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배려’라는 말
이 무 완
강원 삼척 서부초등학교
텔레비전 자막으로 흘러가는 토막 뉴스를 읽는데 힝, 이게 뭔가. ‘이재용 아들 ‘사회적 배려 대상자’로 국제중 합격’이라는 기사가 눈에 들어온다. 말문이 꽉 막힌다. 하기야 이런 일이 어디 어제오늘 일인가. 새삼스럽거나 놀라운 얘기도 아니다.
알 만한 사람이야 다 알겠지만 더러 앞뒤 사정 모르는 분도 있을 테니 잠깐 설명해야겠다. ‘이재용’은 삼성전자 부회장이고 그이 아버지는 삼성전자 회장이다. 그쪽 말로는 이혼한 부모의 자녀는 정서적으로 세심한 배려를 받아야 할 사회적 약자이니 규정에 어긋남이 없다고 해명했다지.
말인즉 삼성 부회장 아들은 부모가 이혼한 까닭에 한부모가정 자녀이고 마침 ‘저소득’ 기준이 빠진 사회적 배려 대상자 전형에 지원해서 합격했다는 말. 분칠한 말 들어보면 그럴싸하다. 그들 말처럼 나도 우리 사회의 배려가 있는 사람, 없는 사람을 가르고 따져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아이라면 누구라도 마땅히 두남받아야 하고 또 그런 세상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사회적 배려 대상자 전형은 말 그대로 사회적 약자를 배려한 것이지 권세 있고 돈 많고 잘난 사람들이 그 기회를 교묘하게 가로채고는 오히려 ‘세심한 배려를 받아야할 사회적 약자’라고 우기라고 만든 법은 아닐 게다.
그리고 하루가 지났다. 아침에 온 신문을 들춰보니 밤새 이 일은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되고 말았다. 사회면 한 귀퉁이에 보일듯 말듯 겨우 자그맣게 실렸다. 오, 과연 자본의 힘은 세다고 감탄해 본다.
신문을 내려놓고 ‘사회적 배려 대상자’라는 말을 생각해 본다. 있는 사람한테 없는 사람 몫을 떼어 주는 게 사회적 배려인가. ‘사회적 배려’ 하면 우리 사회에서 정말 배려 받아야할 사람을 배려해야 한다. 그러나 그 말이 잘난 사람, 있는 사람을 배려하는 뜻으로 쓰여서야 될 말인가. 말은 약속이다. 사람이 사람의 말을 믿지 못하는, 말이 죽어버린 세상은 오래 가지 못한다. 하물며 초등학생조차도 ‘배려는 다른 사람과 나의 처지를 바꿔 생각해 보고 다른 사람을 위한 말이나 행동’이라고 배운다. 그 뜻을 충실히 따르자면 ‘사회적 배려 대상자’는 서로 동무가 되어 일으켜주고 위로하며 함께 이 세상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마음으로든 몸짓으로든 바라지해줘야 할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비록 아버지가 삼성전자 부회장이지만 부모가 헤어졌기 때문에 그 아들은 당연히 사회적 배려 대상자라고 떼세를 부리니 하, 이 무슨 요지경 속이란 말인가. 나 같으면 부끄러워 고개를 못 들고 다니겠다.
이 일이 왜 입길에 오르는지 아주 모르고 하는 소리는 아닐 게다. 물론 그들이 생각하는 ‘사회적 배려’와 나 같이 어수룩한 사람이 생각하는 ‘사회적 배려’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겠지. 없는 사람을 아주 금 밖으로 내몰고 그 자리에 냄새나는 엉덩이를 들이민 게 들통 났다고 얼굴 뜨거워질 그들이 아니다. 오히려 고개 빳빳이 치들고 말한다. 부모 돈이나 빽(?)과 아무 상관없이 한부모가정 자녀이니 마땅히 배려 해줘야 한다고.
과연 그런가? 진정으로 배려 받아야 할 사람은 그들이 아니다. 정말 형편이 어려워 평등한 기회를 존중받지 못했거나 차별이나 소외를 받으며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삼성전자 부회장 아들이 한부모가정이라서 소외나 차별을 받거나 공평한 기회를 얻지 못했다고 떠벌리는 세상이라니. 오, 지나가는 개도 껄껄껄 웃으며 고개를 우툴두툴 흔들 것이다. 그들은 사회적 배려를 받아야 할 ‘약자’가 아니라, 속되게 말해서 아흔아홉을 손아귀에 거머쥐고도 없는 사람이 가진 하나를 마저 빼앗으려 드는 힘센 ‘강자’ 쪽에 든다.
이래서 저들은 결코 ‘사회적 배려 대상’이 될 수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그러면 애당초 ‘사회적 배려’라는 말로 사람 헷갈리게 하지 말고 ‘사회적 특혜’나 ‘사회적 우대’라고 해야 할 것 아닌가. 어쨌거나 지난 대통령선거 때 들은 ‘소녀가장’이란 말만큼 우습다.
말이 공연히 길어졌다. 내가 갈 길은 ‘우리말 바로쓰기’이고, ‘기초생활수급자’니 ‘차상위계층’ 같은 말이 못마땅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사회적 배려 대상자 가운데 형편이 아주 어려운 사람들을 ‘국민기초생활수급자’라고 하고, 그보다 형편이 조금 나은 사람들은 ‘차상위계층’이라고 한다. 어느 쪽이든 아프고 힘든 사람, 어렵고 가난하여 우리 모두가 관심을 두고 기운 내어 함께 살자고 손을 내밀어야 할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나는 솔직히 이 말들이 너무 어렵다.
‘기초생활수급자’ 또는 ‘기초생활수급권자’에서 ‘수급’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내 깜냥으로 금방 알 수 없어 우리말 사전에서 펼쳐보니 다음과 같이 풀어놓았다.
수급1(收給) 「명사」 수입과 지급을 아울러 이르는 말.
수급2(受給) 「명사」 ①급여, 연금, 배급 따위를 받음. ② 받고 줌.
수급3(首級) 「명사」 ① 전쟁에서 베어 얻은 적군의 머리. ② 으뜸가는 급(級).
수급4(需給) 「명사」 수요와 공급을 아울러 이르는 말.
세 번째 뜻쯤 되겠다. 그러니 ‘수급대상자’는 ‘급여, 연금, 배급 따위를 받아야할 사람’쯤 되나. 그러면 차상위계층은 어떤가. 법으로는 최저생계비의 120퍼센트 이하인 사람을 말하고, 다른 말로는 ‘잠재적 빈곤층’이라고 한다. ‘층’이라는 말로 가르는 것도 못마땅하지만 나는 ‘차상위’란 한자말이 더 못마땅하다. 뜻대로라면 ‘(기초생활수급자보다) 좀 형편이 나은’ 또는 ‘언제든 기초생활수급자로 떨어질 수 있는’이라는 계층이라는 뜻으로 쓴 말일텐데, ‘차상위계층’ 하면 ‘차하위계층’ 같은 말이 모르긴 해도 또 있을 것만 같다.
우리 교실 이야기 하나. 하루는 우리 교실 한 아이가 저보고 누가 ‘차상위계층’이라고 하는데 그게 뭐냐고 묻는다. 얼른 뭐라고 대답할지 모르겠다. 못 들은 척 해볼까 잠깐 머뭇댔다. 그러자 백일장 같은 데서 상 줄 때 ‘장원, 차상, 차하, 참방’ 하니까 ‘두 번째로 잘 사는 계층’이라는 뜻 아니냐고 한다.
실은 ‘기초생활수급자’니 ‘차상위계층’이니 하는 말은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을 따라 쓰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이 말이 가리키는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겠다. ‘가난뱅이’란 말이 낮잡아 하는 말 같아서 쓴 말인데 어려운 한자말로 적으면 그 가난이 덜해질까? 이런 알쏭달쏭한 말 말고 누구라도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면 얼마나 좋겠나.
말이든 글이든 말하고 쓰는 사람 자리가 아니라 듣고 읽는 사람 처지를 헤아려 해야 한다. 혼자 생각이지만 조금 상상력을 발휘해서 ≪몽실 언니≫에 나오는 ‘몽실이’나 ‘난남이’ 같은 동화 속 인물 이름을 따오는 건 어떨까. 형편이 어려우면 ‘몽실이, 몽실가정’, 그보다 더욱 어려운 이들은 ‘난남이, 난남이가정’ 같은 말은 안 될까? 히, 이 말이 더 어렵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