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의 지형을 배로 본다면 주미산은 그 배의 꼬리 부분에 해당되어 주미산(舟尾山 )이라 부른다고 한다.
뱃사람들은 뱃머리인 선수(船首)를 ‘이물’로, 선미(船尾)를 ‘고물’로 부르고 주미(舟尾)라고는 잘 부르지 않는다.
또한 주미산의 남쪽 사면에 있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38호 ‘주미사지’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주미산은 고어로 ‘즈믄산’으로, 지명 고증에 의하면 ‘천산(千山)’이라 할 수 있다.”라고 하였으나 퍼뜩 와닿지 않는다.
산행 들머리는 사적 제 12호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공산성으로 잡았다.
공산성(公山城)은 백제시대 때 금강변 해발 110m 자연 요지에 축성된 산성으로 웅진성으로 불리다가 고려시대 이후 공산성으로 불리게 되었다.
성 안에는 웅진 도읍기로 추정되는 왕궁지를 비롯해 백제시대 연못 2개소, 고려시대 때 창건한 영은사, 조선시대 인조대왕이 이괄의 난을 피해 머물렀던
쌍수정과 사적비, 남문인 진남루, 북문인 공북루 등이 남아 있다.
날머리인 우금치(牛禁峙)는 공주 남쪽을 지키는 관문으로 동학운동 때 관군과 싸워 동학 농민군 10만 명이 전사한 역사적 장소로 잘 알려져 있다.
옛날 도둑이 많아 소를 몰고 고개를 넘지 못하게 해서 우금(牛禁)이라고 불렀고, 또 금송아지가 나왔다고 해서 우금(牛金)이라고도 불렸다.
동학농민혁명은 무기의 절대적인 열세와 전술부재로 인해 우금치를 넘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다.
우금치에는 '동학혁명군위령탑'이 세워져 있고, 이념갈등으로 인해 비문의 일부 문구가 훼손되어져 있다.
코스: 공산성-영은사-국고개-육각정-월성산(봉화대)-능치고개-산불초소-철마산(345)-주미산-지막곡산(298)-194.6삼각점-우금치(해발 약100m)
클릭하면 큰지도.
12.36km를 4시간 40분정도 걸렸는데, 공산성에서는 시간이 지체되었고, 평지를 걸을 때는 속도를 내었다.
고도표
공산성 입구 매표소에서... <고마열차는 10선 국비공모사업의 하나로 제작 구입하여 2019년 4월 6일부터 공주 한바퀴를 도는 무궤도 열차>
신분증을 제시하고 경로 우대를 받았다.
일행들은 옥룡동 복지센터에서 월성산으로 바로 올라갔고, 우리들은 공산성을 기점으로 삼았다.
공산성을 들어서자 입구에선 수십기의 비석들이 보기좋게 도열해 있다.
'금서루 입구 비석군'으로 불리는 비석들은 공주 곳곳에 흩어져 있던 것을 한 자리에 모아 두었다.
그 중 오래돼 보이는 비석 한 기를 집어 보았더니 목사 김효성 선정비이다.
김효성(1585~1651)은 1623년 인조반정 뒤 의금부도사를 거쳐 청주와 공주 목사를 지낸 인물로, 이 비는 1828년(순조 28)에 세운 것.
불망비, 청간선정비, 거사비, 만세불망비, 유애불망비, 청덕선정비 등등의 47기의 비석들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공산성은 말끔이 복원된 상태로...
사적 제12호. 공산성은 '백제역사유적지구'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클릭하면 원본크기> 공산성의 세부 위치도.
공산성의 커다란 서문을 들어가려다...
금서루(錦西樓) 위로 올라본다.
금서루는 4개의 성문 중에 서문루. 흔적도 없는 것을 고증을 거쳐 최근에 새로 복원하였다.
공산성 깃발이야기 안내판.
올려다 보는 금서루.
성곽을 따라 걸으면 금강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고,
뒤돌아보면 지나온 금서루도.
금강 건너 공주 시가지.
2층 누각은...
공산정.
발아래 깊고 넓은 물/ 悠悠히 감싸 돌고/ 확 트인 四方八方/ 곱고도 秀麗하다네
오가는 墨客/ 눈길을 묶어두는 곳/ 四時節 詩가되고/ 畵幅에 담긴다네
新시가지 내려다보며/ 서있는 公山亭/ 강을 건너오는 손님/ 莊重하게 반긴다네 <우공 이일권>
공산정(公山亭) 현판. 을축초추(乙丑初秋).을축년 초가을 정태희(鄭台喜). 송암(松巖) 정태희 선생은 서예가이자 교육자로 대전에서 활동.
성곽을 따라 내려서면...
널따란 분지가 보인다. 백제의 왕궁관련 유적지이다.
공산성을 감도는 금강가 나루터에 있는 공북루(拱北樓)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2층누각으로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7호.
공주시가의 동북단에 인접하여 거대한 문루(門樓)의 형태로 꾸며져 있다.
白沙場 가을단풍/ 처마 끝에 걸리고/ 밤에는 별빛을 두른듯/ 온 몸을 밝히네
百濟祭 여는 동안/ 浮橋를 이어 띄우고/ 江北 江南 하나 되는/ 祝祭를 연다네
南과 北 連結하는/ 通路 拱北樓/ 도도히 흐르는 錦江물/ 쓰다듬고 서있다네 <우공 이일권 님의 '공산성 14시' 중에서...>
이 유적지엔 여러 시설물들의 흔적과 유물들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1603년(선조 36) 관찰사 유근(柳瑾)이 쌍수산성을 수축하면서 이 자리에 있었던 망북루(望北樓)를 중건하여 공북루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공북루 현판.
공산성의 석빙고.
석빙고 안내판.
누에의 저온 창고시설인 잠종 냉장고 안내판.
만하루와 연지가 내려다 보이는 지점에서...
다가가며 연지와 만하루를 내려다 본다. 공산성 만하루는 공산성 동쪽 누대에 있는 군사적 기능이 중심이 된 누정이다.
연지(蓮池) 안내판과...
만하루(挽河樓) 현판. 기축초추 권영대.
만하루에서 금강을 내려다 본다.
만하루와 연지 안내판.
만하루 안내판.
금강과 만하루와 연지.
암문(暗門)인 듯.
올라오면 영은사(靈隱寺, 충남 문화재자료 제 51호).
1458년 세조의 명에 의하여 창건한 사찰로 묘은사(妙隱寺)라고 하던 것을 은적사로 바꾸었다가 영은사라 고쳤다고 한다.
이른 아침 風景소리/ 모든 事物 깨우고/ 목탁소리 국태민안/ 安寧을 기원했네
靈隱寺 원통전/ 목조 관음보살 美笑는/ 근심걱정 잊게 하는/ 慈悲의 法門이라네
戰亂 시에는 / 僧兵 잠자리 提供하고/ 스님들 영규대사 따라/ 나라를 지켰다네 <우공 이일권>
영은사 현판.
원통전(圓通殿)으로 올라가...
편액을 살펴본 뒤...
합장하고 원통전 내부를 카메라에 담는다.
영은사 안내판.
영은사 대웅전은 원통전을 말하는 듯.
정상부로 올라가는 길목에는 아직까지 발굴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공주 목사 송흥주의 산성주필도는 인조가 피난왔을 때 머문 5박 6일간의 모습을 그린 그림.
쌍수정사적비(雙樹亭史蹟碑).
비신은 방형의 오석이며 너비와 두께는 거의 같은 크기이며, 4면에 걸쳐 각자하였고, 비머리 위에는 보주가 있다.
비문은 우의정 신흠이 찬하고 중추부사 남구만이 서(書)하였으며, 영의정 최석정이 두전하였는데 후에 송시열의 음기(陰記)가 있다.<자료인용>
조선 인조 2년(1624)에 왕이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성에 머물렀던 장소에 사실을 기록하여 숙종 34년(1708)에 석비를 건립하였다.
이괄의 반란과 인조의 남천(南遷)에 대한 내력을 쓰고 공산성에 머물렀던 10일 동안의 행적, 그리고 왕이 머물렀던 공산성에 대한 내용 등이 적혀 있다.
1604년 충청도관찰사 유근(柳根)이 공주로 감영을 옮기고 떠나며 쓴 일기.
당시의 여러 흔적들은 터만 남았고...
그 모습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백제 목곽고(木槨庫) 터. 목곽고는 식품이나 물품을 저장하는 목재로 만든 저장시설.
돌로 쌓은 백제 연못.
인공 연못으로 다용도로 사용되었다.
공산성 내부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정상부로 올라가다...
여러 유적지의 안내판을 일별하고...
우측 발아래 성곽을 따라 문루도 확인된다.
강당지로 추정되는 건물터.
그 광복루의 아래 넓은 광장에 2층의 커다란 누각인 임류각(臨流閣)이 있다.
안고서고 손 한번/ 내쳐 감고/ 百濟의 춤사위는/ 거문고를 휘감았네
낮에는 綠陰芳草/ 화사하게 同化되고/ 밤에는 三光이 내려와/ 어우러진다네
높고도 넓은 누대/ 곱게 治粧한 臨流閣/ 百姓의 눈물과/ 동성왕 歌舞 흔적 담겨있다네 <우공 이일권 님의 '공산성 14시' 중에서...>
지휘소인 장대지가 있던 자리.
임류각((臨流閣) 편액엔 을축초추 이일권. 우공 이일권은 서각가로도, 시인으로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명나라 장수의 송덕비인 명국삼장비(明國三將碑).
안내판엔 임류각은 동성왕의 자랑이었다고 한다.
명나라 세 장수의 송덕비를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6호 '명국 삼장비'라 칭한다.
정유재란 이듬해인 선조 31년(1598) 공주민을 왜(倭)로부터 보호해주고 보살펴준 명(明)나라의 3장수 제독 이공(提督 李公),위관 임제(委官 林濟),
유격장 남방위(遊擊將 藍芳威)의 업적을 기린 사은송덕비(謝恩頌德碑)이다.
본래 금강변 남안에 세워졌던 것을 공산성으로 옮겨왔었고, 일제 때는 공주읍사무소 뒤뜰에 매립하였던 것을 해방 후 다시 이곳으로 이전한 것이다.
비석은 선조(宣祖) 37년(1655)에 건립된 것이며, 3개의 비석으로 되어 있다.
삼장비의 내용은 “명나라의 3장수는 정유년 이듬해인 선조31년 가을 공주에 이르러 군기를 엄히 다스리는 한편 주민들을 정성껏 보살펴,
공주민은 왜구의 위협하에서도 안전할 수 있었고 임진년에 비로소 생업에 종사할 수 있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왜구(倭寇) 등의 글자를 훼손하였으며, 비문은 선명하지 않고 탄흔의 흔적이 남아 있다. <자료인용>
위관임제비(衛官林濟碑)
망일사은비(忘日謝恩碑)
유격장 남공종덕비(遊擊將 藍公種德碑)
안내판.
같은 안내판.
광복루(光復樓)는 원래 공산성 내에 주둔한 군대를 지휘하던 중군영(中軍營)의 문루이다.
일제 침략기 초에 일제가 공산성의 북쪽 문인 공북루(拱北樓) 옆에 있는 문루를 이 곳으로 옮기고 웅심각(雄心閣) 또는 해상루(海桑樓)라 하였다.
1946년 4월에 김구 선생과 이시영 선생이 와서 나라를 다시 찾았음을 기리고자 광복루로 고쳐 부르고 있다.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던/ 白凡 省齋 광복이라 이름 짓고/ 비단강 물줄기로 / 억눌렸던 가슴 씻어냈네
遠近으로 신성한/ 鷄龍山 우뚝 보이고/ 발아래 펼쳐진/ 珍風景 奇異하다네
山城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光復樓 / 탁 트인 樓閣아래/ 四方이 한눈에 들어온다네 <우공 이일권>
※ 白凡: 金九의 호/ 省齋: 李始榮의 호
광복루 현판.
광복루 안내판.
백범 김구 선생과 이시영 선생이 찾아와 나라를 되찾은 것을 기리고자 광복루라 고쳐 불렀다.
공산성의 석성은 대부분 조선시대의 것이지만 백제시대의 토성은 땅속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단다. 어린이들을 위한 안내판이다.
공산성에서 내려다 보는 금강.
성곽을 따르면...
영동루가 내려다보이는 지점에 특이한 그림의 깃발이 나부낀다.
공산성 성벽의 동서남북에 배치한 깃발은 송산리고분군 6호분 벽화에 있는 사신도를 재현한 것.
사신도는 동서남북의 방위를 나타내고 우주의 질서를 지키는 상징적인 동물로 외부의 나쁜 기운을 막아주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성문을 나서...
돌아보는 영동루(迎東樓).
아지랑이 봄 내음/ 殘雪속에 먼듯한데/ 파릇한 새싹/ 城砦 아래 실눈 뜨네
陽地 바른 土城 위/ 百濟의 자취 남았고/ 벚나무 볼그레/ 꽃망울 눈을 터뜨리네
동쪽 가파른 곳에/ 毅然히 서있는 迎東樓/ 돋는 해를 맞이해/ 성안을 밝혀준다네 <우공 이일권>
현판엔 '을축초추 이훈하'
영동루 안내판.
만아루(挽阿樓)가 있던 자리.
<클릭하면 원본 사진> 만아루지 안내판.
이제 월성산(봉화대)을 가기 위하여 공산성을 우측 아래로 벗어난다.
중동성당이 보이는 국고개 도로를 건너...
충남역사박물관이 있는 곳.
고딕양식의 중동성당이 유럽식 고풍스런 모습으로 올려다 보인다.
1897년 설립된 중동성당은 공주 지역 최초의 천주교 성당으로, 초대 신부로 프랑스 선교사가 부임하였고, 당시에는 충청북도 남쪽 지역 등을 관할하였다.
주차장이 있는 곳은...
국고개 문화거리.
국고개 문화거리는 효자 이복이 어머니 봉양을 위해서 국을 얻어 품에 안고 고개를 넘다가 국을 쏟아서 국고개라 불리우는 곳.
효심공원은 효의 가치와 의미를 증진하기 위해 공주의 유명한 효자 향덕과 이복의 이야기를 주제로 만든 공원.
효열문으로 들어가...
소학동에 있던 향덕과...
옥룡동에 있던 이복의 효행비와 비각을 이곳에 옮겨 세웠다.
'효자이복지리(孝子李福之里)'는 효자 이복이 살았던 마을이라는 뜻.
효자 이복 행적비
효자 이복비 안내판.
'신라효자향덕지려(新羅孝子向德之閭)’
효자 향덕은 신라 경덕왕 때 부모님 병환을 낫게 하기 위하여 자기 살을 베어 봉양하는 등 지극히 모신 효자였다.
임금도 감동하여 재물을 하사하는 등 이웃의 귀감이 되었다는 이야기.
윗부분이 잘려나간 채 하단부만 남아 있는 효자 향덕 정려비. 지려(之閭)라는 글자만 보인다.
이제 월성산을 가기 위하여 바삐 움직인다. 정면에 바라보이는 야트막한 산으로 올라야 하지만 고개에서 공주터널 위로 바로 오르기로 하였다.
대추골사랑방 경로당을 지나서...
승용차가 있는 고갯마루에서 우측 산길로 오르면...
고개로 이어지는 반듯한 산길에서 우측 능선은 대추골에서 바로 산으로 붙으면 올라오는 산길이어서 우리가 이길로 올라오는 이유.
능선에 붙어 봉화대 이정표를 따르다가...
수원골로 들어갔다. (어느 곳으로도 무방)
봉수대 방향.
육각정자에서...
봉수대 방향.
계단은 장애물.
체육시설이 있는 곳에서...
<클릭하면 큰 사진>. 안내판엔 '공주대간'이란 큰 이름이 안내되고 있다.
조그만 봉수대가 재현된 월성산.
월성산 봉수대의 안내판.
월성산 봉수대는 논산 노성산에서 보내는 봉수를 받아 정안면 북계리 고등산 봉수대로 보냈다고 한다.
월성산에서 바라보는 조망.
봉화대 인증.
금강 조망.
멀리...
어디인가?
봉화대에서 내려서면...
고개. 주미산을 따르다...
잘 단장된 무덤가에서 식사를 한다.
그런 후 오른 산불초소.
멀리...
계룡산.
운치있는 소나무가 있는 봉우리에서도...
계룡산이...
벌판.
12지목.
4원목의자가 있는 무명봉.
이정표.
345.7m 철마산은 아무것도 없고...
345.1m 철마산엔 삼각점과...
이정표가 있고...
조망이 트인다.
다시 공주대간 종합안내판과...
이정표를 지나면...
주미산.
주미산엔 전망 데크가 마련되어 있어 주위 조망을 제공한다.
산행내내 보아왔던 계룡산을 당겨 보았다.
능선을 이어가노라니 우측으로 시설물들이 보이는 건...
산림휴양관 시설.
지막곡산을 지나고...
우측 잡목 사이로 우리가 진행했던 능선이 보인다. 남쪽으로 향하다 우측으로 크게 꺾어 북서쪽으로 진행하고 있는 셈.
이제 능선은 둘레길 수준으로 수더분하더니...
194.6m 삼각점을 지나자...
뱁새울마을 갈림길에 닿는다. 우리는 좌측으로 90도 꺾어 두리봉 방향으로 내려서면 우금치.
우금치 고개엔 터널이 뚫려있고, 터널 위엔 널따란 공터가 마련되어 있다.
돌아본 모습.
두리봉(일락산 271.9m)으로 계속 진행할려면 장승 왼쪽으로 다시 산길을 올라야 하지만 우리는 여기까지다.
다음 기회에 두리봉~새재~봉황산을 거친 뒤 송산리고분군과 무열왕릉을 답사하고 웅진백제역사박물관과 국립공주박물관을 견학하면 원점회귀가 될 것.
두리봉으로 향하는 길목을 바라보다...
제각각의 모습으로 자리를 지키는 장승들을 바라본다.
노동착취가 이뤄지던 당시엔 지주(地主)는 악(惡)이고, 소작인(小作人)은 선(善)이었다.
고개를 살짝 내려서면...
동학혁명군 위령탑이 있는 우금치.
위령탑 안내판에는...
1973년에 세워졌고, 대통령 박정희라는 글자는 정으로 쪼여져 훼손되어 있다.
동학농민운동을 제압하기 위해서 외세를 끌어들인 고종의 아둔.
동학농민운동의 계승 등 모두 자기네 이념대로 아전인수하기에 바빴고,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소리없는 이념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클릭하면 원본 크기> 우금치 전적지 안내판
우리 버스는 두리산까지 종주한 A팀들을 태우러 갔고...
그 새 우리는 천천히 우금치를 둘러보며 화장실에서 씻을 수가 있었다.
우금치터널은 생태터널.
넓은 주차장과 화장실 등 편의시설이 있어 산행 날머리로 부족함이 없다.
출근길 라디오에서 '행복은 강도(强度)가 아니고 빈도(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