단했다며 장난스레 두 곳을 비교했다.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1831년, 폭포를 찾은 신석우는 「동령심폭기(東冷尋瀑記)」에서 그 정경을 다음과 같이 생생히 묘사했다.
“올려다보니 하얀 눈이 바람에 휘날리고 학 떼가 하늘에서 춤추듯 날아다니고 있었다. 벼랑을 오르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이미 물웅덩이에 들어가 흐르는 물에 몸을 담그고 갓끈을 씻고 있었다. 나도 바위에 앉아 동자의 허리에 찬 술통을 풀고 한 잔 마시고 계곡의 돌길을 따라 올라가니 열 걸음도 채 되지 않아 커다란 바위가 마치 얼음발이 흩뿌린 듯 물에 덮여 있었다. 거대한 폭포 아래에 다다르자 쏟아지는 물줄기와 흩날리는 물거품이 우리 옷을 흠뻑 적셨다. 폭포는 굉음을 내며 산속에 울려 퍼졌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들어보니, 마치 눈송이들이 학과 함께 춤추는 듯한 광경이 펼쳐졌다.”
그림 속 화제에는 “능히 그릴 수 없는 것은 물소리뿐이네(所不可畵者 唯水聲耳)”라고 적혀 있다. 정선은 탕춘대 앞 시내의 근원인 동령폭포를 한 화면에 포착함으로써, 멀리 우뚝 솟은 산으로부터 이어져 내리는 기세 좋은 물소리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세검정이 건립된 이후에는 경관을 감상하는 주된 대상이 자연 그 자체에서 ‘누정(樓亭)’이라는 건축물로 옮겨가게 된다. 이익(李瀷)이 “탕춘대는 도성 북문 밖의 경승지이다. 산이 우뚝 높이 솟고 시내가 넘실대는데, 여기에 새로이 큰 정자를 짓고 단청을 휘황하게 칠하니 자못 삼절(三絶)이라 이를 만하다”라며 세검정을 탕춘대 삼절 중 하나로 꼽은 것이 대표적이다. 이후 이 일대를 그린 후대의 그림들은 대부분 누정과 그 앞의 계류만을 집중적으로 묘사했다. 이 때문에 물길의 근원으로부터 도도하게 이어져 내려오는 깊은 물소리의 울림은 전해지기 어려워졌다.
결론적으로 《계상아회도》는 탕춘대 일대의 암반 계류를 묘사한 뛰어난 진경산수화다. 선비들이 아회(雅會)를 열고 있는 너럭바위는 탕춘대의 차일암이며, 그 뒤로는 훗날 ‘鍊戎臺(연융대)’라는 바위 글씨가 새겨지게 되는 입석이 우뚝 서 있다. 정선은 물길의 근원인 북한산 보현봉 산자락의 동령폭포를 화면 상단에 부각시키고, 탕춘대와 백악의 산줄기를 감돌아 차일암 앞의 너른 암반을 층층이 흘러내리는 물의 힘찬 기세를 완벽하게 표현해 냈다. 이 작품은 동령폭포가 문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진 1720년경 이후부터, 세검정이 건립된 1748년 이전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주석]
1. 김상채(金尙彩), 『창암집(蒼巖集)』: “洗劒亭。奉次諸公韻 丁卯。摠廳移建于蕩春臺後。戊辰新構亭也。” 정묘년(1747년)에 총융청을 이전한 후 무진년(1748년)에 새 정자(세검정)를 건립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세검(洗劍)이라는 명칭은 칼을 갈아 씻는다는 뜻으로 평화를 상징하며 인조반정의 결의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정작 그 근거로 자주 인용되는 『궁궐지(宮闕志)』에는 관련 내용이 확인되지 않는다.
2. 연융대 바위 글씨의 유래: 『창암집』에 “1754년(영조 30년) 가을, 탕춘대(蕩春臺)의 이름을 연융대(鍊戎臺)로 고친 사실이 있었다. 영조는 어필(御筆) 현판을 총융청에 걸게 하였고, 소공동에 사는 홍상서(洪尙書)에게 명하여 탕춘대 바위 위에도 새겨 쓰도록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홍석주(洪奭周)의 『연천집(淵泉集)』에는 “정혜공(靖惠公)은 큰 글씨를 잘 썼다. 지금 용호영(龍虎營)의 문에 걸린 현판과 연융대 바위에 새겨진 세 글자는 모두 공(정혜공)의 필적이다”라고 전한다. 이를 통해 ‘鍊戎臺’ 바위 글씨는 영조의 명에 따라 정혜공 홍상한(洪象漢, 1701~1769)이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3. 박윤묵(朴允默, 1771~1849), 『존재집(存齋集)』 「이락동정사념운(二樂洞精舍拈韵)」: “사자바위는 미타사로 길게 이어져 있고, 아홉 굽이 양의 창자처럼 험한 길은 보현봉으로 들어가는도다(獅子巖連彌陀寺。羊膓路入普賢峰).”
4. 박창언(朴昌彦, 1677~1731): 정선의 큰외삼촌인 박견성(朴見聖)의 셋째 아들로, 정선과는 외사촌 형제 사이다. 이병연(李秉淵) 등과 함께 외조부 박자진(朴자振)의 ‘풍계유택(楓溪遺宅)’ 별당에서 함께 학문을 강론했으며, 정선은 훗날 그 시절을 추억하며 《괴단야화도(槐壇夜話圖)》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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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조장빈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15 동령폭(東嶺瀑)이 알려진 후 폭(瀑)의 바위이끼는 두터워지고 물은 끊이지 않고 흘렀다. 더위에 정선의 산수화와 신석우의 기문을 손에 쥐고 연구소 산행에 함께해준 벗들에게 감사하다. 다음 산행에 또 뵙길 바라며...*^^* (동령폭 사진은 북한산국립공단에서 제공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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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半山 韓相哲 작성시간 26.06.15 쟈료 잘 감상합니다. 고맙습니다.
요즈음 제 몸이 아파 모든 사회활동을 중단하고 있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조장빈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15 半山 韓相哲 더위에 건강 유념하시어 가을 모임에는 뵙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