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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풍경소리

죽음,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선물[당신들은 서로 형제요 자매들이다]

작성자풍경소리|작성시간14.02.26|조회수98 목록 댓글 0

[헨리 나우웬]

죽음,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큰 선물

Our Greatest Gift

 

 

 

 

 

5

당신들은 서로 형제요 자매들이다

 

하루는 친구 셸리가 말했다. “남편 밥이 죽은 지 다섯 해가 됐어요. 올해는 그 사람 무덤에 아이들을 데려갈까 하는데 신부님이 함께 가주실 수 있을는지요?” 물론 그러겠다고 대답하자 그녀가 그동안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밥이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세상을 뜨자 당시 네 살, 다섯 살 된 미첼과 린제이를 데리고 남편이자 아버지인 밥의 죽음을 수습하는 어려운 일이 셸리에게 주어졌다. 아직 어린 아이들로서는 땅에 묻히는 아버지를 보는 것이 너무 힘들겠다고 셸리는 생각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셸리 가족에게는 공원묘지가 두려움의 장소로 바뀌었고 셸리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 무덤을 찾는 길에 동행해줄 것을 나에게 부탁했던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있는 린제이한테는 아직 좀 무리일 것 같아 이번에는 미첼만 데려가기로 하였다.

화창하고 아름다운 날이었다. 작은 비석에 친절하고 온순한 사람이라는 글이 새겨져 있는 밥의 무덤을 쉽게 찾았다. 우리는 비석 둘레에 앉았고, 셸리와 미첼이 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미첼이 아빠와 공놀이하던 일을 생각해냈는데 기억이 흐릿해지면 셸리가 모자란 부분을 자세히 채워주었다. 셸리의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 같기에 내가 말했다. “여기로 피크닉을 오면 좋겠네. 언제 한 번 먹을 것 장만해서 옵시다. 여기 밥의 무덤에서 그의 삶을 추억하며 함께 음식을 먹는 거요.” 두 사람이 처음엔 내 제안에 어리둥절했지만 미첼이 말했다. “, 좋아요. 그땐 오빠도 같이 와요.”

셸리와 미첼은 집으로 돌아와 린제이에게, 무덤에 가서 보니 아주 조용하고 아늑한 곳이더라고 말해주었다. 며칠 뒤에 린제이가 먼저 아버지 묘소에 가보자고 말했다. 그들은 모두 함께 가서 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차츰 밥이 그들 곁으로 살았을 때와는 다른 친구가 되어 친숙하게 다가왔다. 이제는 음식 장만하여 그의 무덤을 찾는 날이 온 식구가 기다리는 날이 되었다. 하긴 예수님도 식탁에서 당신을 기억해달라고 친구들에게 부탁하셨다.

 

이 이야기는 우리가 얼마나 쉽게 죽은 사람들과 멀어질 수 있는지를, 그리고 그들을 우리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들 특히 우리 모두 죽지 않을 수 없는 존재임을 상기시켜주는 존재로 알아서 두려워하게 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반면에 또한 우리가 얼마나 쉽게 죽은 이들을 우리 삶의 현장으로 데려와서 자신의 죽음을 직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친구로 삼을 수 있는지도 잘 보여준다.

얼마나 자주 우리는 죽어가는 사람을 보는가? 얼마나 자주 우리는 죽은 사람을 보는가? 얼마나 자주 땅에 묻히는 사람 관 위에 삽으로 흙을 떠서 얹는가? 얼마나 자주 공원묘지로 가서 거기 누워있는 배우자, 부모, 형제, 자매, 삼촌, 고모, 이모, 친구들 앞에 가만히 앉아 있는가? 아니면 그들을 전혀 존재한 적 없는 사람들로 여기며 살고 있는가?

우리 아버지가 계시는 남부 네덜란드의 작은 마을 게이스테렌에서는 산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에 죽은 이들이 함께 존재한다. 마을 근교의 공원묘지는 아름답게 가꾸어진 정원이다. 대문은 언제나 새롭게 페인트로 칠해져 있고 울타리와 산책로는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고 무덤마다 손질이 잘 되어 있다. 무덤 앞의 십자가와 비석들은 상록수와 꽃으로 곱게 장식되어 있다. 공원묘지는 방문객들이 안심하고 머물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조용한 공간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곳을 사랑하여 자주 가서 거기 누워있는 가족이나 친구들과 기도도 하고 놀기도 한다. 마을 교회는 예배 때마다 무덤에 누워있는 이들을 위한 기도를 빠뜨리지 않는다.

게이스테렌으로 아버지를 방문할 때마다 나는 그 작은 공원묘지를 찾는다. 입구 가까운 곳의 어머니 묘소에는 그분 생일과 사망일이 적혀 있는 갈색 나무 십자가가 서 있다. 무덤 둘레에는 상록수들이 심어져 있고 가운데는 바이올렛으로 덮여 있다. 그 조촐한 무덤 앞에 서서 십자가를 바라볼 때 나는 공원묘지의 미루나무 잎들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내가 혼자가 아님을 실감한다. 그곳에 어머니가 나와 함께 계시며 나에게 말씀하신다. 물론 유령을 보거나 이상한 소리를 듣는 건 아니지만, 15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여전히 나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너무나 생생하게 알 수 있다. 아름다운 공원묘지의 그윽한 품에 안겨서, 앞으로 남은 생을 성실하게 살다가 언제고 맞게 될 죽음을 겁내지 말라는 어머니 음성을 듣는 것이다.

어머니 무덤 앞에 앉아 있으면 나를 에워싼 죽은 이들의 범위가 점점 넓어진다. 거기 묻혀 있는 마을 사람들뿐 아니라 말과 행동으로 나에게 영향을 미친 사람들의 경계를 넘어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나와 같은 모양으로 슬프고 기쁘고 아프고 즐거운 인생여정을 거친 수많은 남자와 여자들이 나를 에워싸고 있는 것이다.

게이스테렌의 작은 공원묘지에 서 있는 미루나무들은 거기 묻혀 있는 사람들 모두를 위하여 노래를 부른다. 우리 어머니 무덤처럼 잘 가꾸어진 것들도 있지만 방치되어 잊힌 무덤들도 있고 찾는 사람이 없어 잡초만 무성한 무덤들도 있다. 그 모든 무덤들의 주인을 위하여 미루나무는 지금도 공원묘지에 서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나도 그들 모두와 똑같은 사람이고 그들이 죽어갔듯이 나 또한 죽어갈 것이라는 사실에 나는 안도와 고마움을 느낀다.

 

우리 모두가 인류라는 이름의 가족에 속한 형제자매라는 사실, 그러므로 문화, 언어, 종교, 생활방식에 비록 차이는 있지만 사랑이신 하느님 손에 자기 삶을 온전히 내어맡겨야 한다는 점에서 하나도 다를 게 없는 유한한 생명이라는 사실에 대한 깊은 깨달음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고마운 선물이다. 죽은 사람들과의 연대(連帶)를 느끼고 그 연대감이 주는 기쁨과 평화를 맛보는 것 또한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이다. 이 선물을 받을 때마다 죽어가는 이들 돌보는 것이 무엇인지를 나는 새롭게 깨닫는다. 그것은 수많은 죽어가는 이들 또는 죽은 이들과 연계되면서 그들로 하여금 짧은 수명의 한계 너머로 이어지는 무한 결속을 보게 하는 것이다.

셸리와 함께 밥의 무덤을 찾거나 게이스테렌 마을 공원묘지 어머니 무덤 앞에 가만히 앉아있자면, 지구상의 모든 남자와 여자들이 속으로 깊게 결속되어 있음을 죽어가는 사람들이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더욱 굳어진다. 우리네 인간들은 지금 살아있든지 오래 전에 죽었든지, 가까이 있든지 멀리 떨어져 있든지, 핏줄로 연결되어 있든지 아니든지, 모두가 서로에게 속해 있다. 모두가 한 형제자매들이다. 우리가 죽는 것도 서로 연결되어 있는 상태에서 죽는 것이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묻고 싶어진다. 정말 우리가 한 형제자매로 살고 있는가? 날마다 신문방송은 사람들이 서로 싸우고 괴롭히고 죽이는 소식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이 세상 도처에서 사람들이 억압과 전쟁과 굶주림의 희생물로 죽어간다. 증오와 폭력과 착취가 난무하지 않는 곳이 없다. 잠시 동안 우리는 2차 세계대전 당시의 대학살과 집단수용소 같은 것들이 모두 지나간 시절의 유물일 뿐 다시는 지구상에서 볼 수 없으리라는 착각 속에서 살아보았다. 그러나 오늘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그동안 우리가 배운 것이 얼마나 빈약한지를 보여주고 있다. 형제자매로 창조된 남자와 여자들이 서로 적대시하며 상대의 목숨을 해치고 죽이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진짜 죄악이다.

하느님은 인간의 참 질서를 회복시키려고 예수를 이 땅에 보내셨다. 우리는 빚 갚아주는 이(代贖者, redeemer)라는 이름으로 예수를 부른다. 그분은 우리가 지은 죄의 빚을 갚아주시고, 우리 모두 하느님의 아들딸이요 따라서 한 형제자매라는 진실을 우리에게 깨우쳐주려고 오신 분이다. 예수는 어떻게 우리가 지은 죄의 빚을 갚아주셨던가? 우리 가운데 하나가 됨으로써, 우리가 태어나듯이 태어나고 우리가 죽듯이 죽음으로써, 그렇게 하셨다. 진실로 예수는 우리의 형제가 되셨고, 우리와-함께-있는-하느님(God-with-us)이 되셨다. 하느님의 천사가 요셉의 꿈에 나타나 그에게 말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의 태중에 있는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예수는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것이다.” 이를 기록하고 나서 마태오는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 “이 모든 일로써 주께서 예언자를 시켜,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임마누엘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마태오 1, 20-23).

하느님이 우리와-함께-있는-하느님으로 되셨다. 우리의 형제가 되셨다. 그래서 우리는 다른 모든 사람의 형제가 되고 자매가 되었다. 이것이 예수 이야기고, 그가 우리의 빚을 갚아 본디 자리로 회복시켜준 이야기다. 예수 안에서 예수를 통하여 하느님이 우리의 삶뿐 아니라 죽음까지도 함께 나누신다는 데 이 이야기의 핵심이 있다. 예수의 죽음은 우리와-함께-있는-하느님이 되기를 원하시는 하느님의 뜻이 가장 극단적으로 표현된 사건이다. 언제고 죽어야 한다는 공동 운명이야말로 모든 인간을 통일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요인이다. 죽지 않을 수 없는 인류의 공동 운명이 인간의 차별문화가 얼마나 터무니없는 것인지, 서로를 적대시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잘 보여준다. 우리를 위하여 우리와 함께 죽음으로써 예수는 인간들이 서로 형제자매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우리의 착각을 깨뜨리고 분별과 차별을 치유하고 마침내 우리의 죄를 용서코자 하셨다. 몸소 우리의 형제가 됨으로써 우리가 다시 형제자매로 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죄만 빼놓고 모든 점에서 그분은 우리와 똑같고자 하셨다. 그분이 우리를 위해서 죽으신 이유가 바로 여기 있었다. 우리와 똑같이 죽지 않을 수 없는 몸으로 되어 죽어가면서, 더 이상 서로를 겁내지 말라고, 서로 사랑하며 살라고,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권면 정도가 아니었다. 그분의 명령이었다. 그것이야말로 사람됨의 본질에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는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나의 계명이다. 벗을 위하여 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명하는 것을 지키면 너희는 나의 벗이 된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세상에 나가 언제까지나 썩지 않을 열매를 맺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하는 것을 다 들어주실 것이다. 서로 사랑하여라.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나의 계명이다.”(요한 15, 12-17).

 

우리와-함께-있는-하느님이 되신 하느님의 신비가 죽어가는 이들을 어떻게 돌볼 것인지에 대한 가르침을 암시한다. 하느님이 우리를 위하여 우리와 함께 죽고자 하시니 우리 또한 서로를 위하여 서로 함께 죽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 슬프게도 우리는 죽음이 우리를 다른 사람들한테서 떨어뜨려놓는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죽음은 결별이다. 다른 사람들을 뒤에 남겨두고 떠나는 것이다. 친밀한 관계는 끝장나고 영원한 고독이 시작된다. 진실로 우리에게 죽음은 이별이고 돌이킬 수 없는 결별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우리를 위하여 우리와 함께 죽으셨고 그래서 우리의 죽음은 더 이상 단순한 결별이 아닐 수 있게 되었다. 그분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을 새로운 통교(communion)와 결합(union)으로 가는 길이 될 수 있게 해주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신앙이 가져다줄 수 있는 가장 급진적인 전환(turn)이다. 그러나 이 전환은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돌봄이 요구된다.

죽어가는 이를 볼보는 것은 그로 하여금 자기 죽음을 가족과 친지들뿐 아니라 모든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사람들을 자기 주변에 불러 모으는 계기로 삼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사람을 혼자 죽게 놔두는 것이 좋지 않다는 말을 할 때 우리는 매우 깊은 신비를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때보다도 죽어갈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 삶에서 죽음으로 넘어가는 길목이야말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넘어야 하는 길목이다.

죽는 순간을 누구와 함께 보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자명한 사실이다. 죽음에 대한 가장 큰 두려움은 곁에 아무도 없이 혼자 죽을지 모른다는 데 있다. 우리는 우리 손을 잡아주고 쓰다듬어주고 부드럽게 말해주고 함께 기도해줄 어떤 사람을 원한다. 그리고 우리 또한 누군가에게 그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밖에도 몇 가지 분명한 사실이 더 있다. 죽어가는 이를 돌보는 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죽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이 용기를 내어 모든 시대의 성인들과 죄인들을, 굶어 죽는 아이들, 고문당하는 죄수들, 집 없이 떠도는 부랑인들, 노숙자들, 에이즈 환자들, 그밖에 방금 죽었거나 죽어가고 있는 수백 수천의 사람들을 자기 곁으로 불러올 수 있도록 어떻게든지 도와주어야 한다. 처음에는 몰인정하고 잔인하게까지 보이겠지만 막상 해보면 정반대다. 그것이 죽어가는 이들을 지독한 외로움에서 건져 올려 온갖 일을 다 겪으면서 살다가 죽어가는 인류의 한 멤버로 귀속시키는 것이다. 비록 고통스럽긴 하지만 지금 자기가 겪는 일들이 시간과 공간을 넘어 온 인류와 자기를 하나로 묶어준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그들은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인류 가족과 함께 죽음의 문을 들어설 수 있게 된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교 역사를 관통하여 죽어가는 수많은 사람이 십자가를 바라보며 용기를 얻었다. 프랑스의 유명한 16세기 이센하이머 제단에는 말 못할 고뇌와 번민으로 괴로워하는 그리스도의 초상이 걸려 있는데 온몸이 역병으로 검게 문드러져 있다. 그 괴로운 그리스도 초상을 바라볼 때 사람들은 오래 전에 그들을 위해서 그들과 함께 죽은 예수만 보는 게 아니라 현재 죽어가고 있는 형제와 자매들을 아울러 보고, 거기서 그들은 위안을 얻는다.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하여 죽으셨듯이 그들 또한 자기 형제자매들을 위하여 죽을 수 있고 그렇게 자기 죽음을 통하여 인류와 하나 될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최근에 나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에이즈로 죽어가는 예수의 십자가를 보았다. 거기서도 에이즈에 걸린 세상의 모든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이 사람들을 겁주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 희망을 안겨주고 있었다. 이 세대의 모든 죽어가는 이들이 그 십자가를 바라보며 희망을 품게 되는 것이다.

그런즉 죽어가는 이를 돌보는 것은 그들이 더 큰 그림을 볼 수 있도록, 그리하여 자신의 아픔과 괴로움이 한 개인의 불운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같은 길을 가는 인류와 자기를 하나로 묶어주는 끈임을 알고 죽는 순간까지 다른 모든 사람과 연대하여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현재 많은 에이즈 공동체들에서 이런 돌봄이 이루어지는 게 보인다. 북미 여러 도시들에서 같은 병을 앓는 젊은이들이 서로를 지원하며 죽어가는 이들을 돌보고 있다. 그들이 이 연대를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연대로 생각하거나 그렇게 말하지는 않지만, 그렇다 해도, 예수께서 그러셨듯이, 더 큰 가족과 하나 되는 마음으로 죽어가는 이를 돌보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어쩌면 죽어가는 사람이 그를 돌보는 사람보다 인생의 진실을 더 잘 직면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우리는 죽어가는 사람 앞에서 세상의 나쁜 뉴스들을 말하지 않고 감추려 한다. 그들이 조용하고 평화로운 임종을 맞게 해주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될수록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들 얘기나 바깥세상에서 전쟁과 기근에 희생되는 사람들 얘기를 들려주지 않으려고 한다. 인생의 아프고 괴로운 현실로부터 그들을 격리시키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그들을 진정으로 돕고 섬기는 길일까?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인류 가족의 한 식구로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죽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은 아닐까?

질병, 특히 이른바 난치병은 사람의 시야를 좁게 만들 수 있다. 병든 사람이 자기 몸의 혈당수치가 오르내리는 데 민감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다. 반복되는 좀 어때요?”라는 질문은 사람들에게, 그러고 싶지 않은데도, 자기 이야기를 하고 또 하게 만든다.

많은 사람이 더 큰 세계의 부분으로 남기를 바라고, 그러므로 집이나 병원 바깥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말하거나 듣기를 좋아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고로 다쳐서 입원했을 때 사람들이 찾아와서 몸이 어떠냐고 묻는 대신 나보다 큰 무엇에 관심하도록 이끌어준 것이 얼마나 고마웠던지 지금도 기억난다. 실제로 내가 세상에서 동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는 참 고맙다. 내가 앓는 병이 다른 사람들의 어려운 인생사에 대한 관심을 가로막는 게 아님을 친구들이 확인시켜줄 때 나는 용기와 힘을 얻었다. 인류가족의 형제자매들이 겪는 고통에 연결되고 다시 연결되는 것이 결코 나를 마비시키지 않는다. 오히려 이 연계로 내 몸이 치유되는 효과를 보았다. 모든 일에 미숙한 어린애로 떠받들리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아파하면서 살아가는 어른으로 대접받는 데서 치유는 이루어지는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한테 세상 모든 비참한 일을 말해주는 것이 그를 돌보는 것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그건 어리석은 짓이고 아무 도움도 되지 않을 것이다. 죽어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고통 받는 다른 사람들을 걱정하게 하자는 얘기도 아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죽을 수밖에 없는 자기 운명과 친숙해질 때 죽어가는 사람들을 세상에서 격리시킬 필요가 없고, 오히려 그들이 더 큰 인류가족의 한 식구임을 스스로 알고 남은 삶을 살게 도와줄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돌보는 사람이 죽음을 겁내지 않을 때 돌봄을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죽음을 잘 준비하면서 남들과 격리되지 않고 오히려 더 깊이 통교하도록 도와줄 수 있는 것이다.

몇 년 전, 아이맥스에서 푸른 행성이라는 단편영화를 만들었다. 우주공간에서 내려다보이는 지구별을 찍은 것이다. 광대한 우주에서 들리는 소리들이 그대로 녹음되었다. 관중은 우주선에 앉아있는 느낌으로 화면을 볼 수 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먼 거리에서 지구별을 조망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관객은 우주를 유영하는 아름답고 푸른 별이 바로 우리의 고향임을 새삼 알게 된다. 그리하여 저도 모르게 감탄하는 것이다. “, 저기서 우리가 살고 일하고 사랑을 하는 거야! 저 아름다운 별이 바로 우리 집이라고!”

아름답고 장엄한 지구별을 바라볼 때 우리는 우리라는 말의 뜻을 전혀 새로이 이해하게 된다. 이때의 우리안에는 말 그대로 모든 대륙의 모든 사람이 다 들어있다. 우주공간에서 바라보면 사람들을 증오, 폭력, 전쟁, 억압, 굶주림, 파멸로 몰아가는 인종, 피부색, 종교, 나이, 성의 구별 따위가 모두 우습게만 보인다. 먼 우주공간에서 지구별을 바라보면 지금 당장뿐 아니라 먼 미래에도 아름다운 별에서 함께 살기 위하여 우리 모두 같은 집에서 함께 살며 함께 돌보아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분명해진다.

오늘의 우주시대는 우리로 하여금 땅 위의 모든 사람이 서로 돌보며 함께 고향을 가꾸어야 한다는 사실에 눈을 뜰 수 있을 만큼 의식의 차원을 높여주었다. 멀리 우주공간에서 우리의 푸른 별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하게 된 것이다. “일찍이 예수께서 말씀하셨듯이, 진실로 우리는 한 형제자매들이다. 우리 모두 부서지기 쉬운 나약한 몸으로 태어나고 나약한 몸으로 죽어간다. 우리가 잘 살고 잘 죽으려면 서로가 서로를 돌봐주며 아름다운 고향을 함께 가꿀 필요가 있다.”

 

우주공간에서 지구별을 바라보는 눈길이 우리로 하여금 한 분이신 하느님의 자녀답게 서로를 형제자매로 돌봐야 한다는 깊은 깨달음 안에서 살고 죽을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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