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찬용의 노래를 듣는다.
꽤 심각한 얼굴로, 때론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
애써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가
이내 변명하는 웃음으로 얼버무리며 잠자코 의자로 돌아와
대롱에 매달린 바람 빠진 노란 풍선처럼 푸, 하고 몸을 뒤로 기대
못이기는 척 귀를 기울인다.
바람에 반짝거리는 수만 개의 손거울처럼 이따금 잎새들을 흔드는 버드나무,
그 아래에서 함께 놀던 아이들의 대열을 저 멀리 한 채
오롯이 혼자 만의 기쁨을 발견한 소년이 있었다.
후드득, 축복의 새들이 땅의 열기를 피해 하늘을 뜨고,
잠시 태양이 구름 뒤로 지친 몸을 의탁하는 달콤하고 아득한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때 소년은 오후 내내 느리게 기지개를 켜는 나무그늘과 색 바랜 강철 미끄럼틀,
달디 단 흰 구름을 감아서 매달아놓은 솜사탕막대 사이로
따스하고 부드러운 바람이 찾아온 것을 알아챈다.
소년은 그 순간, 모든 걱정과 기대를 마법의 도마뱀에게 맡겨버리고
그저 종잇장처럼 바람에 매달려 그토록 바라 마지 않던 푸른 달을 향해 날아가
신화 속의 명멸하는 별빛, 혹은 그 세계의 작은 거인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아직 창백한 초승달처럼 세월이 야위어 가기 전에.
헌 옷과 낡은 미신 속의 값진 충고를 마음 속 깊이 새기기 전에.
이해할 수 없는 바보의 세계와,
연신 ‘오해요!’ 라고 외치다 냉정하게 입 다무는 차가운 계절로 내몰리기 전에……
하지만 언제나 바람이란 속절없어서,
혹독한 겨울 빙판 위에 소년을 벌거숭이로 내동댕이쳤고
그는 번민 속에서 어른이 된 채 냉동인간의 우울한 시절을 몸소 버텨내야 했다.
언제나 가장 어두운 시간은 해뜨기 바로 직전,
칠흑의 새벽을 뜬눈으로, 죽음의 공포와 고독을 그대로 맞닥뜨린 그는
비로소 목소리를 되찾고 모험이 운명임을 깨달은 ‘이그쥬가르쥬크’가 되어
친구들이 뛰어 놀던 공원으로 돌아와
자, 함께 그때의 맑은 어린 아이가 되어 이 세계를 건너뛰자,
라며 비로소 삶의 진실한 여정을 떠나자고 노래한다.
내 안의 상징으로써 고찬용의 음악을 듣는다.
귀는 고찬용을 듣지만 마음은 겹겹이 쌓여 어디에 무엇이 놓였나 알 수도 없는
내 기억의 레이어를 분주하게 들춘다.
듣고 있는 것은 고찬용의 음악이지만 보고 있는 것은 그저 내 기억과 세월이 자아낸 상징들이다.
한 곡 두 곡이 흘러가고,
코드 위에 또 다른 코드가 따스하게 녹아 내리고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는 동안
내 마음은 아직 근거가 모호하지만 시나브로 다가오는 평화를 느낀다.
그 온기의 힘을 빌어, 나 역시 거울을 들여다보며 내 지친 눈빛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다.
이제 그만 버터 칼이라도 들어서 이 미칠 것 같은 우울한 날을 단칼에 자르라고 소리친다.
스캣이라 불리는 롱롱벙벙한 고찬용의 높고 낮은 흥얼거림의 행방을 쫓으며
내 표정 속의 거미줄과 우울한 시간의 케케묵은 커튼을 걷어내라고,
이 어지러운 세상의 운명 같은 청춘과 현실을 생긴 그대로 빙글빙글 돌려서
지랄 맞은 기억에서 송두리째 날려버리자, 라고 격정의 만트라를 왼다.
자, 그러면 가슴에 손을 얹고 묻건대,
기억이란 것은 간곡하게 애원하면 사라지는가?
나는 감히 그 답의 실마리와 비의(秘儀)를,
고찬용이 오랜 고독의 시간 속에 되찾은 목소리로 뼈대를 세우고 살을 돋운 앨범
『Look Back』에서 스스로 헤아려보라고 내민다.
Look back! 어설프게 들추다 머물지 말고, 제대로 돌아보자.
밀어내거나 버팅기지 말고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고 받아들이자.
고찬용이 그 세월 동안 끝도 없이 돌아보고 상처받고
위로 하고 용서 받고 머물렀다 떠나고,
마침내 스스로 여정을 향해 떠날 채비를 하고 돌아온 것처럼.
만약 당신이 제대로 돌아보기만 한다면,
그 순간 어쩌면 기억 속 원형(原形)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당신만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회전 목마가 돌아가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때는 빠져나갈 방법도 없고 쉬지 않고 돌아가는 쳇바퀴였을지도 모르지만
쇠창살을 들어내고, 광장 중앙으로 옮겨 옆으로 돌려 누이고 반짝이는 장식을 달자
비로소 맘보 스텝을 출 수 있는 당신만의 회전목마가 되었다.
자, 여기 빅밴드의 스윙 춤곡에 맞춰 원형(圓形)무대가 빙글빙글 돌아가며
흰 말과 호박마차가 호흡을 맞춰 다정하게 오르내리고 있다.
하지만 초심자를 위해 미리 경고해 두건대,
회전목마에 올라타 끊임없이 돌고 있자면
어느 순간부터 그 놀이가 즐거움인지 고통인지 모호해질 것이다.
내가 회전목마를 돌리고 있는지 회전목마가 나를 돌리고 있는지,
이 노래가 웃고 즐기자며 듣던 노래인지,
눈물 떨구는 것을 감추기 위해 마련한 세련된 쇼 장치 같은 것인지.
정작 돌려버려야 할 것이 세상인지,
아니면 세상에 대한 내 생각과 말라비틀어진 고집인지.
나를 태운 것이 안락하게 미지의 세계로 모셔다 줄 아름다운 흰 말인지,
아니면 불안한 내일로 곤두박질시킬, 등과 배를 꿰뚫어놓은 뻣뻣한 말 꼬치구이인지……
다시 한 바퀴 돌아보면,
회전목마는 나라는 존재가 송두리째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과,
이 에고가 없어져야만 이 세계의 교묘하고 달콤새콤한 환상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아신화의 모험을 떠날 수 있다는 희망의 교차점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회전목마, 모든 방향이 넓게 트여서
나를 바라보는 친구의 다정한 표정과 먼 산 위의 별빛도 볼 수 있고,
맘만 먹으면 말에서 내려 이 세계의 어디로든 건너갈 수 있는
우리 꿈과 자유의 원형.
우리는 이 회전목마 위에서 빙글빙글,
한 몸이 되어 구분조차 할 수 없는 희로애락의 굿판을 벌이며
마침내 기억의 끈질긴 연연(戀戀)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때야 말로, 말에서 내려 진짜 삶의 질퍽한 흙을 밝고 모험을 떠나,
비로소 공원의 버드나무 아래에서 생애 처음으로 삶의 기쁨과 신비를 발견한
소년과 재회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고찬용의 노래를 듣는다.
이제는 꽤 밝아진 얼굴로, 때론 이미 해결했다는 표정으로.
굳이 잘난 척 하고 싶지는 않다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가 그만,
바라밥 랍밥바 밥바우바루바, 룹바뚜라 붑바 빠라루바,
그의 스캣 멜로디와 리듬에 또 한번 마음을 뺏기고, 어깨를 들썩이며 발 스텝을 구른다.
어지러운 세상, 돌려버리자, 고민을 버리자, 털어내 버리자,
우리에겐 고찬용으로부터 전수받은 비밀의 맘보 스텝이 있다.
그의 노래를 진심으로 즐긴다면 지금쯤 나와 당신은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서 회전 목마에 앉은 개구쟁이가 되어
솜사탕을 들고 노래를 부르며, 돌아라! 회전목마야,
외치며 맑게 웃음보를 터뜨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고찬용, 나와 당신을 위해 마련된 가장 신나고 사랑스러운 회전목마,
우리는 그 곳에서 비로소 즐겁고 슬펐던 기억을 털어내고 바로 지금 이순간을 시작할 수 있다.
‘이그쥬가르쥬크(Igujugarjuk)- 조셉 캠벨은 빌 모이어스와의 대화에서 ‘이그쥬가르쥬크’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북부 캐나다 카리브 에스키모 샤먼’이라고 소개하면서, ‘참 지혜라고 하는 것은 사람들에게서 아득히 떨어진 채 절대고독 속에 은거하는데, 이 참 지혜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 버리는 것과 고통스러워하는 것만이 세상으로 통하는 마음의 문을 열게 할 수 있다’ 라고 설파했음을 밝힌다.
- 출처 : 조셉 캠벨, 빌 모이어스, 빌 모이어스의 서문「우주의 노래, 천구의 가락」,『신화의 힘』, 이윤기 옮김 (이끌리오, 2002)
주2) 참고하고 빌려 쓴 노랫말과 메타포
1. 고찬용, 「버드나무가 있는 공원」,『낯선사람들』(하나뮤직, 1993), 버드나무, 미끄럼틀, 서늘한 공원, 뛰노는 아이 서넛
2. 고찬용, 「꿈꾸는 아이」,『After Ten Years Absence』(도레미미디어, 2006), 축복의 새, 푸른 달, 작은 거인, 별
3. 고찬용, 「해의 고민」,『낯선사람들』(하나뮤직, 1993), 가끔 먹구름이 도와주지만 그래도 힘이 들어
4. 고찬용, 「회전목마」,『Look Back』(푸른곰팡이, 2012), 도마뱀, 마법, 맘보 스텝, 이 순간만은 나는 맑은 어린이야, 회전목마, 솜사탕을 들고 노래 부르며, 돌려버리자, 개구쟁이, 어지러운 세상, 빙글빙글, 니가 없어질지도 몰라, 어지러운 세상, 바라밥 랍밥바 밥바우바루바, 룹바뚜라 붑바 빠라루바
5. 고찬용, 「날 위로해 줄 거야」,『Look Back』(푸른곰팡이, 2012), 초생달 왜 이리 창백해, 새벽녘
6. 고찬용, 「값진 충고」,『After Ten Years Absence』(도레미미디어, 2006), 낡은 꿈, 미신, 헌 옷, 미칠 것 같은 우울한 날을 자르며
7. 고찬용, 「사춘기」,『Look Back』(푸른곰팡이, 2012), 이해할 수 없어 그건 바보 같은 세계
8. 고찬용, 「언제부터 나를 어른이라 했나」,『낯선사람들 2집』(킹 레코드, 1996), 오해요 외치는 품속에서 나를
9. 고찬용, 「그 곳에서」,『Look Back』(푸른곰팡이, 2012), 겨울
10. 고찬용, 「겨울이 오네」,『After Ten Years Absence』(도레미미디어, 2006), 겨울
11. 고찬용, 「철부지」,『Look Back』(푸른곰팡이, 2012), 우울한 냉동인간, 원하는 게 뭔지 거울에 물었네, 뭐 하나 가릴 것이 없어요, 난 그저 따뜻한 바람처럼 날고 싶어
12. 고찬용, 「도시대탈출」,『낯선사람들 2집』(킹 레코드, 1996), 이대로 건너 뛰자, 롱롱벙벙 롱롱버릿, 거미줄 같은 표정, 나무그늘
13. 고찬용, 「우울한 시간」,『Look Back』(푸른곰팡이, 2012), 우울한 시간의 검은 커튼
14. 고찬용, 「바다」,『Look Back』(푸른곰팡이, 2012), 내 청춘과 현실이 같은 운명처럼
15. 고찬용, 「오늘 하루는」,『After Ten Years Absence』(도레미미디어, 2006), 지쳐있다고 눈빛이 말하고 있네, 쉬지 않고 있었어
주3) 부연
고찬용의 음악을 ‘독창적인 멜로디 진행과 코드, 걸출한 기타 프레이즈, 성공한 콜라보레이션으로써의 『Look Back』, 가사의 메시지와 메타포’ 라는 관점에서 다루고자 하며, 이 글 ‘고찬용, 나와 당신의 회전목마’는 그 중에서 ‘가사의 메시지와 메타포’, 덧붙여 ‘앨범 『Look Back』의 의미’ 에 천착해서 썼음을 밝힙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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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액션가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2.07.16 그럼요! 모든 게 그저 사랑일 뿐입니다.^^ 이런 사랑과 또 다른 이런 사랑. 차이는 없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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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블루바디 작성시간 12.07.16 액션 가면님, 이 뜨거운 사랑(?)을 나눠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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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제리 작성시간 12.07.18 아하~ 블루바디님께 고찬용님 노래를 녹음해서 선물했다는 분이 액션가면님이시군요 ㅋㅋㅋ
하나하나 알아가는 재미가 있네요 ㅋ -
답댓글 작성자액션가면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2.07.18 저는 그냥 팬심일 뿐이고, 대단한 것은 고찬용 씨죠.^ ^ / 제리님... 네, 저 맞습니다. '선물'이란 곡을 테이프에 녹음해줬고, 테이프가 짧게 남았기에 아슬아슬하게 '1000년대 말'을 담았었죠.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