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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기(사진)

각화산(1,202m,봉화),왕두산,각화사,서동리삼층석탑

작성자산마루|작성시간20.08.01|조회수285 목록 댓글 0

  각화산(覺華山)은 원효대사가 서기 676년(신라 30대 문무왕 16년)경에 남화사(覽華寺)를 현재 위치로 이전하고 ‘남화사(華)를 생각한다(覺)’하여

각화사라 명명한 데서 비롯된 산이름이다.

왕두산(王頭山)은 왕의 머리를 뜻하는 것이지만 명칭의 유래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이 구간은 각화지맥이 지나가는 곳.

각화지맥(覺華枝脈)은 백두대간 태백산 남쪽 깃대배기봉과 신선봉 사이의 1,214m봉에서 남쪽으로 분기해 각화산, 왕두산, 화장산(862m),

월암산(608m)을 지나 봉화군 명호면 명호나루에서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36.2km의 산줄기이다.

 

  버스가 1차선 좁은 도로를 올라가다보면 각화사 200여m 못미쳐서 우측에 제법 커다란 주차장이 있다.

우리 버스는 각화사까지 계속 올라가 우중산행 채비를 갖춘 산꾼들을 토해낸다.

절문 앞에 선 스님이 각화사 불자들이 아님을 알고 저으기 실망한 눈치다.

 

  각화사(覺華寺)는 고운사(孤雲寺)의 말사로 신라 신문왕 6년에 원효대사가 창건했다.

고려 예종 때 계응이 중건하였으며 1926년 달현이 중수하였다.

이 사찰은 불교계에서도 알아주는 길지로 알려져 있다한다.

 

  각화사 석축사이로 난 계단 위 2층 누각은 아래에서 올려다 보니 그 위용이 대단하다.

팔작지붕 날개를 크게 펼친 처마가 회색빛 하늘을 온통 가릴 듯 시야를 막아버린다.

당우는 대부분 팔작지붕의 대단한 규모이고, 맨 위 산령각만 맞배지붕이다.

절마당으로 올라와 대면한 석탑 한 기는 주위 분위기에 견주어 그 모습이 차라리 초라해 뵌다.

왜소한 모습이나 탑의 생김으로 보아 ‘나말여초(羅末麗初)'의 것으로 보인다는 ‘한국문화유산답사회’의 견해다.

이 석탑은 원래 100m 아래 계곡가에 무너져 있던 것을 옮겨다 놓으면서 여러 탑재로 짜맞추기 됐다.

 

  산령각 뒷쪽 능선으로 오르다 ‘태백산사고지’를 찾아가려하였으나 산길이 분명하지 않아 포기하였고, 나중에 능선에서 거꾸로 길을 확인하였으나

이번엔 체력저하로 그만 포기.

입구에선 ‘태백산사고지’에 대한 안내판이 있으나 등로에선 이정표가 전혀 없어 유적지에 대한 당국의 인식을 한참이나 성토하였다.

그러나 그 의문은 쉽게 풀렸다.

각화사 승려들이 올라가는 길이 없다며 출입부터 막는 이유는 계곡물을 절에서 식수원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

그래서 아예 절에서 빗장을 걸어놓은 셈이다.


  태백산 사고지(사적 제348호)는 조선 후기 5대 사고 중의 하나로 1606년에 건립하여 1913년까지 약 300여년 간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했던

역사적인 장소이다.

수호 사찰은 각화사였고, 따라서 수호총섭(守護摠攝)도 각화사의 주지가 맡았다.

 

  산을 내려와 찾은 ‘각화사 귀부(龜趺)’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9호로서 고려시대에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있던 비신이 없어졌으나 최근에 각화사 기적비를 새겨 얹고 비석머리도 새로 만들어 얹었다.

귀부 옆엔 백월대사(白月大師) 등 10기의 부도가 나란히 보존되어 있다.

 

  귀가 중 들린 춘양중학교에 있는 남화사터의 ‘봉화 서동리 동·서 삼층석탑’은 보물 제 52호.

운동장 한귀퉁이에 석탑 두 기를 중심으로 ‘청운원’(靑雲園)이라는 휴식공간을 마련하였다.

이곳이 폐찰된 남화사((覽華寺)터라고 전하며, 두 석탑은 13.5m 간격으로 서로 동서로 마주보고 있다.

아담한 동탑은 3.85m, 서탑은 3.94m인데 두 탑의 생김새는 거의 같다.

규모는 작으나 통일신라 삼층석탑의 전형양식을 잘 유지하고 있는 탑이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의 답사경로<한수정~서동리 삼층석탑~각화사~태백산 사고터>.


1.일제시대까지 있었던 태백산 사각. 2. 해방 직후 사각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터만 남아 있다. 3. 각화사 위쪽 각화산 남쪽에 자리 잡은 태백산 사고지는 지금 풀만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자료사진>

1)태백산 사고지의 건축물이었던 사각(史閣). 2)해방직후 없어진 사각터를 발굴하는 모습. 3)터만 남아 풀만 무성한 현재의 모습.


태백산사고는 중층건물에 팔작지붕을 올리고 지붕 각 마루에 양성을 하여 장중한 위엄을 지니고 있어 이 시기의 사고 건축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외관을 갖춘 건물이었다고 한다.


버스가 각화사까지 올라간 트랙.



각화산 트랙.png

3.86MB

파일.


5.3km에 3시간 30분 정도.


고도표.


산길샘.


각화지맥.


1차선 아스팔트를 따라 각화사까지 진행한다. 대형차끼리 교차하지 않는다면 크게 무리는 없을 것.


200여m 아래에 제법 커다란 주차장이 있어 거기에서 맘춰야 했지만 한마음 전속버스 김봉석 사장은 계속 오라이~

각화사 석축 아래에서 멈추게 된다.


버스에서 내려 올려다 보는 모습.


내킨 김에 절문 앞까지 쭈욱 뽑았다.


각화사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는 계곡수. 장마통에 수량도 풍부하고, 얼음같이 차다.


에헴~ 각화사 주지스님이 절문 앞까지 나와 우리를 내려다 본다. 기도하러 온 불자가 아니어서 못마땅한 눈치.


석축 사이 계단 위로 날개를 활짝 편 팔작지붕의 모습이 하늘을 가린다.


편액엔 '태백산각화사(太白山覺華寺)'. 글쓴이는 '죽봉(竹峰)'이다. 

죽봉 황성현(竹峰 黃晟現) 선생은 1980년대 일심서예원과 월간 서예를 발간하며 활발하게 활동하던 분으로 '설악산신흥사'일주문도 썼다.


각화산은 태백산 줄기이기는 하지만 주봉(主峰)보다 남쪽으로 약 12㎞ 떨어진 지점에 있다. 옛날에는 이 일대의 산을 모두 태백산이라고 불렀다.


각화사 일주문을 올라와 맞이한 왜소해 뵈는 ‘봉화 각화사삼층석탑(覺華寺三層石塔)’은 높이 2.9m의 고려시대 석탑이다.

탑의 기단부는 여러 탑재(塔材)를 모아 쌓음으로써 원형을 잃고 있다.

지대석 위에 하층, 상층 기단이 있는데, 하층과 상층 사이에 판석 1매가 끼워진 드문 형식을 보인다.

상층 기단은 4매의 판석으로 이루어졌는데 각 모서리마다 우주(隅柱: 모서리의 기둥)가, 가운데는 탱주(撐柱) 하나가 새겨져 있다.

초층(初層) 탑신 위에 덮인 옥개석(屋蓋石)의 받침은 5단이며, 옥개석 상부가 탑신부에 비해 지나치게 커서 불안정해 보인다.

2층과 3층 탑신부는 크기가 서로 비슷하며 옥개석의 받침은 3단으로 되어 있다.

상륜부는 돌 1매로 이루어져 있는데, 노반(露盤: 탑의 꼭대기 층에 있는 네모난 지붕 모양의 장식) 위에 보주(寶珠: 꼭대기에 얹은 구슬 모양 장식) 형태가 큼지막하게 얹혀 있다.<자료인용>


'태백산각화사'를 올라와서 돌아보면 역시 아름다운 자태의 팔작지붕 2층 누각인 월영루.


편액엔 월영루(月影樓). 역시 죽봉 선생의 글씨. 달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누각이라는 뜻이니 이름만으로도 아주 운치가 있다.


조금 더 떨어져서 내려다 보는 월영루. 좌측에 각화사 삼층석탑이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별다른 재난이 없이 지나왔으나 1907년에 일제에 대항해 일어난 의병 전투가 이곳에서 벌어져 월영루만 남고 절이 다 타버렸다.

그리하여 1910년 이후 건물들을 조금씩 지어나가면서 오늘의 모습에 이르렀다.


다시 계단 위로 올려다 뵈는 정면 3칸 팔작지붕의 대웅전. 합장하고 옆문으로 촬영을 했지만 흔들려 지워버렸다.


대나무 울타리로 경계를 지은 태백선원은 선방수좌에겐 매우 유명한 전국 유일의 가행정진 도량이란다.

좌복에 앉으면 화두가 성성하게 살아 수행을 할수록 힘이 붙는 곳이라는 정평이 나있다.


대웅전과 공양간 사이 계단위로 새로 지은 산령각이 보인다.


본격 들머리는 산령각 뒷쪽 능선.

산령각 우측 능선으로 바로 붙으면 수월하겠지만 경내에서 바로 접근은 모양이 조금 거시기하다.


산령각 우측에 결가부좌를 한 좌불이 정좌해 있다.

한 손은 무릎 위에 얹고 다른 손은 무릎 아래를 가리키는 모습이 항마촉지인을 한 석가모니불로 여겨진다.

이 석불은 춘양중학교 서동리 삼층석탑 옆 나무에 기대있던 불상을 모셔다 머리만 반듯하게 정면을 응시하도록 한 듯.


<자료사진> 예전 서동리 삼층석탑 옆에 있었던 불상은 대좌 위에 앉아 얼굴을 살짝 우로 돌려 명상에 잠긴 듯한 모습이다.

어깨까지의 키가 61cm로서 차이점은 대좌와 얼굴이 응시하는 방향일 뿐.

얼굴은 원래 떨어져나가고 없어 새로 얹은 상태라 옮기면서 돌려 놓았나 보다. 


산령각 우측을 사양하고, 좌측 계곡으로 들어가서...


산령각 뒤에서 우측으로 능선을 기웃거려 보았으나 여의치 않아...


조금 더 위로 올라...


 계곡으로 난 길에서 우측 사면으로 비스듬히 능선에 올라 붙는다.


그러자 산령각에서 올라오는 반듯한 능선을 만나게 되고...


룰루랄라~


호젓한 육산의 피톤치드 뿜어내는 산길을 제일 뒤에서 천천히 오른다. 장마속 습도탓일랑 사치이니 "그 입 다물라."

'태백산사고지' 길찾기에 주의를 기울였으나 이렇다할 흔적이나 이정표가 없으니 거의 불가하다.

각화사에서 식수원으로 빗장을 걸었으니 뭐라 탓할 것인가?

'태백산사고지' 길찾기는 능선에서 내려왔다 되올라가는 방법이 있지만 체력소모는 어쩔 수 없는 것.


헬기장이 있는 △1,174.5m봉에서 앞서간 일행들을 만난다.


삼각점.


좌측으로 200여m 진행하면 각화산이 있어.


'覺華山 1,202'라 쓰고 서명을 한 시그널을 정상 한켠 나뭇가지에 걸었다.


춘양면 이장협의회에서 세운 오석 정상석엔 높이가 잘못 기재돼 있다. 각화산에서 막걸리를 곁들인 성찬(?) 후...


다시 빗물 머금은 미역줄이 칭칭 감아대는 산길을 잇는다.


온 천지는 뿌연 회색 천지. 도드라진 협소한 바위에 올라서니 공간이 빼꼼 열리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날이 맑다면 남쪽으로 일월산에서부터 거대한 산줄기가 있을 것이고, 중앙에 청량산이, 그 옆으로 소백산 주변의 산군들이 줄줄이 조망될 텐데...


계속 이어지는 행로에서 오락가락하는 비로 배낭 커버를 씌웠다 벗었다 반복.


999.2봉은 부지불식간에 지나고, 안부에서 무덤을 만난다. 


세찬 바람에 쓰러진 노송. 모든 생물은 생몰(生沒)이 있는 것.


이윽고 닿은 서너평 남짓한 왕두산. 삼각점만 한켠에 있고 정상석이 보이지 않는다. 누가 치워버린 것일까? 


풀섶에 각화지맥 왕두산 표식.


삼각점에서 올라온 길(흰색 화살표)과 내려갈 길(검은색 화살표)을 살핀 뒤...


서명을 한 시그널을 걸었다.


王頭山이라 쓰고 서명을 한 시그널. 그런 다음 다시 정상석을 찾아 보았지만 진짜 보이지 않는다.

끝봉을 간다며 더 진행하던 장선생님이 "정상석 여기 있어요."하며 소리친다.


삼각점 왕두봉에서 2~30m 더 진행하여 정상보다 낮은 지점에 왕두산 정상석이 세워져 있다. "♪네가 왜 거기 서 있어."


다시 리본과 매직을 꺼내 王頭山이라 쓰고, 높이는 생략한 채 서명을 하여 마리를 아뢰었다.

*마리를 아뢰다: 임금의 머리를 빗겨 드리다의 고어.


장선생님이 간 끝봉 방향으로 커다란 노송이 노구를 누인 채 길을 막고 있다.


하산길에 접어들지만 능선이 달라 우왕좌왕 한동안 재 확인한 뒤...


그 능선을 따랐더니 화살표가 그어진 폐헬기장을 만난다. 능선은 여기에서 우측 화살표 방향으로 갈아 타는 것.


폐헬기장에서 우측으로 90도 꺾어...


우측 사면으로 비스듬히 능선을 갈아탄다.


등로에 커다란 노송.


우람한 이 소나무들은...


바로 춘양목.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이 불타자 1865년 권력을 잡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의 중건을 지시한다.

궁궐을 짓는 데 필요한 각화산 자락의 춘양목이 대거 벌목되었고,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춘양목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으나 태평양전쟁 전후로 대량 벌채되었다.


하산길은 아주 부드러워...


남암 갈림길에서 출입급지 푯말.


그래도 조금 내려가 보았더니 나무 빗장에 줄을 쳐 놔...


각화사로 내려섰더니 또 춘양목.


"어떻게 지금까지 용케 버티었니?"


아까 버스에서 내린 각화사 입구다. 올려다 보니 우리 버스가 절문 앞에 그대로 대있다. 우리 기사님이 주지스님께 잘 보였는 모양. 


바로 계곡으로 내려가서 계곡수에 옷을 벗었더니 손이 시리다. 


그리고 버스에 귀환하여 막걸리 두 잔째를 마시다 까맣게 잊고 있던 생각을 떠올렸다. "맞다. 각화사 귀부."

200여m 아래 주차장에 버스를 댔다면 이 문화재들은 자연스레 볼 수 있었지만 여기선 조금 내려가야만 한다.

바삐 찾아나선 각화사 귀부 위의 비석 두 기. '관찰사김상국휘노경공덕비'와 알 수 없는 작은 비석.


각화사 귀부와 뒷편으로 부도군이 보인다.


에구~


각화사귀부(覺華寺龜趺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9호)다.

장방형의 지대석(地臺石)과 귀부가 하나의 석재로 조성되었다. 지대석의 전면 양 모서리는 모를 죽여 사선형을 이루고 있다.

길이 2.2m, 너비 1.9m, 높이 92㎝의 규모인데, 전체적인 수법으로 보아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


본래는 고려 초기에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를 지냈던 김심언(金審言)이 지은 통진대사비의 비좌로 쓰였다고 하는데, 현재는 새로 조성된 비석이 건립되어 있다.


귀부 옆의 또다른 비좌.


귀부의 머리는 평면적으로 등에 비해 약간 높게 조성되었는데, 상면은 평판적이다. 꽉 다문 이빨, 동그란 눈, 갈귀 등이 묘사되어 있는데, 마멸이 심한 편이다.

 

등에는 6각형의 귀갑문(龜甲文)이 조각되었는데, 내면 중앙에는 王과 卍자가 양각되어 있다. 귀부의 등에는 장방형의 비좌(碑座)가 마련되어 있다.


귀부는 앞과 뒤에 각각 2발이 모두 표현되었는데, 모두 4개씩의 발가락이 묘사되었다.

전면의 발가락은 발톱이 앞을 향해 전진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 반면, 후면의 발가락은 양옆으로 퍼져 앞발의 전진을 밀어주는 형상을 보이고 있어

전체적으로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자료인용>


각화사 귀부 안내판.


그 옆에 10여기의 부도가 옹기종기 모여있다. 각화사는 덕 높은 고승 아홉 분을 배출한 절이다.

부도는 고승들의 돌무덤으로 천년 세월의 흔적을 안고 무언의 설법을 펼치고 있다.


부도의 재질은 화강암으로 방형(方形)의 지대석 위에 원형의 부도좌를 만든후, 종형(從形)의 부도를 올려 두었다. 

부도의 몸통은 배흘림식이며, 상부는 원추형(圓錐形)으로 처리됐다.


부도의 몸통에는 주인을 나타낸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그 중 근세의 것으로 보이는 '금오당태전대선사' 부도.


귀가하면서 춘양중학교에 있는 ‘봉화 서동리 동·서 삼층석탑’을 답사해야만 한다.

함께한 일행들의 취향이 모두 달라 감히 입을 떼지 못하고, 미옥 씨에게 넌지시 부탁하여 억지춘양(?)으로 답사하게 되었다.

'억지춘양'이란 말은 이곳 춘양면에서 나온 말. 


그렇게 찾아간 춘양중학교 정문 앞.


정문 수위실 담당 직원이 못마당해 하는 눈치다. 문화재를 관리하고 있으면서 왜 그러실까?

알고보니 교문에 외부인 출입금지 안내판이 붙어있다. "아하~ 그렇구낭~." 코로나19 때문이다.


설명도 없었으니 영문도 모르고 뒤따라 들어오는 일행들. 


정문을 들어서면 우측 운동장 한귀퉁이에 석탑 두 기가 동·서로 마주보고 있다.

이곳이 신라고찰이었던 남화사의 옛터.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원효대사가 현 각화사를 창건하면서 남화사를 폐하였다고 한다.

이 탑은 신라식 일반형 석탑으로서 상·하 이중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형성하였는데, 각 부의 양식과 수법으로 보아 신라 하대인 9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저쪽이 3.85m 높이의 동탑이고, 가까이가 3.94m의 서탑인데 두 탑의 생김새가 거의 같다.

규모는 작으나 통일신라 삼층석탑의 전형양식을 잘 유지하고 있는 탑으로서 흡사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을 닮았다.


상층기단은 돌 한 장에 가운데기둥을 새기고 모서리기둥은 따로 세웠다. 


몸돌과 지붕돌은 한 층이 한 돌씩으로 구성되었으며 지붕돌의 층급받침이 4단으로, 전체적으로는 석가탑을 충실히 따랐으나 매우 왜소해진 모습이다.



상륜부는 서탑에 노반만 남고 없다.


기단부와....


상륜부의 모습.


이 삼층석탑들은 동·서탑의 쌍탑형식.


석탑 기단부 뒤로 잘 가꿔진 휴식공간.


<자료사진> 1962년 동탑을 해체·복원하였을 때 나온 99개의 작은 토탑이다.

1962년 탑을 해체 수리했을 때 서탑에서 사리함을 넣어둔 사리공이 발견되었으며 동탑에서도 1층 몸돌 상면 가운데에서 사리공이 발견되었다.

동탑 사리공에는 중앙에 둥근 곱돌 항아리(높이 9.1㎝)가 있었고 그 주위에 작은 토탑 99개가 빽빽이 둘러싸고 있었다고 한다.

사리함 안에는 녹색 유리 사리병이 들어 있었고 그 안에 좁쌀 크기의 사리 3알이 들어 있었다. 사리기는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다.


정식 명칭 풀네임은 ‘봉화 서동리 동·서 삼층석탑’으로 보물 제 52호.


  조선시대 이름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림에 뛰어난 문인으로 평가받는 이인상(1710~1760)이 '유태백산기(遊太白山記)'를 남겼다.

그는 1735년(영조 11) 초순쯤 늦겨울 한파가 몰아치는 가운데 태백산을 3일 동안 유람했다.

각화사에서 출발 '태백산사고지(史庫地)'를 지나 상대산 중봉(지금의 깃대배기봉 추정)~태백산 천왕단을 거쳐 소도리로 내려왔다.


  그 추운 겨울 태백산을 3일 동안 무려 110리(44㎞)를 헤매면서 누볐다.

겨울 장비를 갖춘 지금으로서도 쉽지 않은 태백산 산행을 도포와 갓만을 쓰고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는 한겨울에 유람을 했다니 믿기지 않을 정도다.

<월간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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