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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평화를 택한 왕(17호)

작성자김성문|작성시간26.01.22|조회수933 목록 댓글 2

평화를 택한 왕

김성문

 

락국(금관가야)의 마지막 양왕은 나라를 잃은 임금이 아니다. 그는 패배 앞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고자 하는 군주다. 힘의 균형이 무너진 시기에 신라와의 전쟁을 이어가는 것이 오히려 백성과 나라에 더 큰 비극을 가져올 것을 알고, 그는 용기를 내어 결단을 내린다. 피로 물든 승리가 아닌 평화를 택한 양왕은 백성과 가족을 살리기 위해 나라의 운명을 신라에 맡긴다.

 

양왕의 휘(이름)는 구해 혹은 구형, 구충, 구차휴로도 전한다. 가락국의 피를 이은 마지막 임금이었다. 그의 선조들은 일찍부터 신라와의 혼인 관계를 맺으며 동맹을 이어왔다. 여섯 번째 신왕의 왕비 복수는 신라인 대아간 도녕의 딸이었다. 그 후 가락국 왕실은 꾸준히 신라인 여성들과 혼인했다. 양왕의 아버지 숙왕은 신라 각간 출충의 딸과 혼인해 그를 낳았다. 양왕은 이미 신라 진골의 혈통을 절반이나 지니고 있었던 셈이다.

 

양왕은 521년, 왕위에 올라 11년간 가락국을 다스렸다. 그러나 나라의 세력은 이미 기울고 있었다. 신라와의 전쟁은 파멸로 향한 무의미한 저항이었다.

 

『삼국사기』「법흥왕 19년」조에 따르면, 532년 양왕은 왕비인 계화와 세 아들과 함께 신라에 재물과 보물을 헌상하고 나라의 주권을 이양했다. 이는 그에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었을까. 양왕은 절망에 빠지지 않았다. 신라는 그의 결단을 존중했고 법흥왕은 예를 갖추어 상등의 관위와 식읍을 하사했다.

 

『삼국유사』에는 다른 이야기가 전해진다. 양왕은 동생 탈지 이질금을 통해 가락국 땅을 관리하게 했다. 세 아들은 신라에 들어가 최고 관등인 각간에 올랐다. 민간에 전해지는 이야기에서는 양왕이 전사했다고도 한다. 다른 기록은 그가 신라에 나라를 넘긴 뒤 지리산 태왕궁에서 여생을 보냈다고 전한다. 수로왕의 별궁이었던 태왕궁을 양왕은 수정궁으로 바꾸었다. 후손인 김서현은 수정궁을 철거한 뒤 새로운 사찰, 왕산사를 세웠다.김유신은 그곳에 수로왕과 양왕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사라진 왕의 흔적은 그렇게 기록과 전설 속에서만 남아 있는 듯했다.

 

임진왜란으로 왕산사는 불타고 양왕의 위패는 땅에 묻혔다. 그 후 승려들은 절만 다시 지었다. 1650년 탄영 스님이『왕산사기』를 남겼다. 1798년에는 큰 가뭄 끝에 민경원 일행이 기우제를 지내고 돌아오던 길에 왕산사에서 정체불명의 나무상자를 발견했다. 상자 안에는 양왕과 왕비의 영정, 옷, 활, 칼,『왕산사기』가 들어 있었다. 현재 영정은 산청 덕양전에 봉안되어 있다.

 

양왕의 생애에 대해서는 여러 전설과 후대의 기록이 전해진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신라에 나라를 넘긴 뒤에도 왕계 인물로서 상징적 구심이 되었으며, 한때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다시 귀국해 옛 가야 세력의 재결집을 도모했다고 한다. 특히 산청군 금석골 일대에 거처나 정치적 거점을 마련하고, 서부 가야 지역을 중심으로 잔존 세력을 규합했다는 설이 전해진다.

 

그 후 562년, 신라가 대가야까지 병합하면서 가야라는 이름의 정치 질서는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이때 산청 금석골 일대 역시 폐쇄되었으며, 양왕을 따르던 일부 집단은 다른 지역으로 이주했다는 전승도 남아 있다. 그러한 기록과 구전은 가락국이 정치 체제로서는 소멸했으나, 왕실 계통과 일부 세력이 이동·분산되며 다른 지역에서 일정 부분 계승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러한 이야기들과는 별도로, 오늘날 전해지는 양왕릉은 양왕이 세상을 떠나며 남긴 말에서 비롯되었다.

 

“나라와 백성을 지키지 못한 왕이 흙 속에 묻히는 것을 감당 할 수 없다.”

 

양왕의 이 유언대로 돌무덤으로 조성되었다. 산비탈의 좁은 자리에 조성된 양왕릉은 독특한 양식을 갖추고 있다. 돌로 쌓아 7단으로 이루어진 전면부와 곡선을 그리는 봉분은 마치 용서를 비는 듯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스스로를 낮춘 왕의 생애가 무덤의 형상으로 남은 듯하다. 높이 7m에 이르는 왕릉 한편에는 감실이 있어 위패를 보관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비석, 상석, 장명등, 문인석, 무인석, 돌짐승상이 주변을 지키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이 왕릉 위로는 새도 날지 않고 짐승도 드나들지 않는다고 한다. 칡넝쿨조차 낙엽을 떨구지 않는다니, 왕릉이 지닌 신령한 기운이 지금도 느껴지는 듯하다.

 

양왕은 찬란했던 철기 문화의 주인공인 가락국을 지켜내지 못했다. 그는 백성과 후손들을 위해 나라를 포기함으로써 더 큰 미래를 남겼다. 자신의 무덤을 통해 용서를 빌었다. 그의 선택은 숭고함의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다. 가락국의 백성들은 새로운 나라에서 함께 발전했다. 후손 김유신은 삼국을 통일하는 대업을 이루었다. 그 피와 정신은 그렇게 이어졌다.

 

양왕의 이야기는 한 사람의 결단이 굴복이 아님을 말한다. 한 왕의 물러남이 오히려 후세를 위한 길이었음을 보여준다. 역사는 늘 전쟁의 승자만을 기록하지만, 이처럼 평화를 위해 싸움을 멈춘 이들도 있어야 한다. 전쟁이 성웅을 만들지만, 평화는 사람을 남긴다. 양왕의 판단은 울림이 되어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하고 있다.

 

산청 양왕릉

 

 <다음 호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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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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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허수현 | 작성시간 26.01.22 오늘도 공부 잘하고 갑니다 ^^
  • 답댓글 작성자김성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1.22 바쁘신데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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