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작품의 근원
- 어떤 것의 근원은 그것의 본질이 유래하는 곳이다. 예술작품의 근원에 대한 물음은 예술작품의 본질유래에 대해 묻는다.
- 예술가는 작품의 근원이다. 작품은 예술가의 근원이다. 하나가 다른 하나 없이는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예술가와 작품은 예술에 의해 존재한다. 예술은 예술-작품 속에 현성하고 있다. 예술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작품에서부터 끄집어 내어질 수 있어야 한다. 작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오직 예술의 본질에서부터만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작품에서 예술로, 예술에서 작품으로 향하는 발걸음 뿐 아니라, 우리가 시도하는 모든 각각의 발걸음들이 이러한 원 안에서 순환한다.
- 작품들은 다른 사물들과 다를 바 없이 자연스럽게 눈앞에 있다. 모든 작품들은 사물적 차원을 지니고 있다. 예술작품이란 일종의 제작된 사물인데, 그러나 이것은 순전한 사물 자체와는 또 다른 어떤 것, 즉 알로 아고레우에이를 말한다. 작품은 다른 것을 드러낸다. 작품은 비유(Allegorie)) 알레고리의 본래 뜻은 "다른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이었다. 여기서는 예술 작품이 사물적 측면에 근거하여 그와는 다른 어떤 것, 예술적 측면을 말하면서 공개적으로 알리고 개시함을 의미한다.
이다. 제작된 사물과 함께 또 다른 어떤 것이 예술작품 속에서 한데로 데려와진다. 한데로 데려온다 함(함께 가져옴)은 그리스어로 심발레인이라 일컫는다. 작품은 상징(Symbol)이다. 비유와 상징은 예술작품의 식별을 위한 시각이 오랫동안 움직여온 그 궤도의 윤곽표상을 보여준다. 하지만 다른쪽을 함께 한데로 데려오는 이러한 한쪽, 그것은 작품 속에서의 사물적 차원이다.
- 우리는 예술작품의 직접적이고 온전한 현실성을 적중시키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오직 그렇게 해서만 우리는 작품 속에서 현실적인 예술을 또한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작품의 사물적 차원을 시야에 데려와야 한다.
<사물과 작품>
● 사물
- 넓은 의미에서의 사물 : 존재하는 일체의 존재자를 철학 언어에서는 하나의 사물이이라고 일컫는다. 무가 아닌 각각의 모든 것을 지칭한다. 예술작품 또한, 그것이 존재하는 어떤 것인 한, 하나의 사물이다.
- 좁은 의미에서의 사물(순전한 ) 순전한 사물 : 단순히 사물일 뿐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닌 그런 순수한 사물. 또는 거의 경멸적이나 다름없는 의미에서 겨우 사물인 것. 심지어 사용사물까지도 배제된 본래적 사물.
사물) : 돌, 흙덩이, 나무토막. 즉, 생명이 없는 자연사물과 사용사물.
● 사물의 사물성에 대한 세 가지 해석
1. 사물은 속성을 지니고 있다.
- 사물은 그 둘레에 속성들이 모여 있는 것이다. 사물의 핵심은 그리스어로 토 히포케이메논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핵심적 차원은 그리스인들에게는 "밑바탕에 그리고 항상 이미 눈앞에 놓여있는 것"이었다. 특성들은 타 심베베코타라 일컬어지는데, "그때그때마다 눈앞에 놓여 있는 것에 항상 이미 붙어서 거기서 함께 나타나오는 바 그것"이다.) 사물 자체는 속성들의 총합으로서 여겨지기 보다는 오히려, 여러 속성들 및 이 속성들의 변화의 밑바탕에 놓여있는 사물의 핵심으로서-여러 속성들과 그것들의 변화를 지탱하고 떠받치고 있는 사물의 핵으로서-여겨진다.
- 이러한 특성들의 담지자로서의 사물은 그 익숙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자연적이지는 못 하다. 그것은 오랜 습성에 의해 길들여진 것일 뿐이다. 익숙한 사물해석에 대한 확고한 기대는 그저 피상적으로만 근거제시되어 있을 뿐이다. 즉 이러한 사물 개념은 사물의 사물적 차원을, 즉 "자생적인 것"과 "자기 안에 머무르는 것"을 적중시키고 있지 못 하다. 오히려 사물을 파악하는게 아니라 그것을 덮친다.
2. 사물은 감관 속으로 주어진 것의 한 다양성의 통일이다. (감각적 다양성의 통합체)
- 사물이 자기의 사물적 차원을 직접적으로 내보일 수 있도록 사물에게 하나의 자유로운 장(Feld)을 보장해 주고 매개없이 사물과 만나면 사물들은 우리의 신체에 다가온다. 사물이란 아이스테톤이다. 그것은 감각들을 통해 감성의 감관 속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 그러나 일체의 감각들보다는 사물들 자체가 우리에게는 훨씬 더 가깝다. 순수한 소음을 듣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사물들로부터 떨어져서 소리를 들어야 한다. 즉 귀를 사물들로부터 떼내어, 추상해서 들어야 하는 것이다. 사물에 대한 첫 번째 해석이 사물을 우리의 신체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Em려놓는 반면에, 사물에 대한 두 번째 해석은 사물을 우리의 신체에 너무 가깝게 밀착시킨다. 이 두 해석들에서 사물은 사라져 버린다. 사물 자체는 그것의 "자기 안에 머무름"에 있어 그대로 놔두어져야 한다.
3. 사물은 형상지어진 질료이다.
- 한 사물의 지속적인 것, 즉 안정성은 한 질료가 한 형상과 결속하고 있다는 사실에 정립한다. 작품에 있어서 사물적 측면이란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질료이다. 질료란 예술가가 형상을 부여하기 위한 밑받침이며 장(Feld)이다.
- 형식이란 질료의 요소들이 공간적으로 분배 배치되어 그 결과로서 어떤 특정한 윤곽을 갖게 된 것을 말한다. 그러나 항아리, 도끼, 구두의 경우 거꾸로 형식이 질료의 배치와 종류와 선택까지도 미리 규정한다. 또 질료와 형식의 연결은 항아리, 도끼, 구두가 쓰이는 용도성에 의해서도 미리 조정된다.
- 용도성의 문제 : 어떤 근본 요강(要綱)을 말하는데, 존재자는 바로 그것으로 인해 비로소 우리의 눈에 띄어 현존하게 되고 그리하여 그와 같은 존재자가 되는 것이다. 어떤 형식화 작업도 또 그와 더불어 일어나는 어떤 소재 선택도 바로 이런 용도성에 그 근거를 가진다. 제작된 산물은 반드시 어떤 용도를 위한 도구이다. 그 점에서 존재자의 규정틀로서의 질료와 형상은 근본적으로는 도구의 본질 속에서만 자신의 본령을 갖는다.
- 도구는 사물과 작품 사이에 독특한 중간 위치를 갖는다. 대체로 우리와 가장 가까운 본래적 사물들은 우리 둘레에 있는 사용물들인 도구들이다. 이들은 사물성에 의해 규정되는 측면을 갖기에 반쯤은 사물이면서 또 사물 이상의 그 무엇이다. 동시에 도구는 제작된 측면을 갖기에 반쯤은 예술 작품이기도 하면서 또한 예술 작품이 갖는 자족성을 결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술 작품보다 무언가 결핍된 것이다. 따라서 도구가 단순 사물과 작품 사이에서 독특한 중간 위치를 갖는다고 한다면, 이러한 도구 존재의 도움을 빌어, 비도구적 존재자인 단순 사물과 예술 작품, 또 궁극적으로는 모든 존재자를 파악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 그러나 사실 우리가 본래적 사물을 단순한 사물이라고 불렀을 때부터 사태는 이미 어긋나기 시작했다. "단순한"이란 말은 용도성과 제작성의 결핍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단순한 사물은 도구로부터 용도성과 제작성이라는 도구 존재가 벗겨져 있는 상태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도구의 일종일 수 있다. 그렇다면 사물 존재는 도구에서 도구적 측면을 제거하고 남는 것 가운데 성립한다. 그러나 이 나머지 부분이라는 것이 특별히 그 자신의 존재 성격 가운데서 규정되지 않을뿐더러, 또 사물의 사물적 측면이라는 것이 과연 도구로부터 도구적 측면을 제거해가는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도 의심스럽다. 이렇게 해서 세번째의 사물 해석 방식도 사물에 대한 덮침임이 밝혀진다.
● 도구의 도구다움 탐구
예술 작품의 근원
- 어떤 것의 근원은 그것의 본질이 유래하는 곳이다. 예술작품의 근원에 대한 물음은 예술작품의 본질유래에 대해 묻는다.
- 예술가는 작품의 근원이다. 작품은 예술가의 근원이다. 하나가 다른 하나 없이는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예술가와 작품은 예술에 의해 존재한다. 예술은 예술-작품 속에 현성하고 있다. 예술이 무엇인가 하는 것은 작품에서부터 끄집어 내어질 수 있어야 한다. 작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는 오직 예술의 본질에서부터만 경험할 수 있을 뿐이다. 작품에서 예술로, 예술에서 작품으로 향하는 발걸음 뿐 아니라, 우리가 시도하는 모든 각각의 발걸음들이 이러한 원 안에서 순환한다.
- 작품들은 다른 사물들과 다를 바 없이 자연스럽게 눈앞에 있다. 모든 작품들은 사물적 차원을 지니고 있다. 예술작품이란 일종의 제작된 사물인데, 그러나 이것은 순전한 사물 자체와는 또 다른 어떤 것, 즉 알로 아고레우에이를 말한다. 작품은 다른 것을 드러낸다. 작품은 비유(Allegorie)이다. 제작된 사물과 함께 또 다른 어떤 것이 예술작품 속에서 한데로 데려와진다. 한데로 데려온다 함(함께 가져옴)은 그리스어로 심발레인이라 일컫는다. 작품은 상징(Symbol)이다. 비유와 상징은 예술작품의 식별을 위한 시각이 오랫동안 움직여온 그 궤도의 윤곽표상을 보여준다. 하지만 다른쪽을 함께 한데로 데려오는 이러한 한쪽, 그것은 작품 속에서의 사물적 차원이다.
- 우리는 예술작품의 직접적이고 온전한 현실성을 적중시키기를 원한다. 왜냐하면 오직 그렇게 해서만 우리는 작품 속에서 현실적인 예술을 또한 발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작품의 사물적 차원을 시야에 데려와야 한다.
<사물과 작품>
● 사물
- 넓은 의미에서의 사물 : 존재하는 일체의 존재자를 철학 언어에서는 하나의 사물이이라고 일컫는다. 무가 아닌 각각의 모든 것을 지칭한다. 예술작품 또한, 그것이 존재하는 어떤 것인 한, 하나의 사물이다.
- 좁은 의미에서의 사물(순전한 사물) : 돌, 흙덩이, 나무토막. 즉, 생명이 없는 자연사물과 사용사물.
● 사물의 사물성에 대한 세 가지 해석
1. 사물은 속성을 지니고 있다.
- 사물은 그 둘레에 속성들이 모여 있는 것이다. 사물의 핵심은 그리스어로 토 히포케이메논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핵심적 차원은 그리스인들에게는 "밑바탕에 그리고 항상 이미 눈앞에 놓여있는 것"이었다. 특성들은 타 심베베코타라 일컬어지는데, "그때그때마다 눈앞에 놓여 있는 것에 항상 이미 붙어서 거기서 함께 나타나오는 바 그것"이다.
- 이러한 특성들의 담지자로서의 사물은 그 익숙함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자연적이지는 못 하다. 그것은 오랜 습성에 의해 길들여진 것일 뿐이다. 익숙한 사물해석에 대한 확고한 기대는 그저 피상적으로만 근거제시되어 있을 뿐이다. 즉 이러한 사물 개념은 사물의 사물적 차원을, 즉 "자생적인 것"과 "자기 안에 머무르는 것"을 적중시키고 있지 못 하다. 오히려 사물을 파악하는게 아니라 그것을 덮친다.
2. 사물은 감관 속으로 주어진 것의 한 다양성의 통일이다. (감각적 다양성의 통합체)
- 사물이 자기의 사물적 차원을 직접적으로 내보일 수 있도록 사물에게 하나의 자유로운 장(Feld)을 보장해 주고 매개없이 사물과 만나면 사물들은 우리의 신체에 다가온다. 사물이란 아이스테톤이다. 그것은 감각들을 통해 감성의 감관 속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다.
- 그러나 일체의 감각들보다는 사물들 자체가 우리에게는 훨씬 더 가깝다. 순수한 소음을 듣기 위해서라면 우리는 사물들로부터 떨어져서 소리를 들어야 한다. 즉 귀를 사물들로부터 떼내어, 추상해서 들어야 하는 것이다. 사물에 대한 첫 번째 해석이 사물을 우리의 신체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Em려놓는 반면에, 사물에 대한 두 번째 해석은 사물을 우리의 신체에 너무 가깝게 밀착시킨다. 이 두 해석들에서 사물은 사라져 버린다. 사물 자체는 그것의 "자기 안에 머무름"에 있어 그대로 놔두어져야 한다.
3. 사물은 형상지어진 질료이다.
- 한 사물의 지속적인 것, 즉 안정성은 한 질료가 한 형상과 결속하고 있다는 사실에 정립한다. 작품에 있어서 사물적 측면이란 작품을 구성하고 있는 질료이다. 질료란 예술가가 형상을 부여하기 위한 밑받침이며 장(Feld)이다.
- 형식이란 질료의 요소들이 공간적으로 분배 배치되어 그 결과로서 어떤 특정한 윤곽을 갖게 된 것을 말한다. 그러나 항아리, 도끼, 구두의 경우 거꾸로 형식이 질료의 배치와 종류와 선택까지도 미리 규정한다. 또 질료와 형식의 연결은 항아리, 도끼, 구두가 쓰이는 용도성에 의해서도 미리 조정된다.
- 용도성의 문제 : 어떤 근본 요강(要綱)을 말하는데, 존재자는 바로 그것으로 인해 비로소 우리의 눈에 띄어 현존하게 되고 그리하여 그와 같은 존재자가 되는 것이다. 어떤 형식화 작업도 또 그와 더불어 일어나는 어떤 소재 선택도 바로 이런 용도성에 그 근거를 가진다. 제작된 산물은 반드시 어떤 용도를 위한 도구이다. 그 점에서 존재자의 규정틀로서의 질료와 형상은 근본적으로는 도구의 본질 속에서만 자신의 본령을 갖는다.
- 도구는 사물과 작품 사이에 독특한 중간 위치를 갖는다. 대체로 우리와 가장 가까운 본래적 사물들은 우리 둘레에 있는 사용물들인 도구들이다. 이들은 사물성에 의해 규정되는 측면을 갖기에 반쯤은 사물이면서 또 사물 이상의 그 무엇이다. 동시에 도구는 제작된 측면을 갖기에 반쯤은 예술 작품이기도 하면서 또한 예술 작품이 갖는 자족성을 결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술 작품보다 무언가 결핍된 것이다. 따라서 도구가 단순 사물과 작품 사이에서 독특한 중간 위치를 갖는다고 한다면, 이러한 도구 존재의 도움을 빌어, 비도구적 존재자인 단순 사물과 예술 작품, 또 궁극적으로는 모든 존재자를 파악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갖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 그러나 사실 우리가 본래적 사물을 단순한 사물이라고 불렀을 때부터 사태는 이미 어긋나기 시작했다. "단순한"이란 말은 용도성과 제작성의 결핍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단순한 사물은 도구로부터 용도성과 제작성이라는 도구 존재가 벗겨져 있는 상태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도구의 일종일 수 있다. 그렇다면 사물 존재는 도구에서 도구적 측면을 제거하고 남는 것 가운데 성립한다. 그러나 이 나머지 부분이라는 것이 특별히 그 자신의 존재 성격 가운데서 규정되지 않을뿐더러, 또 사물의 사물적 측면이라는 것이 과연 도구로부터 도구적 측면을 제거해가는 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도 의심스럽다. 이렇게 해서 세번째의 사물 해석 방식도 사물에 대한 덮침임이 밝혀진다.
● 도구의 도구다움 탐구
고흐의 이 그림은 구두라는 도구 밖으로 드러난, 내부의 어두운 틈으로부터 들일을 하러 나선 이의 고통이 응시하고 있으며, 구두라는 도구의 실팍한 무게 가운데는 거친 바람이 부는 넓게 펼쳐진 평탄한 밭고랑을 천천히 걷는 강인함이 쌓여 있고, 구두 가죽 위에는 대지의 습기와 풍요함이 깃들어 있다. 구두창 아래에는 해 저문 들녘 들길의 고독이 저며들어 있고, 이 구두라는 도구 가운데는 대지의 소리 없는 부름이, 또 대지의 조용한 선물인 다 익은 곡식의 부름이, 겨울 들판의 황량한 휴한지 가운데서 일렁이는 해명할 수 없는 대지의 거부가 떨고 있다. 이 구두라는 도구에 스며들어 있는 것은, 빵의 확보를 위한 불평 없는 근심, 다시 고난을 극복한 뒤의 말 없는 기쁨, 임박한 아기의 출산에 대한 조바심, 그리고 죽음의 위협 앞에서의 전율이다. 이 구두라는 도구는 대지에 귀속해 있으며 촌아낙네의 세계 가운데서 보존되고 있다. 이같은 보존된 귀속에서 바로 도구 자체의 자기 안식이 생긴다.
물론 도구의 도구 존재는 그 용도성에 있다. 하지만 이 용도성 자체는 도구의 본질적 존재의 충만함, 즉 세계와 대지에의 보존된 귀속성 가운데 깃들어 있다. 우리는 도구의 이러한 본질적 존재를 -세계와 대지에의- 신뢰성이라 부르고자 한다. 세계와 대지는 단지 거기에, 즉 도구 가운데 그와 같이 존재한다.
● 신뢰성
- 도구의 도구 존재, 즉 신뢰성은 모든 사물을 각자의 방식과 넓이에 따라 자신 가운데로 모아 놓는다. 도구의 용도성은 본질적으로는 오직 신뢰성의 결과일 뿐이다. 용도성은 신뢰성 가운데서만 움직이며, 신뢰성이 없으면 용도성도 없게 된다. 도구 존재의 황폐화는 곧 신뢰성의 소멸이다. 일단 신뢰성이 소멸하고 나면 진부한 일상성만이 도구의 유일하며 고유한 존재 양식인 양 다가온다. 이제는 다만 적나라한 용도성만이 눈에 띌 뿐이다.
- 도구의 도구 존재는 단지 고흐의 그림 앞에 섬으로써 밝혀졌다. 작품 가까이에 있을 때 우리는 돌연 일상적으로 있던 곳과는 전혀 다른 곳에 있게 된다. 고흐의 작품은 구두라는 도구가 무엇인가를 보다 잘 시각화하기 위한 용도로 만들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작품을 통해서 비로소(erst) 그리고 오직(nur) 작품 가운데서만 구두라는 도구의 도구 존재가 두드러지게 드러났을 뿐이다.
● 진리의-작품-속으로의-자기-정립
- 고흐의 그림은 한 켤레의 촌아낙네의 구두가 진실로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를 개시(開示, 열어보임)하고 있다. 즉 구두라는 존재자가 자신의 존재, 곧 숨어있지 않음(비은폐성) 가운데로 나타난 것이다. 만일 작품에서 존재자가 무엇이며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에 관한 개시가 일어나고 있다면, 이것은 곧 작품 가운데서 진리가 일어남을 의미한다.
- 예술 작품에서는 존재자의 진리가 자신을 작품 속으로 정립하고 있다. 정립(Setzen)이란 이 경우 서 있음에로 가져옴(데려옴)을 말 한다. 하나의 존재자, 즉 한 켤레의 촌아낙네의 구두가 작품 가운데서 자신의 존재의 밝음 속에 서 있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존재자의 존재가 자신의 지속적인 반짝임 속에 나선 것이다.
- 그렇다면 예술의 본질은 존재자의 진리의-작품-속으로의-자기 정립(존재자의 진리가 스스로를 작품 속으로 정립함)이라 할 수 있다. 이제까지 예술은 대개 미적인 것이나 미와의 관계 속에서만 고찰되었을 뿐, 진리와의 관계 속에서는 고찰되지 않았다.
- 단적으로 말하자면 우리가 작품의 현실성을 사물적 토대로 추정했던 것은 잘못이었다. 작품의 사물적 현실성을 규정하는 길은, 사물을 통해 작품에 이르는 길이 아니라 거꾸로 작품을 통해 사물에 이르는 길이어야 할 것이다.
- 보다 중요한 것은 존재자의 존재에 관해 사색하게 될 때, 비로소 작품의 작품다움, 도구의 도구다움, 사물의 사물다움에 더욱 가까워진다.
<작품과 진리>
- 작품이 속했던 세계로부터의 분리와 작품이 속했던 세계의 붕괴는 다시 복구될 수 없다. 작품들은 더 이상 예전의 것들이 아니다.
- 작품은 어디에 귀속되는가? 작품은 작품으로 있는 한, 오로지 그 자체에 의해 개시된 영역에 귀속한다.
- 건축 작품, 예를 들어 그리스의 신전은 아무런 대상도 모사하고 있지 않다. 그것은 수많은 틈이 떡 벌어져 있는 바위 계곡 가운데 서있을 뿐이다. 신전 작품은, 그 안에서 탄생과 죽음, 저주와 축복, 승리와 굴욕, 존속과 쇠망이 인간 존재에게서 그의 액운의 형태를 얻어내는 그런 저 궤도들과 연관들의 통일을 비로소 짜맞추면서 동시에 자기 주위로 모은다. 이렇게 열린 연관들이 전개되면서 확장된 범위가 곧 역사적 민족의 세계이다. 그러한 세계에서부터 그리고 그 세계 속에서 그 역사적 민족이 비로소 자신의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자기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
- 신전은 그곳에 그렇게 선 채 바위 위에서 안식한다. 신전은 보이지 않던 대기의 공간을 보이도록 하고, 신전이 거기 있음으로써 나무와 풀들, 독수리와 황소, 뱀과 귀뚜라미가 비로소 그들의 선명한 모습으로 나타나면서 자신들의 참모습을 드러낸다. 이러한 출현(솟아나옴)과 발현(피어오름) 자체 또는 그 전체를 그리스인들은 퓌시스라 불렀다. 이 퓌시스는 인간이 자신의 거주를 그 위에 또 그 가운데 마련하는 터를 밝혀준다. 이것을 대지라 한다.
- 작품을 진열해서 세우는 것은 건축 작품을 세우거나 입상을 세우거나 축제에 비극을 내세워 상연한다는 의미의 내세움(건립)과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즉 봉헌과 찬양이라는 의미의 내세움이다. 봉헌은 성스럽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 즉 작품의 내세움 속에서 성스러운 것이 성스러운 것으로서 개시되고 신이 자신의 현존의 열려짐 가운데로 불려진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작품 존재의 두 가지 본질적 성격
1. 한 세계를 열어세움(aufstellen)
- 작품 자신이 그 작품 존재에 있어서 무언가를 내세우고 있다. 작품은 자신 가운데 우뚝 서서 세계를 열고 이 세계를 압도적인 존립으로 머물게 한다. 작품 존재, 즉 작품이 작품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한 세계를 열어세움(건립)을 말한다.
- 세계는 우리 역사의 어떤 본질적인 결정들이 내려져 그것이 우리에 의해 받아들여지기도, 버려지기도, 오해되기도 또 다시 물어지기도 하는 거기서 세계화한다.
- 작품은 작품으로서 존재하면서 공간들을 공간화한다. 공간화라는 말은 열려진 터의 자유로움을 거리낌없이 주면서 또한 이 자유로움을 그것의 고유한 틀 가운데로 조직하고 정돈한다는 뜻이다. 이때 조직하고 정돈함의 참뜻은 봉헌적, 찬양적 내세움에 있다. 작품은 작품으로 존재하면서 하나의 세계를 열어 세운다. 그러면서 작품은 세계의 열림이 끊이지 않도록 지속시킨다.
2. 대지를 불러세움(herstellen: 이쪽으로 세움)
- 작품은 숨는 대지 자체를 세계의 열려진 터 가운데로 밀어 넣으면서 또한 그곳에서 대지를 보존한다. 작품은 대지를 하나의 대지이게 한다.
- 대지가 열리고 밝혀지는 것은 오직 대지가 본질적으로 강압적인 해명을 거부하는 것으로 경험되고 보존될 때 뿐이다. 대지는 위와 같은 모든 해명으로부터 스스로를 끊임없이 폐쇄한다. 그러나 대지의 사물들 자체는 전체적으로 서로 공명하는 화합 가운데로 흘러간다. 따라서 대지를 불러 세운다는 것은 대지를 자기 폐쇄적인 그 자체 그대로 열린 터 가운데로 가져온다는 것이다.
- 대지를 불러세움은 작품 자신이 스스로 대지 가운데로 되돌아감으로써 이루어진다.
● 세계와 대지의 투쟁, 작품 존재의 통일성
- 세계란 역사적 민족의 운명 가운데서, 단순하고 본질적인 결정들이 이루는 광활한 궤적들이 스스로 열어놓는 개시성을 말한다. 반면 대지는 끊임없이 자기를 폐쇄하면서 그런 가운데 자신을 감추어 간직하는 것으로서 그 스스로를 외부로 내밀어 보이지 않는다. 세계와 대지는 본질적으로 서로 다르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 세계는 대지 위에 근거하고, 대지는 세계에 두루 걸쳐 우뚝 솟아있다.
- 세계와 대지의 대립은 투쟁을 이룬다. 이러한 본질적 투쟁에서는 투쟁하는 것들이 그들 본질의 자기 주장 속에서 상대를 고양시킨다.
- 작품은 세계를 열어 세우고 대지를 불러 세우면서 이러한 투쟁을 선동한다. 작품의 작품 존재는 세계와 대지 사이의 투쟁을 투쟁화하는데 있다. 그리고 이 투쟁이 최고도에 달하게 되는 것은 단순한 내면성 가운데서며, 그 속에서 작품의 통일성이 일어난다.
- 투쟁의 내면성 속에 자신 가운데 안식하는 작품의 고요함의 본질이 놓여있다.
● 진리의 뜻과 발생 과정
- 진리는 참된 것의 본질이라는 의미이다. 그리스어 알레테이아는 존재자의 숨어있지 않음(비은폐성)-그래서 드러남-의 뜻이었다.
- 진리는 오늘날 인식과 사실의 일치를 의미한다. 명제가 참이 될 수 있을 때는, 참된 것을 똑바로 향할 때이다. 그래서 명제의 진리는 언제나 -일치의-똑바름(올바름)을 의미하게 되었다.
- 사물, 인간, 동물, 식물, 도구, 작품 등은 존재한다. 존재하는 것, 즉 존재자는 존재 가운데 있다.
존재자 너머로, 그러나 존재자로부터 벗어나서가 아닌 오히려 존재자 앞에서부터 어떤 다른 것이 또 발생한다. 전체로서의 존재자 한복판에서 하나의 열린 자리가 현성한다. 일종의 밝힘(Lichtung:밝음)이 존재한다. 그 밝힘은 존재자보다 더 존재적이다. 이러한 열린 한가운데는 존재자에 의해 에워싸여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無처럼, 밝히는 중심 자체가 모든 존재하는 것을 휘감고 있다. 존재자는 이 밝힘이 밝혀준 곳에 들어서고 그곳에서 나갈 때에만 존재자 그것으로 있을 수 있다.
- 우리가 접하고 함께 만나는 개개의 존재자는 만남과 동시에 언제나 숨겨짐으로 되돌아 간다. 존재자가 들어서는 밝힘은 그 자체가 숨김이다. 이 숨김은 존재자들 가운데서 다음의 두 가지 방식으로 지배한다. 첫째, 거부로서의 숨김이다. 둘째, 위장으로서의 숨김이다.
- 숨어있지 않음으로서의 진리의 본질에는 이중적인 방식의 숨김 곧 거절이 속한다. 진리는 그 본질에 있어 비진리이다.
- 이러한 숨김-거절-과 함께 진리의 본질 가운데서 지적되어야 할 것은, 진리의 본질에 담겨 있는 밝힘과 숨김 사이의 근원적 투쟁으로서의 대립이다. 바로 이 근원 투쟁에서 열려진 중심이 쟁취되며 이 중심 가운데로 뭇존재자들이 들어서기도, 또한 그곳으로부터 나와 자신에게로 되돌아가기도 하는 것이다.
- 진리가 일어나는 드문 방식 중의 하나가 작품의 작품 존재다. 작품은 세계를 열고 대지를 불러세우면서 그 둘 사이의 투쟁을 투쟁화한다. 그리고 이 투쟁 가운데서 뭇존재자의 숨어있지 않음 (비은폐성), 즉 진리가 쟁취된다.
- 자기 스스로를 숨기는 존재는 바로 그런 방식으로 자신을 밝히는 것이다. 작품 가운데 안배된 이같은 반짝임이 곧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은 숨어있지 않음으로서의 진리가 일어나는 한 방식이다.
<진리와 예술>
- 우리는 작품을 어떤 작업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받아들일 때 작품에 가장 가까이 있게 된다. 작품의 작품적 측면은 그것이 예술가에 의해 창작되었다는 사실 속에 있다.
- 우리는 창작 행위를 산출 행위로 생각한다. 그렇다면 창작으로서의 산출 행위는 제작이란 방식의 산출 행위와 어떻게 구분되는가? 그리스인들도 수공 행위와 예술 행위를 동일하게 테크네라는 말로 불렀고, 수공인과 예술가를 동일하게 테크니테스로 지칭했다. … 그들에게 있어 테크네는 앎의 한 양식을 지칭했다. 이 경우 앎이란 이미 보았음을 뜻하는데, 이때의 봄(Sehen)은 현존하는 것을 그것 자체로 받아들임이란 의미에서 생각되어야 한다. 그리스적 사유에 있어 앎의 본질은 알레테이아, 다시 말해 존재자를 그 숨겨져 있음으로부터 들추어냄에 있었고, 그 들추어냄이 곧 존재자와의 모든 태도를 이끌고 지탱해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경험된 앎으로서의 테크네는 결코 어떤 제작 행위가 아닌 현존하는 것 자체를 그것의 숨겨져 있음으로부터 그 모습의 숨어 있지 않음가운데로 이끌어 온다는 의미였고, 그런 의미에서 존재자의 산출 행위였다. …예술이 테크네로 불려졌다는 사실이 예술가의 행위가 수공적인 행위에 의거해서 경험될 수 있음을 증언해 주는 것은 아니다.
- 창작의 본질은 작품의 본질에 의해 규정된다.
- 작품 가운데 작품에 즉해서 진리가 일어난다. 이미 획득된 작품의 이같은 본질 규정에 입각해서 우리는 우선 창작행위를 산출되는 것 가운데로-진리를-현출하게 해줌으로 특징지울 수 있다. 따라서 작품이 작품으로 되어간다는 것은 진리가 되어가고 일어나는 한 방식이다. 모든 것은 진리의 본질 가운데 놓여있다.
- 앞 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진리는 비진리다. 진리는 근원적 투쟁이다. 존재자의 숨어있지 않음이 본질상 어떤 방식으로든 존재 자신에 속하는 것이라면 존재는 자신의 본질로부터 개시성의 유희 공간-존재가 현전하는 밝음터-을 각기 자신의 방식대로 발현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다.
- 진리는 오직 스스로가 펼쳐지는 투쟁과 유희 공간 가운데 자신을 조직하고 정돈함으로써만 일어난다. 개시성의 밝힘과 열려진 터 가운데로의 조직, 정돈은 서로 함께 속한다. 이 둘은 진리의 일어남의 동일한 본질이다. 그런데 진리의 이같은 일어남은 다양한-존재-역사적 방식으로 생겨난다.
- 진리가 자신에 의해 열려진 존재자 속으로 스스로를 조직 정돈해 나가는 하나의 본질적 방식이 진리의 작품-속으로의-자기-정립이다. 진리가 일어나는 다른 하나의 방식은 국가를 세우는 일이다. 진리가 빛나게 되는 또다른 방식은 존재자 가운데 가장 존재다운 곳 가까이에 머무는 것이다. 진리가 정초되는 다른 하나의 방식은 본질적인 희생이다. 그리고 진리가 일어나는 또 다른 하나의 방식은 사유의 물음이다. 이 물음은 존재의 사유로서의 물음이며, 이 물음은 존재를 진정 그 물어야만 할 지점에서 물어가는 그런 물음이다.
- 진리의 본질에는 진리가 진리로 되기 위해 존재자 가운데 스스로를 조직하고 정돈해 간다는 것이 속한다. 그 점에서 진리의 본질에는 작품에로의 경향이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술 작품은 진리가 존재자 한가운데서 존재해 갈 수 있는 탁월한 한 가능성이다.
- 작품 가운데서의 진리의 정돈은 이제까지 없었고 이후에도 없을 그러한 존재자를 산출한다. 산출은 산출되어질 존재자를 열려진 터 가운데로 세워놓아, 이 존재자로 하여금 열려진 터 속에 들어서서 처음으로 그 열린 터의 개방성을 밝혀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산출이 이처럼 특별히 존재자의 개시성으로서의 진리를 가져오는 산출물을 낳을 때 바로 그때의 산출물이 곧 작품이다. 그리고 이러한 산출 행위가 창작이다. 이같은 가져옴으로써의 창작은 숨어 있지 않음과의 관계 가운데 그 숨어 있지 않음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끄집어 내는 것이다.
- 진리는 작품 가운데로 지향하고 그 속에서 스스로를 정돈한다. 진리는 밝힘과 숨김 사이의 투쟁으로서 현존하며 이 투쟁의 열린 터에 세계와 대지의 대립이 속한다. 따라서 작품은 자신 속에 투쟁이라는 것을 그 본질적 성격으로 가져야 한다. 이 투쟁 가운데 세계와 대지의 통일이 쟁취된다. - 세계와 대지의 투쟁은 단순히 틈을 벌려 놓는다는 의미의 균열이 아니라, 투쟁의 당사자들을 그들이 상호 귀속해 있는 내면성으로 가져온다는 의미에서의 균열이다.
- 이처럼 균열로 일어나면서 다시금 대지에게로 되돌려지는 방식으로 확립되는 투쟁이 곧 형태다. 작품의 창작되어 있음이란 진리가 형태 속에 확립되어 있음을 뜻한다. 형태는 균열이 자신을 끼워놓고 안배하는 틀이다. 또한 그렇게 형태 속에 안배된 균열은 진리의 빛남이 새겨 놓은 흔적이다.
- 작품 창작은 형태 속애 진리를 확립하는 방식으로서만 대지를 쓴다. 반면 도구 제작은 진리의 일어남을 일으키는 것과는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다. 도구가 제작되어 있음은 재료가 형식화되어 있음이자 동시에 사용을 위해 준비되어 있음이다. 말하자면 도구의 제작되어 있음은 도구가 자신을 넘어서 용도성 가운데로 소멸되어 감을 말한다. 그러나 작품의 창작되어 있음은 그렇지 않다.
- 도구의 제작되어 있음과 작품의 창작되어 있음은 양자가 모두 산출되어 있음이라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작품의 창작되어 있음은 다른 모든 산출에 비해 특별한 점을 지니는데, 그것은 바로 창작된 것 속에 창작되어 있음 자체가 더불어 함께 만들어져 들어간다는 점이다. 그래서 창작되어 있음이라는 이 측면을 작품 자체가 자신의 중요한 부분으로 갖고 있다는 점이다.
- 작품이 그렇게 존재한다는 충격과 그리고 눈에 띄지 않는 그 충격의 엄연한 현실성이 작품의 지속적 자립성을 형성한다. 어쩌면 예술가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것의 창작 과정과 주변 상황이 어떠했는지 등이 알려지지 않은 채일 때, 작품의 충격, 즉 창작되어 있음이라는 적나라한 사실이 가장 순수하게 작품으로부터 두드러져 나타난다고 할 것이다.
- 이와 반면에, 도구는 용도성이라는 도구 존재 속에서만 그 자신을 드러내게 된다. 제작되어 있다는 사실은 용도성 속에서 사라져 버린다.
● 작품의 보존
- 작품이 그 자신을 진정 본질적으로 개시하면 할수록 작품의 단일성, 즉 작품이 존재하고 있고 따라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보다 명백해진다. 그리하여 단일성의 충격이 열려진 터 가운데서 본질적으로 나타날수록 이제까지와 달리 작품이 더욱 더 낯설고 고독한 것이 된다. 작품의 산출에는 이처럼 그것이 그렇게 있음이라는 사실이 제시된다. 형태 가운데 확립된 작품이 그 자신 속에서 고독하면 할수록, 또 인간들과의 모든 피상적 관계를 떠나 순수하게 있으면 있을수록, 그만큼 더 단순하게 작품이 존재하고 있다는 충격이 열려진 터 가운데로 들어서고 더불어 비일상적인 어떤 엄청남이 보다 본질적으로 다가온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까지 일상적으로 친숙하게 보였던 것을 허물어뜨린다.
- 작품이 그 작품 자체로 존재자의 열려진 개시성 속으로 순수하게 접근하게 될 수록 그만큼 더 단순하게 작품은 우리를 이 개시성 가운데로 밀어넣으면서 동시에 우리를 일상적인 것으로부터 떠나게 한다. 작품의 이같은 밀어넣음(밀어냄)에 그대로 따른다는 것은 세계와 대지에 대한 우리의 일상적이고 습관적인 관계를 변화시키고 모든 통속적인 행위나 평가, 인식과 시각을 중지하면서 작품 속에 일어나는 진리 가운데 머문다는 것을 말한다. 이같은 머뭄의 태도가 비로소 저 창작된 것을 처음으로 작품 그것이게 한다. 작품을 이처럼 작품으로 존재하게 해줌을 우리는 작품의 보존이라 부른다. 창작되어 있는 작품은 이같은 보존 속에서 비로소 현실적인 것으로, 비로소 작품답게 현존하게 된다.
- 작품은 그것이 작품으로 존재하는 한 언제나 보존해주는 사람과의 연관 속에 머무른다. 심지어 작품이 망각되어 잊혀진 채 머문다 하더라도 이것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과응 다르다. 망각 역시 일종의 보존이다. 작품의 망각도 작품을 먹고 자란다. 작품의 보존이란 작품 가운데 일어나는 존재자의 개시성 안으로 들어섬이다. 이처럼 보존하면서 안으로 들어섬이 곧 앎이다. 존재하는 것을 진실로 아는 사람은 그 가운데서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안다.
- 원함으로서의 앎, 앎으로서의 원함은 실존하는 인간이 자신에서 벗어나, 즉 탈자적으로 스스로를 존재의 숨어있지 않음 속으로 들여보냄이다. 원함은 실존 속에서 자신을 초월해 가면서 작품 속에 정립된 존재자의 개시성 가운데로 자신을 내세우는 냉엄한 결단이다. 작품의 보존이란 앎이요, 그 앎은 작품 가운데 일어나는 진리의 저 엄청난 거대함 안에 냉엄하게 머뭄이다.
- 작품의 보존은 인간을 그들 자신의 개별적 체험으로 밀쳐 넣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보존은 인간을 작품 가운데 일어나는 진리에의 귀속성으로 밀어넣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의 대타적이고 공존적인 존재를 숨어있지 않음에 관련해가는 역사적 나섬으로 근거 짓는다. 이미 보았음으로서의 앎은 이미 -진리 속으로- 결단해 있음이요 작품이 균열로 조직해 놓은 투쟁 안에 들어섬이다.
- 작품의 창작되어 있음에는 창작하는 사람과 보존해 주는 사람이 본질적으로 함께 속해 있다. 작품은 창작자의 본질을 가능하게 해주면서 또한 자신의 본질산 보존자를 필요로 하기도 한다.
- 그러나 참된 보존이 아닌 통속성과 예술적 식자연함에의해 사로잡히게 되자마자 작품을 둘러싼 에술적 영업 행위, 즉 예술 경영이 시작된다.
- 예술의 본질은 진리의-작품-속으로의-정립으로 규정되었다. 이같은 규정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첫째, 예술은 스스로를 지향 정돈해 가는 진리를 형태 가운데로 확립함이다. 그것은 존재자의 비은폐성을 이쪽으로 앞에 데려옴(산출함)으로서의 창작에서 발생한다. 둘째, 작품 존재를 궤도 안으로 그리고 발생에로 데려옴. 이것은 보존으로서 발생한다. 예술이란, 작품 속에서 진리를 창작하는 보존이다. 그렇다면 예술은 곧 진리의 한 생성이요 발생이다.
●시작(詩作)
- 존재자의 밝힘(밝음)과 숨김으로서의 진리가 일어나는 것은 詩作(Dichtung)이라는 방식을 통해서다. 예술작품과 예술가는 시작으로서의 예술의 본질에 그들의 근거를 갖는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의 본질은 진리의-작품-속으로의-자기-정립이다. 예술의 이러한 시작적 본질과 함께 존재자 한가운데 여려진 터가 펼쳐지며 그 속에서 모든 존재자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난다. 존재의 이런 기투(대응투사)가 작품 가운데 정립됨으로써 이제까지의 모든 일상적이며 전통적인 것은 비존재자가 된다. 비존재자는 이미 존재를 척도로서 부여하고 보존하는 능력을 상실했다.
- 작품의 영향은 작품에서 일어나는 존재자의 숨어있지 않음, 즉 존재의 생겨가는 모습에 그 본질이 있다.
- 밝히려는 기투로서의 시작은 숨어있지 않음이라는 존재에 근거하여 열려진 터를 펼쳐내며 또 그것을 형태적 균열 속으로 가져온다. 그리고 이 열려진 터가 진리를 일어나게 해준다. 그것도 열려진 터가 존재자의 한가운데서 존재자를 비로소 빛남과 울림으로 가져오는 그런 방식으로서 말이다.
- 만일 모든 예술이 시작이라고 한다면, 건축이나 회화, 음악 등도 시(Poesie)로 환원되어야 할 것이다. 포에지(Poesie)로서의 시는 단지 넓은 의미의 시작, 즉 진리를 밝히는 기투의 한 가지 방식일 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에지로서의 언어예술-좁은 의미의 시작이라고 규정한다면-은 모든 예술 가운데서 특별한 위치를 차지한다.
- 시의 요체인 언어는 단지 전달해야 할 것의 음성적이고 문자적인 표현에 그치는 것이 아니며, 또 일차적으로 그럴 수도 없다. 언어는 존재자를 비로소 처음으로 그러한 존재자로서 열려진 터 가운데 가져온다. 그래서 언어가 현존하지 않는 곳, 돌이나 식물이나 동물의 존재에는 존재자의 어떠한 개시성도 없는 것이다.
- 언어가 존재자를 命名할 때 비로소 그 명명을 통해 존재자는 단어와 나타남에로 옮겨진다. 근원적으로 볼 때 명명은 존재자를 그것의 존재로부터 불러 내어 다시 그것의 존재에로 불러 들인다. 말함은 빛의 기투(Entwerfen:대응투사)며, 그것을 통해 열려진 터에 들어선 존재자가 고지된다. 이때의 기투는 숨어 있지 않음이 존재자 자체에게 내보내는 던짐을 "풀어내어옴"이다. 그런 점에서 기투적 말함은, 존재자가 위장된 채 자신의 참 모습을 감추어 버리는 모든 숨막히는 혼란에 대한 거절이다.
- 이같은 의미의 기투적 말함이 곧-넓은 의미의-시작이다. 시작은 세계와 대지를 말하고, 그들이 빚는 투쟁적 유희 공간을 말하며, 동시에 신들의 모든 멀고 가까운 자리를 말한다. 요컨대 시작은 존재자의 숨어 있지 않음을 말한다. 개개의 언어는 본질적으로 이와 같은 말함의 일어남이며 그 가운데서 한 역사적 민족에게는 그들의 세계가 발현하고 또 폐쇄적인 것으로서의 대지가 보존된다. 기투적 말함은 말해질 수 있는 것을 준비해 놓음과 동시에 말해질 수 없는 것을 세계로 가져온다. 그런 말함 가운데서 하나의 역사적 민족에게는 그 민조그이 본질, 즉 세계-역사에의 귀속성이 미리 각인된다. 시작은 이처럼 넓은 의미에서 그리고 동시에 언어와 단어와의 본질적인 내적 통일 속에서 생각되어야 한다.
- 언어는 본질적 의미에서 시작이다. 언어는 그 속에서 처음으로 존재자가 존재자로서 인간에게 자신을 개시하는 그같은 일어남이다. 그 때문에 언어를 요체로 하는 시, 즉 좁은 의미의 시작이야말로 본질적 의미에서 볼 때 가장 근원적인 시작이다. 이것은 언어가 어떤 근원적인 포에지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가 시작의 근원적 본질을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언어를 통해 포에지가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 비해 건축이나 조형 예술 작업은 언제나 오직 말과 명명이 열어놓은 터에 의해 지배받고 인도된다. 즉 우리도 모르게 언어 속에서 일어나는 존재자의 밝음 가운데서 진행되는 각기 고유한 시작 방식들이다.
- 진리의-작품-속으로의-정립으로서의 예술은 시작이다. 작품의 창작뿐 아니라 작품의 보존 역시 마찬가지로 그 고유한 방식에 있어서 시작적이다.
- 예술의 본질은 詩作이다. 그런데 詩作의 본질은 진리의 수립이다. 수립은 세 가지 의미를 갖는다. 즉, 진리의 증여로서의 수립, 진리의 근거지움으로서의 수립, 진리의 始作으로서의 수립이다. 그런데 수립은 오직 보존 속에서만 현실적일 수 있다. 따라서 수립의 각 방식에는 각각의 보존 방식이 상응한다.
- 진리의 시작적 기투는 형태로서의 작품 속에 자신을 세운다. 작품의 형태에 깃든 진리는 자가올 보존자들, 곧 역사적인 인간들에게 던져져 있다. 참된 시작적 기투는 역사적인 현존재가 이미 그 속에 던져져 머물고 있는 곳을 개시한다. 그곳이 대지이다. 대지는 각 역사적 민족에게 있어서는 각기 그들 자신의 대지이다. 대지는 스스로를 폐쇄하는 근거요, 각 역사적 민족은 바로 그 위에서 다른 모든 존재자들, 설혹 여전히 감춰져 있긴 하지만 이미 존재하는 것들과 더불어 머문다. 그리고 현존재와 존재의 비은폐성과의 관계에서 생겨나와 압도적으로 주재하고 있는 것이 그 민족의 세계이다. 기투는 인간과 더불어 주어지는 모든 것을 저 폐쇄적인 근거에서 이끌어 올리면서 동시에 그것들을 다시 이 근거 위에서 정립해야만 한다. 그럼으로써 모든 것을 지탱하는 것으로서의 근거가 비로소 근거 지워진다. 이러한 이끌어 냄 때문에 모든 창작은 길러냄이다. 마치 물이 원천에서 길어지듯이. 그러나 근대적 주관주의는 이같은 창작을 독자적인 주체의 어떤 천재적 행위로 오해한다.
- 진정한 시작은 도약이다. 그러나 그 도약은 숨겨진 채로 오래전부터 다가오고 있었던 모든 것들이 한꺼번에 건너 뛰는 선구로서의 도약이다. 그리기에 始作은 이미 끝을 숨긴 채 간직하고 있다.
- 예술 즉, 진리의 始作이 일어날 때면 언제나 역사 가운데 충격이 일어났다. 역사는 그 충격과 더불어 다시금 새롭게 시작했다.
- 예술은 진리의-작품-속으로의-정립이다. 그러나 이 명제 속에는 본질적인 이중성이 숨어있다. 즉 진리는 정립하는 주체이면서 동시에 정립되는 객체이다. 예술은 역사적이며 또 역사적인 것으로서 작품 속에서 진리를 창작하고 보존한다. 수립으로서의 예술은 본질적으로 역사적이다. 예술이 역사적임은 예술이 역사를 근거 지운다는 본질적 의미에서 그렇다.
- 예술은 진리를 샘솟게 한다. 예술 작품의 근원, 창작자와 보존자의 근원 한 민족의 역사적 현존의 근원은 예술이다. 예술은 그 본질상 진리가 존재하는 즉 역사적으로 되는 탁월한 방식이라는 점에서 근원이다.
"근원 가까이 사는 자는 / 그곳을 떠나기 어렵다"(횔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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