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막내 아들 다윗

작성자peace(평화)|작성시간12.10.20|조회수165 목록 댓글 0

막내 아들 다윗

삼상 16: 6-13

 

성경에서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인물의 이름은 다윗입니다. 구약에서 600번 이상, 신약에서 60번 이상 반복되어 나옵니다. 그만큼 중요한 인물이라는 뜻이지요. 다윗은 이스라엘의 역대 군주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왕이었습니다. 전쟁에서 패배한 적이 없었고 주변 나라들을 차례로 정복해서 가장 넓은 영토를 마련했고 가장 강성한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다윗의 혈통을 타고 오셨습니다. 실로 다윗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 중에 하나입니다.

 

이렇게 위대한 사람 다윗을 생각할 때 우리는 완전무결할 것이라는 생각을 먼저 합니다. 고매한 인격, 흠 없는 가정생활, 공평무사한 정치 지도력, 등등을 떠올립니다. 하지만 다윗은 놀라우리만치 흠이 많습니다. 그가 거느린 왕비만 여덟 명, 수많은 처첩들을 두었는데 결코 신실한 남편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우리 보통 사람보다도 더 심각한 죄를 범하기도 했습니다. 모두 스물 한 명의 자식들을 두었지만 결코 자애로운 아버지가 되지 못했습니다. 압살롬이라는 아들은 아버지의 왕권을 넘보고 반역을 일으킬 정도였습니다. 아버지로서도 크게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다윗의 이야기를 읽노라면 한 가지 깜짝 놀랄만한 일이 있는데, 단 하나의 기적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구약 시대의 많은 인물들은 반드시 초자연적인 기적을 경험합니다. 그런데 다윗의 이야기는 그런 기적이 단 한 줄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도달하게 되는 결론은 다윗이야말로 지극히 평범한 보통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선과 악이 뒤섞인 채로 지극히 인간적이고 불완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다윗이 하나님의 가장 큰 사랑을 받았다는 아이러니에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 가운데 다윗만큼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을 받은 인물은 없습니다. 그 비결은 다윗이 누렸던 하나님과의 친밀성에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은 그의 완전무결한 도덕성이나 어떤 인간적인 탁월성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은 죄를 지을 때마다 언제나 하나님께 돌아가 회개했습니다. 때로 사람들 앞에서는 실수를 저지르고 신실치 못한 적이 있었지만 적어도 하나님께 대해서는 항상 정직하고 신실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사랑"에 있어서 그 누구도 다윗을 따를 자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다윗은 그 모든 인간적인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직하고도 친밀한 하나님과의 교제로 인하여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았던 것입니다.

2.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으로 뽑힌 '하카톤' 다윗

오늘 봉독한 말씀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받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이야말로 인간적으로 볼 때 가장 평범하고 부족한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발탁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임금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것은 인간적인 판단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택 때문이었습니다. 은총의 선택 때문이었지요.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은 사울이었습니다. 사울은 보통 사람들보다 어깨 하나가 더 클 정도로 용모가 출중했습니다. 군주가 될 만한 풍모와 소양을 두루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다만 그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아주 부족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자기의 뜻을 맞추려고 하기보다는 자기의 욕심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고 했습니다. 사울은 다윗과 비교해볼 때 크게 부도덕한 일을 저지른 왕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자신의 왕권에 지나치게 사로잡힌 나머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사울의 가장 큰 결점은 예배를 소홀히 여겼습니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사울을 폐하시고 새로운 임금을 뽑으십니다.

 

새로운 임금으로 다윗을 뽑는 장면을 설명한 삼상 16장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 153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을 이스라엘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이제 본문은 사무엘 선지자가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가서 다윗을 간택해 기름을 붓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받고서는 이새의 아들들 가운데 한 명을 왕으로 뽑고자 한 것이지요. 사무엘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새의 아들들 한 사람씩 돌아가며 선을 본 것이지요. 이것은 마치 미인 대회에서 미스 코리아 진()을 뽑는 장면과 비슷합니다.

 

제일 먼저 맏아들인 엘리압이 나왔습니다. 우람한 체격에다 다부진 생김새가 단연 군주감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립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6). 영적으로 민감한, 모든 이들로부터 존경받는 탁월한 선지자 사무엘조차도 외모에 깜빡 속았습니다. 하물며 우리 보통 사람들은 얼마나 자주 속겠습니까!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는 사무엘에게 하나님이 즉각적으로 경고하십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7).

 

사람은 용모와 키를 본다는 것입니다. 외모를 따진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하나님의 판단 기준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중심, 즉 마음을 먼저 보신다는 것입니다. 이새의 장자 엘리압이 외모로 볼 때에는 군주의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내적인 자질은 아니라는 것이지요.

 

요즈음 세간에 널려 있는 책들이 처세술에 관한 책들입니다. 사람들의 비위를 맞출 수 있는 적당한 기술들을 가르쳐주어서 출세를 돕겠다는 책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는 우리의 처세술이 먹혀들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의 진실과 정직, 중심만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기준과 사람의 기준은 다릅니다. 첫째 아들 엘리압은 나이로 보나 외모로 보나 군주의 자격이 있는 것처럼 보였으나 그 중심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후보 자격은 두 번째 아들에게로 넘어갑니다.

 

이제 두 번째 후보를 판단할 때부터 사무엘은 외모가 아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을 분명히 알고서는 달라집니다. 삼가 조심합니다. 둘째 아들 아비나답이 사무엘 앞을 지나갈 때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않으셨다"고 잘라 말합니다. 셋째 아들 삼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임금감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새의 일곱 아들들이 차례로 지나갔으나 그 누구도 하나님이 선택하신 후보감은 아니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넷째 아들로부터 일곱째까지는 아예 이름조차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도 하나님 보시기에 자격 미달이었기에 이름까지 밝힐 필요를 못 느꼈던 것 같습니다.

 

이제 사무엘은 단단히 실망을 한 것 같습니다. 분명히 이새의 아들들 가운데 한 사람을 왕으로 세우라고 했는데 일곱 명 중에 하나도 없다니. 그래서 이새에게 마지막으로 묻습니다.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11a). 나중에 밝혀지겠지만 마지막 남은 이 아들의 이름은 다윗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그는 이름도 밝히지 않은 채 등장합니다. 아버지 이새는 오직 두 가지 사실만 언급합니다.

첫째로 그는 막내, 즉 히브리말로는 '하카톤'이며, 둘째로 양치는 목동이기에 현재 양을 치러 나가고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 막내, '하카톤'이라는 말은 하찮고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뉘앙스가 깔린 단어입니다. 중요한 자리에 나서지 말고 빠져야 할 인물이라는 뜻이지요. 한 집안에 철없는 꼬마에 불과하다는 말이지요.

그 다음에 '목자'라는 말은 아주 시원찮은 직업을 의미합니다. 사람이 아닌 양들과 함께 지낸다고 할 때 결코 우러러볼 만한 직업이 아니지요. 더욱이 이웃집 아이를 돌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큰 기술이 필요 없는 별 볼일 없는 직업이 목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하카톤 양치기' 이스라엘의 두 번째 군주로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이 날 다윗에게 주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집안의 막내, 하카톤으로서 꼬마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런 일에 나설 수가 없었습니다. 평소대로 양치는 들판에 가 있으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로 이 하카톤 양치기 다윗을 이스라엘의 두 번째 왕으로 뽑으셨습니다. 사람의 판단이 아닌, 하나님의 판단에 의해 선택을 받은 것입니다. 본문의 스토리는 여기까지입니다.

 

3.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사람들은 겉모습을 주로 보고 판단하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전형적으로 코드 인사를 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합하기만 하면 세상적인 기준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그 사람을 써주십니다. 다윗은 참으로 보잘 것 없는 하카톤 목동이었습니다. 아무도 그의 외모에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윗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언제나 한결같이 하나님만 향할 수 있는 그의 믿음을 보셨습니다.

그 이후에 다윗이 보여준 그의 중심은 정확히 하나님이 보신 것과 일치했습니다. 그는 윤리도덕적으로 흠결이 많았습니다. 가정에도 문제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연약함과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한결 같이 하나님만 향하고자 애썼습니다. 자기 모습 그대로 오로지 하나님과 관계하고자 하는 일념은 추호도 변함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이 모습을 높이 여기셔서 그의 모든 허물에도 불구하고 분에 넘치는 은혜와 사랑을 베풀어주셨던 것입니다.

 

시편은 모두 150편으로 되어 있는데 다윗의 시로 명기되어 있는 시편만 모두 73이나 됩니다. 다윗이 기록한 시편은 모조리 다윗의 눈물겨운 기도를 다루는 내용입니다. 다윗의 시는 거의 전부 다 그의 생생한 삶의 체험 한 가운데 나온 시입니다. 실패와 배신, 처절한 죄악과 죄책감, 슬픔과 수치심 한 가운데 드린 기도들입니다. 그런데 다윗의 시는 언제나 한결같이 자신의 죄악을 솔직하게 고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끝이 납니다. 거기에는 그 어떤 죄의 부인도 합리화도 책임전가도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죄의 문제를 용서하실 수 있는데, 다윗의 이와 같은 중심을 보시고 하나님은 다윗을 용서하셨던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를 용서받았다고 할지라도 앞으로 죄의 문제가 근절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고 해서 완전무결해질 것이라는 망상도 품지 않았습니다. 다만 앞으로 또 죄를 짓는다면 자기의 죄를 다룰 수 있는 유일한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 자신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하나님께로 또 다시 돌아가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사실 하나만 분명히 알았습니다.

 

영어로 '더러운'이라는 형용사는 'dirty'입니다. 'dirty'''을 뜻하는 명사 'dirt'에서 왔습니다. 그런데 이 흙이라는 것은 제 자리에 있기만 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 어떤 부정적인 의미도 없습니다. 하지만 흙이 제 자리에 있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가서 묻게 될 때 더럽게 됩니다. 흙이 제 자리를 떠나 그릇에 가서 묻을 때나 옷에 묻을 때, 손이나 물에 묻을 때 'dirty', 더럽게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흙이 묻어 더러워질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제일 좋은 방법은 물로 씻어내는 방법이지요. 이런 이유 때문에 다윗이 쓴 참회시를 읽어보면 자주 등장하는 단어가 '우슬초로 씻어주시고', '물로 씻어주시고', '깨끗하게 해주시고', '정결하게 해주시고', 등등입니다. 흙으로 더러워진 우리의 몸이나 물건을 씻어내듯이 죄로 더러워진 우리의 심령을 끝없이 씻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지요.

 

이제 중요한 것은 중심이 바로 되었던 다윗은 죄를 지을 때마다 죄를 책임져주시고, 용서해주실 유일한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께로 나아갔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거짓 없는 중심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기에 하나님은 그의 부족함과 연약함에 불구하고 가장 많이 그를 사랑하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람들 앞에 잘 보이려고 하기보다 먼저 우리의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만일 우리의 중심이 언제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만 향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존귀하게 써주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오늘 여러분 모두가 그 하나님의 중심에 합한 분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기원합니다. 아멘.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