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을 버리신 하나님의 사랑
마태복음 27장 45-46절
고난주간을 맞아 예수님이 십자가위에서 하신 일곱마디를 묵상하는 중
오늘은 4번째 "엘리엘리라마 사박다니"에 대해서 묵상하며 은혜받으려고 합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금요일 오전 두시경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붙잡히신 이후
오전 9시에 이르기까지 이곳 저곳을 끌려다니시면서 심문을 당하시고, 즉결심판(卽決審判)으로
십자가형에 처해집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골고다 언덕은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올랐던
모리아 산에서 멀지않은 곳입니다.
아브라함이 올랐던 이 모리아산에 솔로몬의 성전이 세워졌음을 우리는 압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지 6시간이 경과하였습니다. 정오부터 온 땅은 어두움으로 뒤덮히고
세시까지 계속 되어집니다. 큰 못으로 손과 발이 박히시고, 여섯시간이 경과함으로 인하여
그 온몸의 물과 피가 아래로 몰린 예수님의 고통은 극에 달합니다.
온 세상이 캄캄하여진 오후 세시 쯤에 예수님께서 크게 소리를 질러 부르짖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다윗이 시편 22:1에서 절규하던 그 부르짖음이십니다. 인간 육신의 몸을 입으신 예수님께서
육신의 뒤틀리고 찢겨지는 고통이 견디기 어려워 절규하시는 부르짖음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버리셨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절규하시는 것입니까?
아니, 지금 그가 당하는 이 고통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예정된 것이며
자신이 마셔야 할 잔인 것을 아시지만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그가 감당하고 있는 이 고통이
견디기 어려울 정도로 큰 것이기에 이렇게 부르짖으시는 것입니다.
이는 그가 온전히 인간과 동일한 육신을 입고 계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의 십자가에 매달리심은 고통이 없는 것이 아니라 여느 인간과 마찬가지로
철저한 고통이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5:7-8에서,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救援)의 근원이 되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와 같이 고통을 감당하심은
인간의 고난을 몸소 경험하시고 그들을 돕기 위함입니다.
히브리서 2:18에서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했습니다.
결국 아들은 십자가를 지시게 되었습니다.
채찍에 맞아 살갗이 찢어 졌고 가시관을 쓰신 이마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육중한 십자가 틀을 지고 골고다까지 가는 길을 감당하지 못하여
주님께서는 여러번 쓰러지셔야 했습니다.
구레네 시몬의 도움 없이는 골고다까지 가실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골고다에 이르러 무자비한 병사들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되었습니다.
가장 견디기 어려운 형인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큰 고난을 당한 인물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의인 욥의 고난을 압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와 비슷한 시기 혹은 약간 이전의 시대에
동방 우스 땅에 살던 의인입니다. 그러나, 이유를 모르는 고난을 경험합니다.
그의 많은 소유물과 종들, 그리고 일곱 아들과 세 딸을 한꺼번에 잃어버립니다.
그뿐 아니라 그의 몸에 악창(惡瘡)이 생겨 온몸이 가렵고 진무르고 터지고 해서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으며 재에 앉아있습니다. 그의 아내는 그를 위로하는 대신에 옆에서 조롱합니다: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욥은 입을 벌려
자기의 난 날을 저주하며 고통중에 탄식합니다.
그의 세 친구(엘리바스, 빌닷, 소발)가 그를 위로한답시고 왔지만 그를 위로하는 대신에
그의 고난의 원인이 그의 범죄함에서 온 것이라 그의 의로움에 대해서 시비합니다.
그 친구의 방문은 그에게 고통을 더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결국에 자신 속에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마음이 있음을 발견하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에게 현현하여 말씀하실 때
자기의 원망과 자기 의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더욱 온전하여지며 그에게 허락되어진 모든 소유물과
자녀도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었음을 알고 감사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전의 축복보다 더욱 크신
축복으로 함께 하십니다.
요셉의 고난이 있습니다. 요셉의 일생은 구약에 나타난 예수님의 생의 모형(模型)이라고 불리웁니다,
그의 일생이 흠없고 티없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전반의 삶은 평탄치 않습니다.
형들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어 다 죽게 되었었지만 넷째형 유다의 제안으로 미디안 상인에게
은 이십 개에 팔리워 애굽에서 보디발의 집 하인으로 넘기우고 그 아내의 모략으로 옥에 갇히게 됩니다.
감옥에서 만난 바로의 술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주고 그가 옥에서 나가게 되면 자기를 기억하여
바로에게 고하여 자기를 건져달라고 부탁하지만, 과연 요셉의 말대로 옥에서 나가 자기의 직을 회복한
술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기억지 않고 잊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이 옥안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버리시지도 아니하시고 잊으시지도 아니하셨습니다.
바로가 해괘한 꿈을 꾸었을 때 요셉을 잊어버렸던 술관원장을 통하여 그를 생각나게 하시고
바로의 꿈을 해석하게 하심으로 그를 애굽의 국무총리로 높이십니다.
다윗의 고통이 있습니다.
다윗은 일생을 하나님께 기도하며 찬송하는 삶을 살려고 하였지만 겉으로는 성공한 듯 보이는
그의 일생도 고통과 번민의 연속입니다.
그가 사랑했던 그의 왕이요 장인이었던 사울의 미움을 사고 쫓깁니다.
그가 가장 사랑했던 아들 압살롬이 대적하여 싸움을 걸어옵니다.
또 그의 신하들이 그를 배반하고 그들에 의해 쫓김을 당합니다.
시편 22:1 이하에서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을 향해 절규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옵시며
내 신음하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나이까? 내 하나님이여, 내가 낮에도 부르짖고 밤에도 잠잠치
아니하오나 응답지 아니하시나이다."
이 다윗의 부르짖음이 무엇을 뜻합니까? 하나님이 과연 그를 버리셨다는 뜻입니까?
그가 부르짖을 때에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셨다는 뜻입니까?
그의 기도에 응답지 않으셨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다윗의 부르짖음은 그의 고통과 번민을 하소연하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반드시 들으시고
응답하실 것임을 알기에 조속히 그를 그 고통의 깊음에서 건져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해주실 것임을 알지만 지금 당하는 그의 고통이 인간의 능력과 인내로는
참을 수 없기에 절규하는 울부짖음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마침내 하나님의 구원을 증거하며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아브라함의 고통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사흘 길을 행하여 모리아산에 이르고
그 산의 꼭대기에 올라서 이삭을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대로 번제물로 드리려고 합니다.
아들 이삭이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물어볼 때,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아들에게 말했지만,
그의 나이 백세에 얻은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려고 아들을 향해 칼을 치켜든
아브라함은 고통중에 마음 속 깊숙히에서 부르짖을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그의 생명보다 더욱 소중한 이삭을 죽임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버리심이요
아브라함에게 주신 세가지 약속--땅과 민족과 복의 약속을 버리심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제라도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 속 깊숙이에서 부터의 절규를 들으시는
분이신 줄을 믿고 있었습니다. 아니, 아들 이삭을 지금 번제물로 죽인다 하더라도 그를 다시 살리시고
그에게 약속을 이행하시며 그의 신실하심을 보이시는 하나님이신 줄 믿고 소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11:17-19에서,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저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저가 하나님이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증거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견딜 수 없었습니다. 몸무게로 인하여 서서히 찢어지는 손에 박힌 못 주위,
이 아픔을 조금이라도 덜으려고 발에 힘을 주면 찢어지는 발의 아픔이 계속 더해지며 고통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예수님은 견디고 견디다 못해 오늘 본문에 보면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제구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고
울부짖으셨습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아들을 버리신 것입니다. 세상의 죄를 대신하였지만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죄인으로 죽어야 하는 아들을 하나님은 철저히 외면하신 것입니다.
정말 견딜 수 없는 아픔과 아버지께로 버림받은 참을 수 없는 고통으로 아들 예수님은
그렇게 절규하신 것입니다.
히브리서 5장 7절에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께서 육체를 입으시고 계실 때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아들을 외면하신 것입니다. 전혀 아들을 생각지 아니하시고 영원히 죽어야 하고
마땅히 버림받아도 전혀 항의하거나 이유를 댈 수 없는 인간들을 위하여 아들을 죽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5장 6절-8절에는 이렇게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범죄하여 버림받을 수 밖에 없는 불경건한 무리였을 때 그리스도는 이런 우리를 위하여
생명까지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통하여 하나님을 부를 때 언제나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사랑의 표현이요 마땅한 부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나의 아버지라는 표현을
즐겨 사용하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의 부르짖음에서는 아버지라 부르지 않고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공의를 이루기 위하여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죄를
대신한 죄인으로 철저히 벌하시는 하나님을 찾는 부르짖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하셨습니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 버림받아야 할 인간들을 위하여 대신 죄를 지심으로 철저히 하나님께로부터
버림을 받으신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하여 언제나 사랑으로 함께 하며
깊은 사랑을 나누는 관계였던 부자의 관계가 깨어지며 철저히 버림받은 것입니다.
아들을 버리시는 아버지, 그렇게 절규하며 찾았는데도 대답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그 깊고 높으신 사랑의 의미를 결코 우리 작은 가슴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전혀 이해할 수 없고 측량할 수 없는 벅찬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자식을 위하여 생명을 던지는
부모의 사랑은 크고 위대하지만 인류를 위하여 자식을 버리는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아무리 타당한 단어를 찾아 표현하려고 하여도 적당한 단어를 찾을 수 없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냥 이해할 수 없는 사랑이요, 인간의 가슴에는 벅찬 사랑이요,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너무 깊어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이라는 상투적인 표현 밖에는
할 수 없는 사랑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고
요한일서 4장 10절에서는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크고 놀라운 사랑이 이 시간에도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 것입니다.
마땅히 죽어야 하고 영원히 버림받아야 할 우리 인간을 대신하여 아들을 버리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충분히 헤아릴 수는 없어도 바로 깨닫고
그 안에서 바른 신앙으로 살아가는 여러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