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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이야기

[스크랩] 시보네 에세이 64 / 풍기 땅이 품은 이야기

작성자신광철|작성시간26.06.10|조회수21 목록 댓글 0

시보네 에세이 64

풍기 땅이 품은 이야기

 

 

땅은 말이 없다.

그러나 땅은 이야기를 품는다.

오랜 세월

사람들의 발자국이 쌓이고

바람이 지나고

눈물과 기도가 스미면

그 땅은 마침내 이야기가 된다.

 

내 고향 풍기.

 

나는 그 이름만 들어도

소백산 자락의 찬 공기가

코끝에 실려 오는 것 같다.

 

풍기는 예부터 '기주(基州)'라 불렸다.

땅의 고을, 터의 고장.

 

소백산이 북서쪽을 병풍처럼 두르고

금계천이 좁은 계곡을 타고

조용히 남쪽으로 흘러내린다.

 

산지가 전체의 76퍼센트.

사방이 산으로 막혀 있으니

세상의 소란이 쉬 들어오지 못하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쉬 빠져나가지 못했다.

 

그래서였을까.

풍기 사람들의 이야기는

유달리 깊고 진했다.

 

달밭골의 명당과,

아직 오지 않은 임자

 

소백산 가장 깊은 골짜기

삼가리 달밭골.

 

길에서는 집이 보이지 않는다.

산 등성이와 숲이 가려

사람이 사는지조차 알 수 없는 곳.

 

이곳에는 오래된 이야기 하나가

산안개처럼 떠돈다.

 

도선국사의 지리서에 의하면

이 골짜기에 '옥토망월(玉兎望月)'의

명당이 있다 했다.

옥토끼가 달을 쳐다보는 형상.

맞은편 산이 반달처럼 생겼으니

그 형국이 들어맞는다고.

 

소백산 자락에

금선정과 금양정사 역사의 주인공

선비 황준량이 그 명당을 알아보고

달밭골로 들어와 살았다.

거기 묻힐 작정으로.

 

그러나 자식들은 아버지의 뜻을 몰랐다.

장례 때 달밭골 밖으로 내려가

엉뚱한 자리에 묻어버렸다.

 

그래서 지금도 그 명당은

임자를 기다리며 남아 있다고 한다.

 

달밭골의 노인은 말했다.

"아직도 그 명당이 남아 있다고.“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생각했다.

어쩌면 명당이란

땅에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제 자리를 알아보는 눈을 가진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명당을 완성하는 것인지.

희방사와 호랑이의 보은

 

죽령을 넘으면 희방사.

 

신라 때 두운 도사가 경주 불국사를 떠나

소백산 깊은 골짜기에 움막을 짓고

홀로 수도하던 어느 밤.

 

호랑이 한 마리가 찾아와

목을 쑥 내밀었다.

들여다보니 목구멍에

비녀가 걸려 있었다.

도사는 두려움 없이

호랑이 목구멍 깊숙이 손을 집어넣어

비녀를 빼주었다.

 

열흘 뒤.

그 호랑이가 되돌아왔다.

열일곱여덟 살 처녀를 등에 업고.

 

밤에 변소에 갔다가 호랑이에게 물려온

경주 유정승의 딸이었다.

 

은혜를 갚은 것이다.

 

도사는 처녀를 살려 경주로 데려갔고

감격한 유정승은

그 자리에 절을 지어주었다.

기쁨을 얻은 자리라 하여

희방사(喜方寺).

 

이 이야기를 전해준 권오봉 할아버지는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이렇게 말했다.

 

"인간 구제를 하면 덕이 안 돌아오고,

짐승 구제를 하면

덕이 돌아온다고 그랬어.“

 

한참 생각했다.

짐승도 은혜를 갚는데

사람은 왜 그러지 못할 때가 많은가.

이야기는 그 물음을

조용히 던지고 있었다.

 

호랑이가 노랗게 물들이는 세상

 

소백산 골짜기에는

호랑이 이야기가 넘친다.

 

이인배 어른은 젊은 날

삼촌을 따라 달밭골에

더덕을 캐러 갔다가

바위 위에 앉은 호랑이와 마주쳤다.

"갑자기 하늘이고 땅이고

전부 노래지는 거여.

눈을 아무리 닦아도 노래.

소리를 지를라 그러이께 말이 안 나와.

입이 안 떨어지는 거여."

 

온 세상이 노랗게 변하고

말을 잃어버리고

몸이 얼어붙는 경험.

 

시력이 사라지고

언어가 사라지고

계절 감각도 사라진다.

 

호랑이의 공포는

그렇게 사람의 모든 감각을

한꺼번에 빼앗아 갔다.

 

그런데 그 호랑이가

산신령이기도 하다는 사실.

 

황씨 문중 제실에 호랑이가 내려와

제사를 못 지내게 하면

그것은 제사 준비에 부정이 탔다는 신호.

 

효자 옆에는

호랑이가 와서 함께 잠을 자고

덕망 있는 선비의

길목을 막아 목숨을 구해준다.

 

약수터에는 호랑이가 지키고 서서

정성이 지극한 사람만 물을 마시게 한다.

 

산에 사는 짐승인 줄 알았더니

선악을 판단하고 운명을 가리는 존재.

 

풍기 사람들에게 호랑이는

그냥 짐승이 아니었다.

그것은 소백산이 스스로 깨어 움직이는

산신의 몸이었다.

 

금계촌 — 닭이 알을 품는 땅

 

풍기 금계촌.

 

이곳은 정감록이 손꼽는

십승지지(十勝之地) 가운데 첫째다.

 

"첫째로 이르기를,

풍기 차암(車岩)의 금계촌이라."

 

소백산 연화봉 남쪽 줄기가

내려오며 이루는 지세가

마치 금빛 닭이 알을 품고 있는 형상,

'금계포란형(金鷄抱卵形)'.

 

새 생명을 품고 부화시키는 땅.

 

이 이야기를 믿고

평안도, 황해도에서

먼 길을 달려온 사람들이

이 골짜기에 집을 짓고 눌러앉았다.

멀리 이북에서 고향을 등지고.

 

그중 한 사람인

최현철 할아버지는 말했다.

 

"잘 사는 건 호의호식하며

부귀영화를 누리는 게 아니고

마음에 부족함 없이 사는 것.“

 

길지를 찾아 왔으나

진정한 길지는 땅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는 것을 알아버린 사람.

 

그는 달밭골 산골짜기 외딴 집에서

자연과 더불어

이미 길지의 삶을 살고 있었다.

 

 

이인들의 이야기

— 오지 않은 세상을 향한 꿈

 

정감록이 예언한 진인(眞人)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 가까운

이인(異人)들의 이야기는

이 땅 곳곳에 살아 숨 쉬었다.

 

솔씨 하나를 주워

그 씨가 자라 관가의 대들보가 되고

수백 년 뒤 그것이 부러질 때

자신의 칠대 후손이

그 자리에 있을 것을 예견한 최치원.

 

순간 속에 영원을 읽고

부분 속에 전체를 본 사람.

다산 정약용의 이야기도 있다.

 

이웃집에 바둑을 두러 갔다가

안채에서 들려오는

며느리의 다듬이 소리를 듣고

그는 친구에게 조용히 말했다.

"지금 당장 며느리를 내보내지 않으면

이 집이 망합니다.“

 

천하 효부를 내칠 수 없었으나

친구는 할 수 없이 며느리를 쫓아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산길.

쫓겨난 며느리가 빗속을 걷다

남편과 마주친 바로 그 순간,

둘이 막 비를 피했던 큰 바위가

굉음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다듬이 소리 속에서

오지 않은 죽음을 읽어낸 사람.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이면서도

유배지 강진에서 백성의 편에 섰던

그가 풍기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는

시공간을 꿰뚫어 보는

예언자로 살아 있었다.

 

아기장수 이야기도 있다.

눈동자가 셋인 아이가 태어났다.

힘이 장사였다.

부모는 두려웠다.

나라에서 역적으로 몰릴까 봐

아기의 발뒤꿈치 힘줄을 끊어버렸다.

 

그렇게 세상의 두려움이

영웅을 죽였다.

 

그러나 이야기는 죽지 않았다.

죽인 것이 아니라 숨긴 것이라 했다.

언젠가 진인이 나타나리라는 믿음은

이야기의 형태로

대를 넘어 전해졌다.

 

땅이 품은 이야기,

이야기는 씨앗이다

 

민속학자 임재해 교수는 이렇게 썼다.

 

"풍기 사람들은 설화를 통해서

변혁의 꿈을 계속 다지며,

풍기 땅에 미래의 전망을

생산적으로 설계하고 있다.“

 

이야기는 과거의 기록이 아니다.

이야기는 미래를 향한 씨앗이다.

 

달밭골의 옥토망월 명당이

아직 주인을 기다리듯,

금계포란형의 땅이

새 생명을 기다리듯,

정도령의 출현을 기다리듯,

 

풍기 사람들은 늘 기다렸다.

 

그러나 그 기다림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었다.

덕을 쌓고, 적선을 하고,

마음을 가다듬으며

스스로 그 씨앗이 되려 했다.

 

나는 이 논문을 읽으며

내 고향의 땅이 새롭게 보였다.

 

어린 시절 밟던 흙이,

지나치던 골짜기가,

소백산의 그 깊은 산세가

사실은 수천 년의 이야기를

몸에 새기고 있었다는 것을.

 

땅은 말이 없다.

그러나 땅은 이야기를 품는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을 줄 아는 사람이 돌아올 때

땅은 비로소 말을 한다.

 

내 고향 풍기가

지금도 나에게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는 것처럼.

 

 

— 이 에세이는

국립안동대학교(현 국립경국대학교)

문화유산학과 및 민속학과 교수를 역임하고

현재 명예교수로 활동 중인 민속학자

임재해 교수의 논문

「풍기지역 구비문학의 전승양상과

지역적 성격」을 읽고 쓴 글입니다.

 

2026.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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