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앓기만 할 것인가?
How to Be Sick
토니 번하드
[15]
선(禪)의 도움을 받아서
모든 것이
그냥 있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그대로
피어나는 꽃이어라.
보탤 것 없네. -로버트 아이트켄
불교의 선(禪)을 배우는 학생은 아니지만 나는 여러 선사(禪師)들의 글과 가르침을 즐겨 읽는 편이다. 만성질환을 앓고 있는 나에게 선(禪)이 주는 몇 가지 도움에 대하여 말해보겠다.
첫째, 선(禪)은 세상을 보는 인습적인 방식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게 충격을 준다. 내 생각들을 새로운 관점에서 돌아보게 하고, 아예 나를 생각 너머로 데려가기도 한다.
둘째, 선(禪)은 내가 얼마나 무엇을 모르는지, 알아도 얼마나 엉터리로 알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평생 지녀온 가설들을 의심하게 할 뿐 아니라 장래 일을 미리 당겨서 걱정하는 쓸데없는 짓을 하지 않도록 마음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부담으로부터 나를 해방시켜준다.
마지막으로, 선사(禪師)들은 자주 시(詩)로 나를 가르친다. 다음은 나로 하여금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게 하는 소엔 나카가와의 시(詩)다.
모든 것이,
피어나는 우주
안에서 피어나는 꽃.
보너스로 하나 더 말하면, 붓다의 가르침을 우리에게 전해주는 선(禪)의 방식(마음에 충격을 주거나 우리의 무지를 일깨워주거나 시를 써서 가르치는)은 나로 하여금 배꼽을 잡고 웃게 하는데, 그것이 내 몸에 얼마나 좋은 영향을 끼치는지는 새삼 말할 것 없겠다.
마음에 충격을
공안(公案)은 선불교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와 대화들인데 인습적인 생각의 틀로는 담아낼 수 없는 것들이라서 우리 마음에 큰 충격을 준다.
저명한 공안 해설자 무몬(無門)은 말한다, “선(禪)을 공부하려면 ‘마음 길’을 잘라버려라.” ‘마음 길’(mind road)은 우리가 의식 속에 파놓은 홈통(groove) 같은 것이다. 그것이 우리 생각들을 같은 식으로 되풀이하여 흐르게 만들고 그래서 세상을 새로운 마음으로, 처음 시작하는 자의 마음으로, 경험하지 못하게 한다.
한 수도승이 운몬(雲門)에게 물었다.
“무엇이 붓다입니까?”
운몬이 대답했다.
“똥 막대기다.”
옛날에는 막대기로 똥을 닦았던 모양이다. 그러니 요즘 말로 바꾸면 ‘휴지조각’쯤 되겠다. 이 공안에 대한 해설들이 많이 있거니와, 카추키 세키다는 이렇게 말한다.
학생이 심각하게 묻는다. “무엇이 붓다입니까?” 어쩌면 그의 머릿속에 우주를 관장하는 붓다의 장엄한 모습이 그려져 있었는지 모른다. 그런데 날아오는 스승의 답은 그 장엄한 붓다의 모습을 한 방에 날려버리는 몽둥이 같다. 이런 대답을 가리켜, ‘판에 박힌 생각의 흐름을 요절내버림’이라고 한다.
자신의 장엄한 모습을 한 방에 요절내는 붓다에 대한 세키다의 해설은 우리로 하여금 인습적인 ‘마음 길’에서 나오게 한다. 그리하여 판에 박힌 생각의 틀에서 나와 사물을 전혀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한다. 내 머리에 ‘똥 막대기’는 온갖 박테리아와 바이러스가 묻어있는 더러운 물건이다. 나는 병들어 아픈 내 몸이 곧 붓다의 몸이고 그러므로 내 몸은 해방과 자유와 깨달음으로 가는 수레라는 뜻으로 이 공안을 해석한다. 로버트 아이트켄도 이 공안을 비슷하게 읽고 있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인 수용소에 머물면서 이 시(詩)를 썼다.
열에 들뜬 밤,
흙 속에서
살진 구더기들이
붓다의 몸을 쪄내고 있네.
나는 붓다의 몸을 쪄내는(steaming) 열에 들뜬(fermenting) 내 병든 몸을, 이 시를 읽으면서 생각한다. 선(禪)은 똥 막대기와 구더기로 내 마음에 충격을 주어 병든 내 몸을, 깨달음을 향한 수레로 보게 해준다.
아, 똥 막대기 공안이 나를 얼마나 배꼽 잡고 웃게 했던가!
20세기 위대한 선사(禪師)들 가운데 하나인 코운 야마다가 로버트 아이트켄의 스승인데, 그가 쓴 공안 해설서의 제목은 ‘문 없는 문’이다. 야마다는 제자들을 격하게 다루기로 유명했던 선사(禪師) 보쿠시 이야기를 들려준다. 제자가 아직 가르침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경우, 보쿠시는 그를 문밖으로 내동댕이쳤다.
어느 날, 그가 제자인 운몬을 문밖으로 던졌는데 그 바람에 운몬의 다리가 부러졌다. 이 대목에서 야마다는 말한다.
“아이쿠!” 외치는 순간 그는 돌연 깨달음을 얻었다. 그냥 “아이쿠!”다. 다른 아무것도 아니다. 주체도 없고 객체도 없다. 상대도 없고 절대도 없다. “아이쿠!” 이것이 그의 위대한 깨달음이었다.
나는 이 이야기가 너무나 실감된다. 몸의 극심한 통증에 온통 쏠려있는 나의 모든 것이 나로 하여금 오로지 그 순간에 깨어있게 한다는 얘기 아닌가? 대상이 없다. 그것을 느끼는 주체도 없다. 그냥 아픔과 모든 것이 거기 있을 뿐이다.
오직 모를 뿐
많은 공안들이 질문으로 시작된다.
“자아가 없다면, 그렇다고 말하는 건 누군가?”
“개한테도 붓다의 성품[佛性]이 있는가?”
“무엇이 자아인가?”
한동안 나는 이런 공안들이 좀 성가셨고 머리만 어지러웠다. 지금은 ‘대답 없는 질문’으로 그냥 바라본다. “자아가 없으니 문제가 없다.”(No self, no problem). 이 공안을 빌려서 나는 말한다. “답이 없으니 문제가 없다.”(No answer, no problem). 한동안 나는 만성질환에서 내가 나을 것인가를 묻는 질문에 분노와 걱정으로 대답했었다. 지금은 그것을 하나의 공안으로 바라본다. “나는 나을까?” 내 마음에 일어나는 두 단어로 된 한 질문이다. 답은 없다. 내가 원하거나 말거나 상관없이 일어나는 이 물음을 하나의 공안으로 대하자, 그것과 나의 관계가 달라졌다. 그것을 좀 더 가볍게 상대하면서 그것이 내 마음을 관통하여 지나가기를 기다리게 된 것이다.
“이 항(抗)바이러스 요법이 내 병에 효과가 있을까?” 새로운 치료법을 시도할 때마다 나는 새 약을 삼키면서 효과가 곧 나타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지금은 새로운 방법에 효과가 있을 것인가?―를 하나의 공안으로, 답 없는 질문으로, 받아들인다. 한국의 숭산(崇山) 스님은 이것을 두고 “오직 모를 뿐”이라고 말한다.
‘오직 모를 뿐’은 내가 버티고 견디는 데 쓰는 아주 좋은 도구다. 나의 신상에 일어난 이런 저런 일을 생각하느라고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뒤척이다가 나는 문득 생각을 그치고 숭산의 ‘오직 모를 뿐’을 기억한다. 침대에 들 때마다 나는 소리 없이 말한다. “내가 잠을 잘는지 못 잘는지 나는 모른다. 그러니 이리저리 머리 굴리지 말자.” 이 생각은 나를 고요히 가라앉히고 ‘오직 모를 뿐’을 명상하다보면 어느새 잠들어 있다. 그 힘든 날들을 나는 ‘오직 모를 뿐’으로 견딜 수 있었다.
틱낫한은 좀 다른 앵글로 선(禪)에 접근한다. 그는 우리에게, 무슨 생각이 날 때마다 그대로 행동하기 전에 “정말 그런가?”를 물어보라고 한다. 효과만점인 수련법이다. 자기 생각이나 견해에 집착하는 것이 온갖 고통의 원인이기 때문이다. 나는 병들기 여러 해 전에 틱낫한의 가르침을 알았고, 그 가치를 일상생활에서 발견하였다.
옷을 사러 백화점에 갔을 때였다. 계산대 앞에 줄을 지어 서 있는데 점원이 고개를 들고 “다음 분?” 하자, 내 뒤에 서 있던 여자가 나를 제치고 앞으로 나갔다. 나는 “미안합니다. 내가 먼저예요.”라고 점잖게 말하려다가 갑자기 틱낫한의 “정말 그런가?”가 떠올랐고 그래서 그 여자를 앞에 세웠다. 내가 그 여자보다 먼저인 것은 99%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 여자를 먼저 계산대 앞에 세워준 것은 나에게 굉장한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그녀에게 나의 너그러움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그녀가 나보다 먼저 계산하게 해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녀가 잠깐 잘못 판단하여 나를 앞지르려고 한 것에 대하여 당황하고 민망해하지 않아도 되게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론, 내가 먼저라는 것도 100% 분명한 사실이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99%였다.
그 뒤로 “정말 그런가?”는 나의 중요한 수련방법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이 의사는 나를 치료해줄 마음이 없어.” 정말 그런가? 어쩌면 오늘 지나치게 많은 환자들을 만났고 그래서 지친 상태인지 모를 일이다.
“이 친구는 더 이상 나한테 관심이 없는 거야.” 정말 그런가? 어쩌면 집안에 무슨 일이 생겼거나 직장의 업무가 밀렸는지 모를 일이다.
“나는 좋아지지 않을 거야.” 정말 그런가?
“나는 더 이상 생산적인 생활을 할 수 없게 됐어.” 정말 그런가?
나는 틱낫한의 이 한 마디로, 수많은 가정(假定)과 견해를, 그리고 그에 따른 행동을 놓아버릴 수 있었다. 자기 생각이 과연 진실인지를 조사해보는 바이런 케이티의 방법과 더불어 틱낫한의 ‘정말 그런가?’에서 나는 참으로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선(禪)의 노래
선(禪)의 가르침은 짧고 단순한 성격을 지닌다. 공안과 함께 게송(偈頌)이 있고 하이쿠가 있다. 게송은 수련을 일깨워주는 짧은 문장이다. 이것들의 특성은 만사를 꿰뚫어보는 힘이 있고 반짝거리고 그리고 사람을 웃게 해주는 데 있다.
게송은 우리로 하여금 일상생활 속에서 현재 순간에 현존하도록 도움을 준다. 자기의 게송들을 모아놓은 책, ‘지금 이 순간, 놀라운 순간’에서 틱낫한은 ‘명상과 시(詩)로 하는 수련’이 게송이라고 말한다.
여기 발을 씻으면서 하는 그의 게송이 있다.
발가락마다 평화와 기쁨이여,
나의 평화와 기쁨이여.
쓰레기를 버리면서 하는 게송도 있다.
쓰레기에서 장미를 보네.
장미에서 쓰레기를 보네.
모든 것이 변하네.
모든 것이 무상(無常)하네.
불교 수련을 시작은 했지만 아직 현재 순간에 깨어서 마음을 모으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을 때 나는 이 작은 보물 책을 어디든지 끼고 다녔다.
로버트 아이트켄의 ‘잠들지 않는 용(龍)’도 내가 아끼는 게송 집(集)이다. 그의 게송은 말 그대로 명상과 시로 하는 수련이다. 그의 많은 게송들이 나를 웃게 만든다.
시심(詩心) 더하기 웃음! 만성질환을 앓는 사람에게는 참 좋은 치료약이다.
여기 아이트켄의 게송 한 수(首) 옮겨 놓는다.
변덕스러운 잡념이 끊이지 않을 때
나는 맹세한다,
붓다도 가끔 바보 같은 생각에 잠겼음을
기억하겠노라고.
거리에 차가 막혀 끝이 안 보일 때
나는 맹세한다,
세상이 움직일 때 비로소 움직이고
세상이 멈출 때 멈추겠노라고.
뜰에 쌓인 낙엽을 긁어모으며
나는 맹세한다,
부질없는 생각들로 거름을 만들어
도(道)의 콩을 기르겠노라고.
하이쿠는 선승(禪僧)들이 즐겨 사용하는 일본 시문학의 독특한 형식이다. 내가 특히 사랑하는 하이쿠 시인은 18세기의 코바야시 잇사(一茶)다. 잇사는 두 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고 자신의 세 아이도 젖먹이 때 모두 잃었다. 그런데도 그의 하이쿠, 특히 벌레 같은 미물(微物)을 노래한 하이쿠는 영락없이 나를 웃게 만든다.
후지 산을 오르네,
저 달팽이,
느리게, 느리게.
귓가에 모기,
내가
귀머거리인 줄 아는가?
나 외출한다,
파리야,
맘 놓고 사랑하렴.
한평생 온갖 불행을 맛보며 살았던 그가 어쩌면 이토록 세심한 관찰과 자유분방함과 충만한 기쁨으로 시를 쓸 수 있었을까? 감동받지 않을 수 없다.
선(禪)의 도움 받는 세 가지 길에 대한 이 장(章)을 잇사의 하이쿠로 마감해야겠다.
이슬 세상은
이슬 세상이다.
그렇지만, 그래도…
잇사의 시들은 나로 하여금 세상을 새로운 눈으로 보게 해주었다. 그것은 ‘오직 모를 뿐’임을 유지하는 마음의 눈이다. “이슬은 이슬이다.” 그는 분명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마지막 줄에서 말한다. 분명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이슬은 덧없는 성질 때문에, 우리 눈에 보이는 것 같지만 이내 다른 것으로 바뀌고 만다. 마침내, 잇사의 마지막 한 줄이 나에게 충격을 주어 나로 하여금 내 의식에 깊이 패어 있는 홈통, ‘나는 환자’라는 홈통에서 나오게 해주었다.
이제 나는 잇사의 하이쿠를 내 식으로 바꿀 수 있게 되었다.
환자는
환자다.
그렇지만, 그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