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별(識別)
Discernment
네가 누군지를 기억해내라
―자기 정체를 식별함―
너는 나에게 내가 누군지 말해줄 수 없고, 나는 너에게 네가 누군지 말해줄 수 없다.
네가 네 정체를 모른다면, 누가 네 정체를 알겠는가? -토머스 머튼
나는 누구인가? 모든 사람이 한평생 살면서 스스로 묻고 답을 찾는 질문이다. 자기한테 이름을 지어주고, 살면서 맡게 되는 역할이 자주 바뀌는 것을 보면서 자신의 가치와 신념을 좇아 살고자 노력하는, 이것이 우리의 평생 과제다. 내가 누구라고 다른 사람들이 말해주는 그것이 나인가? 우리가 성취한 무엇, 그래서 명함이나 명패에 새겨두는 그것이 우리인가? 누가 나인가? 누가 우리인가?
형제자매 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같아진, 그러나 죄는 없으신, 예수와 우리가 같은 존재라고 기꺼이 주장할 수 있다.
“자녀들이란 살과 피를 함께 나눈 자들을 가리키는 말인데, 예수께서 같은 살과 피를 나누어 가지신 것은 당신의 죽음으로 죽음의 권세 잡은 자 곧 악마를 멸망시키고 한평생 죽음에 대한 공포로 종살이하는 사람들을 해방시키고자 함이었습니다. 분명히 그분은 천사들을 붙잡아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붙잡아주기 위해서 오신 분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모든 점에서 당신 형제들과 같아지는 것은 마땅한 일이었지요. 그래서 그분이 자비롭고 진실한 대사제로서 하느님을 섬기고 백성의 죄를 없애실 수 있었던 겁니다. 그분이 시험을 당하여 고난 받는 이들을 도와주실 수 있는 것은 몸소 같은 일을 겪으셨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2, 14-18).
이 말이 진실이라면, 나는 그렇다고 믿는데, 그렇다면 우리 또한 하느님의 사랑하시는 자녀들이다. 예수와 우리 사이에는 본질상 아무 다름이 없다.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인 것과 똑같이 우리도 하느님의 아들이요 딸이다. 예수를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의 ‘공동 상속자’가 되었다. 하느님이 예수에게 가르쳐주신 모든 것을, 그를 따르는 자들이 공유하게 된 것이다. 로마서 8장의 ‘양자(養子)’라는 말은 ‘하느님의 독생자’인 예수에 견주어 덜 중요한 존재라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되어, 하느님이 예수에게 물려주신 유산을 똑같이 물려받고 신성한 생명(divine life)으로 들어간다는 그런 뜻이다.
우리보다 더한 우리
이 땅에서 예수에게 주어진 사명은 우리를 당신의 신성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당신이 아는 것보다 덜 알고 당신이 한 것보다 덜 하기를 예수는 결코 바라지 않는다.
당신처럼 되라고, 당신이 한 일을 하라고, 우리를 부르신다. “내가 진정으로 말하는데, 나를 믿는 사람은 지금 내가 하는 일을 할 뿐 아니라 이보다 더한 일도 할 터인즉…”(요한 14, 12). 이는 예수의 진심어린 말씀이었다. 예수는 우리의 몸과 마음이 온전하게 당신 있는 곳에 있기를, 당신의 정체가 곧 우리의 정체이기를, 우리의 영성생활이 당신의 그것과 일치되기를, 그리하여 당신이 오직 하느님 안에서 당신의 삶을 사셨듯이 우리도 오직 하느님 안에서 우리의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라신다.
베드로는 둘째 편지에서, “이렇게 그분은 위없이 높고 값진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고 그 약속에 근거하여 그대들은 정욕으로 말미암은 세상의 부패를 떠나 하느님의 본성을 나눠 가지게 되었습니다.”(베드로후서 1, 4)라고 썼다. 달리 말하면, “우리는 우리보다 더한 우리다(We are more than ourselves).” 예수가 신성이면서 인성이듯이 우리도 인성이면서 신성이다! 예수는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고 말함으로써 이 진실을 분명히 밝혔다. 그들이 “사람인 주제에 스스로 하느님과 같다고 하니, 그토록 불경스러운 말을 하는 너를 어찌 그냥 둔단 말이냐?”며 비난하자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했다(요한 10, 30-34).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확신이 우리 신앙의 중심에 있다. 아버지께서 당신 아들 예수에게 하신 말씀, “너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나를 기쁘게 해주는 아들이다.”(루가 3, 22). 이것은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이다.
다시 말한다, 예수에게 하신 말씀은 곧 당신에게 하신 말씀이다. 안다, 동의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 아니면 딸이다. 믿어지는가? 당신은 이 말을 그냥 머리로 귀로 들어 넘길 게 아니라 저 아랫배로 들어서 당신의 삶 자체가 달라져야 한다. 성경으로 들어가서 읽어보라. “내가 너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였다. 영원 전부터 네 이름을 내 손바닥에 새겨놓았다. 내가 너를 흙으로 빚었고 네 어미 태에서 너를 조직하였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너를 껴안는다. 너는 내 것이고 나는 네 것이다. 우리는 서로 속해 있다.” 당신은 이 말을 들어야 한다. 영원 전부터 당신에게 들려주는 이 신성한 말을 들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당신의 삶은 갈수록 사랑받는 삶이 될 수 있고, 그것이 바로 당신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이 진실을 믿게 될 때 당신의 영적 깨달음이 더욱 깊어져서 마침내 당신의 일상생활이 바뀔 것이다. 여전히 당신은 배척당하고 거절당하고 아픈 상실을 경험하겠지만, 그러나 더 이상 자기 정체를 탐구하는 자로서 그것들을 경험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로서 그것들을 경험할 것이다. 자기가 누군지를 아는 자로서 당신의 아픔과 괴로움, 성공과 실패를 겪어나갈 것이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많은 사람이 참 자기가 누군지에 대한 진실을 주장하고 살아가는 일에 끊임없이 실패하고 좌절한다.
자기가 사랑받는 존재임을 주장하기
라르슈 데이브릭 공동체 신부로 들어가서 살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나는 사랑받는 존재로서 남을 축복하는 게 무엇인지를 절실하게 경험하였다. 하루는 기도회를 시작하기 직전에 공동체 식구인 아그네스가 나에게 말했다. “헨리, 나를 축복해주시겠어요?” 나는 자동으로 엄지손가락을 그녀 이마에 대려고 하였다. “아니, 그렇게는 말고.” 그녀가 말하였다, “진짜 축복을 해달라고요.” 나는 내가 적절치 못하게 반응했음을 곧 알아차렸다. “아, 미안해요. 이따가 모두 모인 자리에서 해주지요.” 그녀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특별한 감동이 내 몸을 감싸는 게 느껴졌다.
모임을 마치고 서른 명쯤 바닥에 그대로 앉아있는 자리에서 내가 말했다. “아그네스가 축복을 부탁했는데, 지금 이 자리에서 하는 게 좋겠네요.” 아그네스가 일어나 내게로 걸어왔다. 나는 그녀를 향해서 두 팔을 들고 있다가 머리를 가슴으로 안았다. 두 손을 어깨 위에 얹자 내 양쪽 소맷자락이 그녀 등을 덮었다. 내가 눈을 들여다보며 말하였다. “아그네스, 당신이 하느님의 사랑받는 딸임을 당신이 알았으면 좋겠어요. 당신은 하느님이 눈동자처럼 아끼시는 딸입니다. 당신의 예쁜 미소와 당신의 따뜻한 친절은 당신이 얼마나 아름답고 소중한 영혼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지요. 아그네스, 요 며칠 당신이 조금 우울해하고 가슴에 슬픔이 괴어있는 것, 나도 알고 있어요. 하지만 진짜 당신이 누군지를 당신이 기억해냈으면 정말 좋겠네요. 그래서 하느님과 당신을 아는 모든 사람들로부터 깊은 사랑을 받고 있는 아주 특별한 사람이 바로 당신인 것을 알았으면 해요.”
내가 이렇게 말하자, 아그네스가 웃으며 나를 쳐다보고 말하였다. “고마워요, 헨리. 아까 것보다 훨씬 좋아요.”
우리가 서로에게 해주는 축복은 영원 전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을 나누는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 안에 있는 우리의 참 자아에 대한 궁극적 헌사(獻辭)요 확인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도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가 죽은 뒤에도 우리를 사랑하실 것이다. 이것이 진실이다. 하느님은 흙으로 우리를 빚으셨다. 우리를 어머니 태에서 조직하셨다. 우리 이름을 당신 손바닥에 새기셨다. 우리 머리털을 하나하나 헤아리신다. 우리는 하느님의 영원하신 품에 안겨있다. 영원에서 영원으로 우리는 그분께 속해 있다. 진짜로 우리는 하느님의 딸이요 아들이다. 사랑받는 자녀인 우리의 신분은 하느님의 기억 속에 안전히 보관되어 있다. 우리가 가치 있는 어떤 일을 이루든지 말든지, 무슨 중요한 성과를 올리든지 말든지, 하느님은 조건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지, 무엇을 하든지, 우리를 안전하게 잡아주고 우리의 가치를 인정해주는 것은 아버지요 어머니인 그분의 강하고 생명력 있는 사랑이다.
우리의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인 임무는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무조건 사랑을 기억하고 주장하는 것이다. 하느님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기억해내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받는 하느님의 자녀임을 가슴으로 알 수 있다. 그것은 머리의 이해를 훨씬 뛰어넘는 심오한 깨달음이다.
이는 주장하기가 쉽지 않은 자기 정체성이다. 왜냐하면 사랑을 받으려면 성공하고 유명해지고 힘도 있어야 하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에게 성공하라고, 유명해지고 힘도 가지라고, 그래야 사랑하겠다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일단 자기의 참 자아를 알게 되고 하느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받아들이면 누구나 세상 안에 살면서 세상에 소유당하지 않을 수 있다. 자기를 해치거나 실망케 하는 자를 미워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용서할 수 있다. 자기가 조건 없이 사랑받고 있음을 기억함으로써 얻게 되는 가장 아름다운 결실은 그 하느님의 무조건 사랑을 남들과 나누는 것이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는데, 우리도 ‘하느님처럼(like God)’ 사랑할 수 있다.
자기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임을 받아들이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참 자아가 되어 참 자아로 살라는 소명(召命) 앞에 서게 된다. 사랑받는 존재로 되는 것, 참 자기가 누군지를 기억해내는 것, 이것이 우리가 이번 생에서 받을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이다. ‘축복하다’라는 라틴어 ‘베네디체레(benedicere)’는 ‘잘(bene) 말하다(dictio)’ 또는 ‘좋게 말하다’라는 뜻이다. 나는 나에 대하여 좋게 말하는 것을 들을 필요가 있다. 당신에게도 그럴 필요가 있음을 나는 알고 있다. 나는 스스로 우쭐한 감정이 아니라 하느님이 하시는 일에 대한 겸허한 깨달음에 의하여, 하느님이 나와 당신한테 하신 일을 두고 좋게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참 자아를 회복하다
예수는 우리에게 영성생활, 새로운 정체성, 참 자아를 회복시켜주기 위하여 세상에 오셨다. 참 자아는 세속의 망가지기 쉬운 구조에 더 이상 의존하지 않고 아버지와 아들, 사랑하는 부모와 모든 것이 결핍된 자식 사이의 사랑, 성령이라는 이름의 사랑에 의존한다. 그동안 우리는 참 자아를 찾으려고, 인생의 진정한 목적과 의미를 찾으려고, 낯선 땅을 헤매는 것과 같았다. 그러고 있는 우리 가운데 예수가 서서 우리로 하여금 참 자아를 회복할 수 있게 하려고 우리를 집으로 손짓하여 부르신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로, 예수의 형제자매로, 하느님 안에서 성령으로 숨 쉴 때, 그때 우리는 참된 자기가 누군지를 알고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게 된다.
하느님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바르게 식별하는 것이 그래서 중요하다. 복음서에는 사람들의 질문에 곧장 대답하지 않는 예수의 모습이 적지 않게 등장한다. 예컨대,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두 아들을 당신 왕국의 좌우에 앉혀달라고 했을 때 예수는 “지금 그대들이 청하는 게 무엇인지 아오? 내가 마실 잔을 그대들이 마실 수 있소?”라고 대답하신다. 그가 그렇게 대답하신 것은 그들을 참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질문이 잘못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하느님 안에서의 삶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참 자기가 누군지를 모르는 자들의 두려움과 걱정으로 가득 찬 세속적인 질문이었다.
자기가 하느님께 속해 있고 하느님 생명의 한 부분임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그만큼 하느님의 가슴(heart)을 알게 된다. 하느님의 가슴에 가까이 갈수록 우리의 필사적인 질문―내가 뭘 해야 하지? 어떻게 하면 그걸 손에 넣을 수 있을까?―들은 시들해진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의 성소에서 새로운 질문을 만나고 그 답을 찾기 시작한다. 하느님 안에서 새 귀로 듣고 새 눈으로 보고 새 마음으로 진실을 식별하게 되는 것이다. 그에 견주면 과거 우리 마음을 점령했던 것들은 모두 의미 없는 것들이다. 하느님의 눈으로 보면 지난날 그토록 우리에게 중요했던 가치들이 우스워진다. 우리를 두렵게 하던 것들이 더 이상 우리에게 힘을 쓰지 못하고 우리를 널리 멀리 헤매고 다니게 하던 것들이 더 이상 우리를 밀거나 당기지 못한다. 그 대신,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듯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자기가 누군지를 기억해내다
자기 정체에 대한 진실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갈 때 우리는 평화와 기쁨을 느끼지 못할 수 있다! 자기의 어떤 부분을 자기로 받아들이지 않고 근사한 모습의 자기만을 자기라고 주장하기가 얼마나 쉬운가? 당신은 무슨 일에 실패할 때도 당신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음을 기억할 수 있는가? 당신이 누구를 해쳤을 때도? 그럴 때도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의 풍성한 사랑으로 살라고 부르는 음성을 우리의 상처와 허물 아래에서 들어야 한다.
저 사막의 교부들이 그랬듯이, 홀로 명상에 잠겨있을 때 아직 치유되지 않은 우리 속의 상처들이 고개를 내밀고 자기를 주목하라고 알아달라고 호소한다.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경험만을 자기 경험으로 선택하고 나머지는 모두 버리는 성향이 우리 모두에게 있다.
이상적인 에고의 모습은 지능, 경력, 아름다운 용모, 도덕적 품위 같은 것들에 연관된 기대와 동경들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부정하고 싶은 어두운 면이 있을 뿐 아니라, 스스로 만든 이상적인 우리보다 더한 우리가 있다. 여기에 존재의 신비가 있다. 우리의 참 자아는 당신의 형상대로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 안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형상과 영을 지닌 존재들이다. 참 자아는 가장 깊은 자기 안에 계시(啓示)된 하느님이다.
때로 고요한 명상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한 개인보다 더한 존재임을 발견하고 참 자아를 느끼기도 한다. 그렇게 하여 우리 가슴 안에서 우리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는 이의 영상(影像)을 조금씩 천천히 보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도 우리를 사랑하셨고,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거나 사랑받을 자격이 있음을 스스로 입증하려 하기 전에도 우리를 사랑하신 하느님을 기억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보다 더한, 우리가 생각하거나 표현할 수 있는 것보다 더한, 우리 몸보다 더한, 우리의 인격과 성품보다 더한 우리다. 이것이 진실이다. 오늘 현대인들이 지나칠 정도로 심리학에 의존하여 거기에서 최종의 답을 얻으려는 것은 문제지만(나도 심리학자다!), 심리학적 탐색의 아름다운 가치는 그것이 한 인간의 성품 너머를 손가락질할 수 있다는 점이다. 정신질환자의 심층에는 자기 안에 계신 하느님께로 옮겨가려는 사람이 있다. 심리학은 인간 존재의 여러 부분들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언어들을 우리에게 줄 수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 어떤 성품이나 부조리로도 설명될 수 없는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신학이 필요하다. 우리는 과학이 파헤칠 수 있는 것보다 더 깊고 더 넓은 무엇이다. 그것이 우리가 이른바 ‘영혼’(soul)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의 가장 개인적이면서 하느님을 닮은(Godlike) 무엇에 대하여 말할 때, 그 말에 담겨있는 뜻이다.
참 자아로 살기
자기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받아들이고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정말 어려운 일이다. 끝없는 요구들이 우리를 밀고 당기는 세상에서 ‘하느님 안에 있는’ 우리의 참 자아를 기억해내고 그 신성한 생명을 지금 여기에서 살아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니다. 우리의 정체성이 너무나 이 세상의 구조와 정신으로 두텁게 포장되어 있어서 세상이 우리에게 이것이 너라고 말하는 그 무엇으로, 부자 또는 가난한 자, 장애인 또는 정상인, 좋은 사람 또는 나쁜 사람, 정서가 안정된 사람 또는 불안한 사람으로 살지 않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다.
나는 프랑스에서 장애인들과의 만남을 통해 많은 도움을 받았다. 처음 그곳에 도착했을 때 나는 과중한 업무와 정신적 스트레스 때문에 거의 탈진되어 휴식이 필요한 상태였다. 거기에서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내가 이룬 학문적 업적 따위에는 아예 관심조차 없는데, 그런데도 나를 진실하고 따뜻하게 받아들여주는 사랑어린 사람들을 만났을 때 내 안에서 새로운 지평이 펼쳐졌다. 그들의 아무 조건 없는 영접은 웅크린 나의 장벽을 뚫고 스며드는 깊고 따뜻한 사랑을 일별(一瞥)하게 해주었다. 나로서는 영원에서 영원으로 이어지는 아버지 하느님의 ‘첫사랑’을 경험한 것이었다. 그냥 내가 누구인지를, 다른 사람들을 온전히 사랑하고 싶지만 기력이 탈진된 교수이자 사제인 나를, 날마다 확인시켜주는 여리고 약한 이들의 사랑이 나로 하여금 하느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기억해내는 여정으로 들어서게 하였다.
프랑스를 방문하고 얼마 안 되어 우크라이나에 갈 일이 생겼다. 그곳의 한 수련모임에서 참 자기를 식별하는 주제로 강의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우리가 하느님이 사랑받는 자녀임을 기억해내고 다른 사람들도 자기가 그렇다는 사실을 알 수 있도록 도와주자는 내용으로 얘기를 하였다. 그때 한 젊은이가 토머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들고 오더니 그 한 쪽을 내게 보여주는데, 거기에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며 자기가 아무것도 아님을 잊지 않을 때에 비로소 영성생활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나의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인간관이 적지 않게 부담스러웠던 것 같았다. 나는 그의 마음에 동감하면서, 하느님은 “당신 종들의 겸손함을 굽어보시고 그들을 들어 올리셔서 당신 아들 예수를 사랑하셨듯이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셨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그에게, 우리가 자기를 아무것도 아니라고, 죄 많고 쓸모없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자리가 아니라 자기가 본디 하느님의 자녀임을 기억해내는 거듭난 자리에서 살라고 부르심 받은 것임을 말해주고 싶었다. 그는 내 말을 이해해보려고 노력했지만 끝내 자기의 진실로 받아들이지는 못하겠다고 말했다. 그 젊은이 하나만 그럴 리가 없다.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너는 무가치한 존재라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다고, 그렇게 배우며 자라고 있다.
우리에게 무슨 능력이 있어서 하느님의 사랑을 얻어내는(earn) 것은 물론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옹근 삶을 주시려고 예수를 통하여 오셨다는 진실을 잊으라고 한다면 그건 더욱 아니다. 우리는 그 진실 안으로 성숙해 들어갈 수 있다. 그분의 조건 없는 사랑은 우리의 이해력을 뛰어넘는 하나의 신비이기 때문이다.
젊은이가 손에 들고 있던 ‘그리스도를 본받아’는 우리에게 하느님이 필요한 분이지만 우리가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를 사랑하시게 만들 수는 없음을 말해주는 고전이다. 나는 젊은이가 자기의 조국인 우크라이나, 특히 타보르 산의 ‘향심기도’에 대한 강조가 그리스도교 명상에 끼친 공헌도 알았으면 좋겠다. 인간의 죄악에 직면하여 하느님의 은총을 말하는 그 전통에는 위대한 아름다움이 있다. 서양 그리스도인들은 이 점에서 동양의 형제자매들로부터 배울 것이 많다.
인간의 죄악에 대한 깨어있음이 서양에서는 자주 흐릿해진다. 많은 사람이 자기는 충분히 괜찮고 그래서 하느님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어떤 그리스도교 전통은 인간의 악행을 지나치게 많이 강조하고 있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그렇다. 복음서는 인간의 악행과 노예근성보다 자유와 존엄을 더 많이 부각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서적 가치관의 균형과 사람에게 힘을 실어주는 쪽으로 복음서를 읽는 것이다. 겸손, 오래 참음, 순종에 대한 영적 가치들이 자유, 인간의 존엄, 자기-신뢰와 나란히 인정되어야 한다. 인간존재의 태생적 가치와 본질적 존엄을 주장하는 복음은 남녀평등, 건강한 주거환경과 교육제도를 위해 일하는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고 정의와 평화를 위한 투쟁을 뒷받침한다.
그래서 다시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당신은 누구인가?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들이다. 신의 형상을 지닌 존재로서 자기와 남을 해치기도 하지만 껴안고 치료해주기도 하는 인간들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요, 예수가 우리를 사랑받는 자녀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말을 거듭거듭 들어야 한다. 그럴 필요가 있다. 예수는 우리에게 하느님 말씀을 듣는 법, 하느님 말씀을 대언하는 법, 하느님이 맡기신 일을 하는 법에 대하여 본을 보여주시며 자세하고 친절하게 가르치신다. 아버지께서 당신 사랑에 경계를 두지 않으신 것처럼 너희도 사랑에 경계를 두지 말라고 하신다(마태오 5, 43-48). 먹든지 자든지 놀든지 기도하든지 말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간에 하느님과 함께 하라고, 그리하여 우리의 모든 말과 생각과 행동으로, 사람들을 예외 없이 품어주시는 하느님의 무한 사랑 안에서 우리가 살고 있음을 보여주라고 하신다. 우리가 무슨 선행을 했기 때문에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본디 그런 분이기 때문에 사랑받는 것이라는 비밀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우리 또한 그와 비슷하게 남들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고 하느님의 가슴으로 섬기는 줄을 알 때, 무엇을 하고 누구를 섬길 건지에 대한 식별이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가난하고 상처입고 병든 이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이 진실에 대하여 우리가 할 수 있는 반응의 전부임을 알고, 우리 모두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들임을 아는 그만큼, 우리의 부름 받는 장소 또한 넓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