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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감'이라는 말

작성자이무완|작성시간12.08.16|조회수322 목록 댓글 0

'유감'이라는 말

 

요 며칠 신문에서 읽다보니 ‘유감’이라는 말이 혼란스러워 어안이 벙벙해진다. 가만히 살펴보면 같은 말인데 속내는 조금씩 다르다.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 자리에도 쓰고 불만이 있다고 쓸 자리에도 유감을 써놓았기 때문이다. 내 마음 같아선 쉬운 말로 미안하다고 하든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고 쓰면 안 될까 싶다.

'유감'이라는 말이 쓰는 데를 찾아보았다. 다음 보기에서 밑금 그은 데를 눈여겨보자.

 

보기1. 축구협, 일본에 “유감” 메일… ‘사죄’ 논란 (……) 대한축구협회 관계자는 “통상적인 문구로 보낸 문서를 해석하는 과정상의 오해로 문제가 너무 커졌다”며 “혼란이 초래된 것에 대해 유감의 뜻을 밝힌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8월 14일치)

 

대한축구협회는 '사건에 대해 유감의 뜻을 전하고자 한다'고 썼는데, 일본축구협회는 한국이 일본에 '사죄'한 걸로 보냈다고 떠벌렸다. '유감의 뜻'을 전했는데 받아들이는 쪽에서 '사죄'로 읽은 까닭은 무엇일까? '유감'이라는 말에는 사죄한다는 뜻이 전혀 없는가. (편지에는 영어로 apology가 아닌 regret로 썼다고 한다. apology만 사과한다는 뜻은 아니다. regret는 후회한다, 뉘우친다는 말이 아닌가. 이는 잘못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보기2. 지난 8일 김기용 경찰청장은 기자간담회를 열어 에스제이엠(SJM) 용역폭력 사건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그러나 이 사건을 바라보는 경찰의 속내는 다르다. “억울하다”는 반응이 많다. (<한겨레신문> 8월 15일치)

 

이 보기글은 경비업체들이 노동자들한테 폭력을 휘두르는 데도 경찰이 모른 체 눈 감은 일에 대해 경찰청장이 '유감'을 표명했다고 했다. 경찰이 마땅히 제 할 일을 못했으니 비난받아야 한다. 세상천지에 폭력을 휘두르는 걸 빤히 눈 뜨고 경찰이 모른 척 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빠져나갈 구멍을 찾고자 상투로 한 말이라고 해도 잘못(용역업체가 저지른 폭력에 대해 눈 감은 일)을 반성하고 이런 일들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하겠다는 뜻으로 한 말로 나는 생각하고 싶다.

 

보기3. 조태영 외교통상부 대변인은 “일본의 책임 있는 정치인이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한 것은 과거 일본 제국주의 피해를 당한 국가와 국민의 감정을 배려하지 않은 무책임한 행위”라며 “지극히 유감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경향신문> 8월 16일치>

 

외교통상부 대변인이 한 말을 '사과'로 생각하는 사람을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일본이 제 잘못을 모르고 전범 위패를 모아둔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한 일이 옳지 않다, 하지 말았어야 할 일을 한 것에 대해 매우 불쾌하다는 뜻으로 쓴 말이다.

어쨌든 대한축구협회도 경찰청장도 외교통상부 대변인도 ‘유감’이라는 말로 공식 의견을 밝혔다. 많이 배워 유식한 분들이니 어련히 점잖고 뒷탈이 없을 말을 골라 썼겠냐마는, 무지렁이인 내 눈에도 보기1, 2는 ‘사과’의 뜻으로 보기3은 ‘불만’을 나타낸 말로 보인다.  

그런데 국립국어원에서 내는 ≪표준국어대사전≫을 펴보니 다음과 같이 뜻풀이를 해놓았다.

 

유감(遺憾) 「명사」마음에 차지 아니하여 섭섭하거나 불만스럽게 남아 있는 느낌

¶ 유감을 품다/유감의 뜻을 표하다/내게 유감이 있으면 말해 보아라./우리는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 데 대해 유감으로 생각합니다./싸움터에 나가게만 해 주신다면 소인은 죽어도 유감이 없겠습니다./그들에게 수빈이의 시간 없음에 대해 이해해 줄 아량이 없었다는 건 유감이지만, 나무랄 순 없었다.≪박완서, 도시의 흉년≫/양 서방은 노상 나이대접을 안 해 주고 떵떵거리는 김두수에게 유감이 많다.≪박경리, 토지≫

 

사전 풀이 어떤가? 이야말로 유감스럽지 않은가. 풀이대로라면 '유감'이라는 말을 써서는 결코 진정어린 ‘미안한 마음’을 드러낼 수는 없다. 그런데도 신문 기사들로 보면 보기1과 보기2는 잘못한 일이 있으니 미안해 하는 마음을 전하고자 했다. 사전에 보기로 나온 문장, ‘우리는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 데 대해 유감으로 생각합니다’는 말을 잘못한 사람이 했다고 하면 '섭섭하거나 불만스럽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할까.

그러니 이런 말은 안 쓰는 게 가장 좋겠다. 말을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격식을 차려서 해야할 말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러나 쉬운 말을 두고 공연히 어려운 말을 써서야 되겠는가.

아무튼 ‘유감’이란 말에 정말 유감이 많다. 대한축구협회도 그렇고 경찰청장도 그렇고 혼란을 일으키고 용역 폭력 사건을 일으킨 일에 대해 진짜 속마음이야 어떤지 몰라도 결코 ‘불만스럽다’는 뜻으로 한 말은 아니다. 절대로 일어나지 않아야할 일이 일어난 것에 대해 머리 숙여야할 상황에서 쓴 말이지 않은가. 그 분들한테 어떤 뜻으로 한 말인지 물으면 ‘유감’이라고 거듭 말할지 모르겠지만 분명  사과하는 마음을 담아서 한 말이라고 나는 믿겠다. 요컨대 내 말은, 현실에서 말을 사과하는 뜻으로 쓴다면 사전에서도 ‘사과’의 뜻으로 쓰는 말이라고 똑똑히 밝혀야 하지 않을까.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치고 자기 잘못을 시원스레 인정하는 사람을 못 봤다. 잘못을 하고도 ‘유감’이라는 두루뭉실한 말로 슬쩍 눙치는 모습을 한두 번 본 게 아니다. 그러니 뒷날 '유감'이라고 말했지 언제 잘못을 반성하고 사과하는 뜻으로 말했느냐고 발뺌하지 않는가. (2012. 8.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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