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화
학교에서 쓰는 말 가운데 ‘훈화’가 있다. 조회 때마다 교장선생님이 높은 단 위에 뚜벅뚜벅 올라가 학생을 내려다보고 하는 말이다. 국립국어원에서 엮어낸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찾아보면 “교훈이나 훈시를 함. 또는 그런 말.”로 풀어놓았다. 어라, ‘교훈’은 뭐고 ‘훈시’는 또 무슨 뜻인가. 이때 교훈은 “앞으로의 행동이나 생활에 지침이 될 만한 것을 가르침. 또는 그런 가르침.”이다. 훈시는 “상관이 하관에게 집무상의 주의 사항을 일러 보임.”이라고 뜻매김해 놓았다. 이쯤 되면 이걸 사전이라고 만들어놓았나 싶은 게 쓰레기통에 집어던지고 싶다. 처음부터 훈화는 ‘아랫사람에게 어떤 일을 할 때 알아야 할 지침이나 조심해야 할 점을 가르치거나 일러주는 일’로 풀어놓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나. 사전은 사전 엮는 먹물끼리 펼쳐 보자고 만든 게 아니라 낱말 뜻을 모르는 사람이 찾아보라고 만든 책이 아닌가. 사전 찾다가 괜히 말이 엇나갔다. 빙빙 돌려 풀어놓긴 했지만, 훈화는 높은 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일을 이렇게 저렇게 하라고 친절하게 가르쳐주려고 하는 이야기인 셈이다. 하지만 말뜻과는 다르게 조곤조곤 일러주고 보여주기보다는 단상에 올라온 교장선생님은 하나마나한 잔소리를 길게 늘어놓거나 눈을 부라리고 호통 칠 때가 더 많았다. 열과 줄을 맞춰 학생들을 동상처럼 세워놓고 차렷, 열중 쉬어, 앞으로 나란히를 되풀이하며 한 말 또 하고 한 말 또 하는 훈화를 꾹 참고 잘 들어야 훌륭한 학생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군대에서나 있을 법한 풍경이 아닌가. 그런 말이 아이들 귀에 들어가기나 할까. 한 걸음 더 나아가 ‘훈화’를 ‘훈시’라고 바꿔 말하기도 하고, ‘훈화 말씀’ 같은 겹말을 만들거나 ‘교장선생님 훈화 말씀이 계시겠습니다’처럼 사람이 아닌 말씀을 떠받들기도 한다. 훈화는 언제나 잘 받들어야 모셔야 할 말이다. 훈화가 되었든 훈시가 되었든 이런 말들은 학교에서 버려야 할 말이다. ‘교장선생님 말씀’ 해도 괜찮겠지만 ‘교장선생님 이야기’ 쯤으로 바꿔 말하면 한결 부드럽다. 자연히 실천하는 모습도 달라지지 않을까. ‘임명’이란 말도 마찬가지로 버려야 할 말. 해마다 학교마다 학생회장 선거를 치르고 회장이나 부회장에 당선한 학생에게 주는 증서를 무엇이라고 하는가. 어처구니없게도 ‘임명장’이다. 당선은 선거나 심사, 선발 따위에서 뽑힌 것을 말하고 임명은 일정한 지위나 임무를 누군가에게 맡기는 일이다. 당선은 민주 절차를 거치지만 임명은 높은 사람의 생각이 중요하다. 학생회장에게 임명장을 주든 당선증을 주든 선거로 뽑힌 학생이 회장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는 않지만, 그 말에 담긴 뜻을 톺아보면 하늘과 땅 차이만큼 크다. 다음은 선생끼리 쓰는 말인데 ‘모셨다’는 말. 요전날 볼 일이 있어 어느 자리에 갔더니 한 선생님이 아무개 교육장은 자신이 어느 학교에서 모시던 분이라고 크게 떠벌린다. 얼마나 가깝게 지냈는가 몰라도 한 학교에서 같이 일했다고 해도 될 말인데 저보다 직급이 높은 사람이면 내남없이 ‘모셨다’고 한다. 거꾸로 저보다 낮은 사람일 때는 뭐라고 할까. 두말할 것도 없이 ‘데리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자연스럽게 모시는 분이 하는 말씀은 언제나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 따라야할 말이 되고 만다. ‘모시다’든 ‘데리다’든 말밑을 캐보면 늘 위아래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 같은 민주 시대에 쓸 말은 결코 아니다. 한 학교에서 ‘같이 일했던 분’ 해도 너끈하다. 졸업식 노랫말처럼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우리나라 짊어지고 나갈 우리들’이라고 생각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라는 말에서 보듯 고작 한 살 차이인데도 선후배를 가르고 복종하는 몸짓을 몸에 새기는 건 군대 조직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고 보니 지난 추석 때가 생각난다. 추석을 앞두고 청와대는 대통령이 “부사관 이하 모든 국군 장병들에게 격려카드와 특별간식을 하사할 예정”이라고 발표해서 입길에 오른다. 그러자 한쪽에서는 옛날 서슬 퍼런 왕조시대에나 쓰던 말로 민주공화국에서 쓸 말은 아니라고 나무랐고 다른 쪽에서는 ‘하사’라는 표현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물건을 준다는 일반적인 의미라고 대통령을 편들었다. 대통령은 이 나라 군대를 다스리는 윗사람이고 장병은 아랫사람이니 그게 무슨 문제냐고 핏대를 올렸다. 우리 헌법 제74조 1항에 “대통령은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군을 통수한다”고도 쓰여 있다고 오히려 더 큰소리로 떠들었다. 하지만 ‘하사’라고 했을 때는 국군장병도 이 나라 주권자인 ‘국민’이라는 생각은 병아리 눈곱만큼도 없다. 알다시피 높은 사람이 뭘 하사를 한다고 하면 하사 받는 쪽은 어떻게 받아야 할까. 뻣뻣이 받을 수 있는가. “성극이 망극하옵니다” 하고 땅바닥에 넙죽 엎드려야 말에 어울리는 몸짓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런 말을 학교나 교육 현장에서도 여태 쓰는 사람이 있으니 어쩌면 좋은가. 거짓말이라고? 아니다. 눈을 크게 뜨고 한번 둘러보시라. 우리는 바야흐로 시곗바늘을 거꾸로 돌려 왕조 시대로 가고 있다. 지난해 2월, 역사교과서 검정제로는 어렵겠다고 생각하고 대통령은 “균형 잡힌 역사교과서 개발 등 제도 개선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한다. 그 말을 받들어 교육부장관은 “자라나는 미래 세대에게 우리 역사를 올바르고 균형 있게 가르치자는 취지”라며 중․고교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를 공식으로 발표한다. 여당 대표는 국정화를 왜 하느냐고 되묻는 국민에게 눈을 부라리고, “어린 세대에 부정적 사관에 의해 쓰여진 패배주의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우리 현대사를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굴욕의 역사’라고 억지를 부리는 주장은 이 땅에서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하고 악역을 기꺼이 맡고 나섰다. 정부를 감시하고 비판하라는 국민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저들이 걸핏하면 들먹이는 말이 국가에 대한 자긍심과 애국심을 고취하자는 소리다. 과연 정치꾼다운 놀라운 말재주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말뜻 그대로라면 누구라도 고개 끄덕일 말이다. 그러나 역사 교과서를 국정으로 내자는 사람들이 말하는 ‘긍정적 사관’은 친일과 독재를 편들고, 대한민국 건국과 이후 발전을 강조한다. 거꾸로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역사, 민주주의를 만들어온 과정은 끊임없이 지우고 감추려고 든다. 초등학교 사회 교과서는 일제강점기 ‘의병 학살’을 ‘의병 토벌’이라고 하고, ‘쌀 수탈’을 ‘쌀 수출’이라고 쓴다. 그 틈바구니에서 상처 받고 혼란스러워할 아이들을 생각하면 기가 막혀서 말도 안 나올 지경이다. 뭐, 이런 게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만 우리 교육과정이 지향하는 인간상이 과연 무엇인가. ‘민주 시민’이다. 그런데 미래 세대를 ‘민주 시민’으로 기르지는 못할망정 역사를 거슬러 ‘반공 민주 정신에 투철한 애국 애족이 우리의 삶의 길’이라고 믿는 말 잘 듣는 ‘신민’으로 기르겠다고 하니 이것이 왕조 시대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말이 길어졌다. 말은 실천이고 약속이다. 말이 뒤틀리면 실천도 뒤틀릴 수밖에 없다. 교장선생님이 ‘훈화한다’고 할 때와 ‘이야기한다’고 할 때가 어떻게 다른지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시라. 학생이나 아랫사람이 과연 어떤 자세로 들어야하겠는가. 그이는 ‘내가 모시는 분’이라고 할 때와 ‘같이 일하는 분’이라고 할 때는 또 어떤가. 훈화하는 교장선생님한테 건방지게 어느 학생이 손을 번쩍 들고 궁금한 말을 물어볼 수 있겠는가. 모시는 분한테 어느 아랫사람이 고개 빳빳이 세우고 바른 말을 거리낌 없이 토해내고 비판할 수 있겠는가. 모시는 분한테는 한 줄로 세우고 머리를 숙여 충성을 다짐할 수밖에 없다. (2015. 10.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