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들의 사랑을 받고 사는 민둥산
문희봉
산 중에서도 평준화를 고집하는 산이 있었다. 나보다 키가 큰 이웃은 함께 할 수 없다는 선전포고라도 내렸는가? 외국에 나갔을 땐가 우리나라 산들과 같이 키가 큰 나무들을 볼 수 없었다. 사막지대는 모두가 그랬다. 토양이 나무를 키울 수 있는 젖과 꿀 같은 영양분을 간직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엊그제는 강원도 정선군에 위치한 민둥산에 다녀왔다. ‘민둥산’ 하면 우선 떠오르는 것이 벌거숭이라는 느낌이다. 그런데 벌거숭이가 아니었다. 억새보다 키가 큰 식물들은 자진해서 이곳에 뿌리를 내리지 않아 붙여진 이름이란다. 통나무로 만든 철책으로 울타리를 해놓아 목장길을 걷는 느낌을 받았다. 세상 모르고 자란 억새들을 만나니 그들과 키재기를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들려주는 설교보다 간절한 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한줄기 갈빛 바람을 벗하며 억새들이 여자로 변하여 이제 아줌마의 나이쯤 되어 아름다운 향을 풍기면서 멋진 정경을 연출해 주었다.
가을의 중심을 향해 달려가는 억새들의 갈색빛이 무척 원숙함을 느끼게 했다. 태풍이 오기 전에 둥지를 찾던 작은 새들에게 기꺼이 보금자리를 내주었던 억새밭이다. 정상에 오르니 사방이 훤히 트여 보였다. 정상에 올라 나를 생각하고, 상대를 생각하고, 우리를 생각해 보았다. 이 세상은 모두가 함께 하는 곳이다. 산은 미움과 질투가 살지 않는 곳이다. 무한한 사랑만이, 베풂만이 함께 하는 곳이다. 아픈 사람 다독여주고, 배고픈 사람에게 넉넉한 식량까지 제공해준다. 누구 하나 찡그린 얼굴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산이 다가와 안겨주는 기쁨보다 내가 찾아가 안기는 희열이 더 크다는 것을 오늘 다시금 느꼈다.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평화로운 모습으로 이웃 간의 대화 소리가 들릴 듯한 그런 정겨운 마을들이 눈에 들어왔다. 붉고 푸른 지붕색깔들이 주위의 단풍들과 조화를 잘 이루어내고 있었다. 산은 원하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빈손으로 보내지 않는다. 수만 악기의 질 고운 하모니까지 선물로 준다.
민둥산에 대해 과학적인 설명까지는 하지 않으련다. 참억새들이 사는 마을에 도토리, 상수리나무가 지천이고, 소나무, 전나무들이 지천이라면 억새들이 이 가을에 이런 장관을 연출할 수 있을까? 그 크고 푸른 잎을 가진 상록수들이 자진하여 억새들의 마을을 점령하지 않은 것이다.
가진 자, 힘 있는 자들이 그들의 기득권을 포기하고 나보다 못한(?) 자들에게도 행복추구권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흡족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사철 푸르른 상록수들이 베풀 수 있는 최소한의 배려이겠다.
그곳이 아니더라도 여름이면 상쾌한 나무그늘을 주고, 가을이면 잘 익은 열매로 베풀 수 있는데 굳이 억새들의 삶을 방해하고 싶었겠는가? 마음을 잘 먹으면 북두칠성이 굽어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그들이다. 그들의 수관(樹冠)에는 옥색의 새벽빛이 선녀의 치맛자락처럼 향기로울 것이다.
토끼마을에 살쾡이나 호랑이들이 침입했다고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토끼들이 평화롭게 살아가도록 큰 동물들이 자리를 비켜주는 배려를 베푼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정경인가? 큰 사람의 덕은 보아도 큰 나무의 덕은 보지 못한다고 했다. 그들도 그런 상식쯤은 학창시절에 배워 익힌 모양이다.
지금까지 많은 산을 다녀보지는 못했지만 정상에서 이런 아름다움을 연출해준 산도 그리 많지 않았다. 반가운 얼굴로 한달음에 달려와 다정하게 악수 청하던 민둥산이 하직인사를 하려 할 때에는 표정이 어두워진다. 그도 감정을 소유하고 있는 인격체이던가? 그래서 내가 달래주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가라고, 힘 없고 가진 것 적고, 덩치도 작은 당신들은 하늘에서 내려 보낸 천사 이상이라고.
민둥산은 그 자체가 예술이요 불후의 명작만을 간직한 산이었다. 그런 명산을 땀을 뻘뻘 흘리고 급한 심장 박동과 친구하면서 세 시간여의 시간을 소요해서 넘었다는 자부심이 나를 기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