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의 이해
느1장1-5
오늘 구약
의 느헤미야의 신앙을 통해서 우리가 본받아야 할 신앙의 자세를 살펴보겠습니다.
1. 불행한 삶에 굴복하지 않는 신앙
느헤미야는 유다 지파에 속하는 하가랴의 아들이다. 그의 이름은 히브리 말로, “여호와께 위로를 받다”라는 뜻이다. 느헤미야 때문에 그의 부모가 위로를 받고, 포로생활에 암울했던 유대민족이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솔로몬 왕 이후에 남복으로 나뉘어서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로 나뉘었습니다. 그런데 북 이스라엘은 BC 722년에 앗수르에게 멸망을 당하고, 남 유다는 586년에 바벨론에 멸망을 당했습니다. 바벨론은 유다에서 수많은 포도들을 데려갔습니다. 아마 이때 느헤미야의 할아버지가 잡혀 갔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느헤미야의 아버지 이름이 하가랴입니다. 그 뜻은 '여호와의 흑암'이라는 뜻입니다. 느헤미야의 할아버지가 포로로 잡혀오면서 아들을 낳은 후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여 이름을 지어 준 것 같습니다. 나라도 잃고, 자유도 잃고, 삶의 터전도 잃어버리고 바벨론으로 강제 이유당해 온 것입니다. 더군다나 하가랴의 가문은 에스라처럼 제사장 가문도 아닙니다. 스룹바벨 처럼 다윗 혈통의 가문도 아닙니다. 믿고 의지할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런 절망적인 환경에서 하가랴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느헤미야 즉 “하나님께서 위로하신다” 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하나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우셨다”입니다. 느헤미야의 아버지는 환경만 보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보시는 분이셨습니다. 비록 자신들의 처한 환경이 한줄기 빛도 없는 먹구름 아래 있지만 그 먹구름 위에는 하나님의 위로가 있고 은혜가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느헤미야의 아버지를 통해서 믿음이란 무엇인지 배우게 됩니다. 절망적인 환경이라고 할지라도, 깜깜한 어둠속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가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절망할 수 있는 상황에서 절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으면 불평할 수 있는 상황에서 불평하지 않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이름과 자신이 처한 환경이 너무나 대조적이었습니다. 마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즉 열국의 아비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실은 자식하나가 없습니다. 느헤미야도 자신의 이름은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인데 느헤미야가 처한 환경은 불행했습니다. 페르시야의 포로입니다. 든든한 사회적인 배경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때때로 믿음의 사람을 훈련하실 때 불행한 삶으로 인도하실 때가 있습니다. 요셉이 그러했습니다.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한 삶을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는 불행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애굽의 공주의 아들로 궁궐에서 호의호식하면서 살았는데 어느 날 미다안 광야로 도망가서 장인의 양을 치는 불행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그 불행한 삶에서 절망하거나 굴복하지 않고 믿음으로 이겨냈습니다.
느헤미야도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불행한 삶에 내 몰렸습니다. 그러나 그 불행한 삶에 굴복하지 않고 더 나은 삶을 향해서 도전했습니다. 느헤미야의 처지가 포로였기 때문에 인종차별을 당하고 기회조차 얻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페르시아의 수산 궁에서 술 맡은 관원장이 되었습니다. 수산 궁은 바로 페르시아 왕이 거주하는 곳입니다. 그의 직책은 술 맡은 관원장입니다.
왕의 비서관 중에서 술 맡은 관원은 왕이 가장 신임할 수 있는 사람에게 맡깁니다. 왕이 자신의 생명을 맡길 만큼 신뢰가 가는 사람에게 그 일을 맡깁니다. 고대 사회에는 음모가 많고, 암살이 많은데 대부분 술에 독약을 타서 왕을 암살했기 때문에 왕의 절대적인 신뢰가 없는 사람은 결코 술을 담당하는 관원이 될 수 없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어떻게 그런 신분에 올라갈 수 있었을까요? 느헤미야는 포로였습니다. 가문도 변변치 않았습니다. 페르시아 사람들의 중상모략과 경계를 받아야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신분상승의 방법은 세 가지입니다. 출생, 결혼, 실력입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대에는 출생이 신분 상승의 최대의 지름길이었습니다. 두 번째 지름길은 결혼입니다. 느헤미야는 출생도 아니고 결혼도 아닙니다. 유대인이기 때문에 이방인과 결혼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느헤미야가 수산 궁의 술 맡은 관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실력밖에 없습니다. 부지런히 실력을 쌓았을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거나 불행을 원망하지 않고 더욱 노력해서 실력을 갖추었던 것입니다. 가문도, 배경도 느헤미야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생명처럼 붙들고 있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불행한 삶으로 인도하셨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붙잡았습니다. 그래서 이런 고백을 느헤미야가 합니다.
느 2장 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느헤미야를 도우셨다고 합니다.
느 2:8 “나의 하나님이 선하신 손길로 나를 잘 보살펴 주셔서”
느헤미야는 자신의 노력과 실력으로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형통하게 되었다는 것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우시면 살인 방조자 바울이 1세기를 움직이는 지도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우시면 포로된 여인 에스더가 민족을 살리는 왕비가 됩니다.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우시면 버림받은 요셉이 애굽의 국무총리가 됩니다. 하나님의 선한 손이 도우시면 죽음의 위기에 처한 다니엘이 명예와 존경을 받는 자리에 오릅니다.
하나님이 쓰시면 인생이 역전됩니다. 역사상에 이름을 남긴 인물들을 보십시오. 링컨, 헬렌켈러. 칼빈, 루터, 처칠, 워싱턴 모두 다 좋은 환경 좋은 조건을 갖추고 태어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불구자로, 초등학교도 못 갈 정도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도 있고, 걸어 다니는 병원이라고 조롱받을 정도로 건강하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불행한 환경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가족 여러분! 혹시 여러분의 삶이 불행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불행한 환경에 굴복하지 말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붙들고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2. 성공에 안주하지 않는 신앙
느 1:3 『그들이 나에게 대답하였다. "사로잡혀 오지 않고 그 지방에 남은 사람들은, 거기에서 고생이 아주 심합니다. 업신여김을 받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다 불에 탔습니다."』
사람들은 조금만 출세를 해도, 조금만 형편이 나아져도 금방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훌륭한 믿음의 사람들은 성공한 후에 안주하지 않았던 것을 알게 됩니다. 요셉은 노예에서 죄수에서 애굽의 총리가 되었지만 안주하지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야망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더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대부분 성공한 다음에 넘어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성공한 다음에 그 성공에 안주하려고 할 때입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참 좋아하는 성경구절이 있습니다. 고전 10:12 『그러므로 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인생의 위기는 성공한 다음에 찾아오고 신앙의 위기는 구원받은 다음에 찾아오는 것을 봅니다. 느헤미야는 성공했습니다. 무명에서 유명해졌습니다. 왕의 신임을 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권력도 가졌고, 재물도 가졌고,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 성공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그 출세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는 이름을 가진 동생이 유다를 다녀와서 조국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느 1:3 『그들이 나에게 대답하였다. "사로잡혀 오지 않고 그 지방에 남은 사람들은, 거기에서 고생이 아주 심합니다. 업신여김을 받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다 불에 탔습니다."』
예루살렘 성벽은 무너지고 성문들은 다 불에 타버렸다는 것입니다. 느헤비야는 먼 타국에 있고 자신은 성공하고 출세를 해서 아무런 걱정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조국의 불행을 보고 하나님께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현실에 안주하지 않는 신앙인은 다른 사람의 아픔을 가지고 기도의 자리에 나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성벽과 성전을 다시 세우기 위해서 자신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겠습니다.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 2세 왕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카고의 30대 중반의 한 의사 부부가 70순의 노모를 모시고 살았는데, 어느 날 예배를 드리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아프리카로 의료 선교사로 떠나라는 것입니다. 의사가 되기 위해서 모진 고생을 다하고 의사가 되었는데 이제 환자를 돌보면 안락하게 살려고 하는데 그 안락한 생활을 접고 다시 고생문이 훤한 아프리카로 떠나라는 것입니다. 의사부부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고 아프리카로 떠납니다. 성경 말씀 가운데 성도들이 가장 많이 암송하는 말씀중에 하나가 있습니다. 에스더 4:16 『죽으면 죽으리이다』
이 말은 바로 에스더 왕비가 한 말입니다. 악한 하만이 이스라엘 민족을 모두 말살하려고 할 때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전갈을 보내서 왕앞에 나아가서 민족을 구하라고 합니다.그 때 망설이고 있는 에스더에게 모르드개가 무슨 말씀을 합니까?
더 4:13 『모르드개가 그를 시켜 에스더에게 회답하되 너는 왕궁에 있으니 모든 유다인 중에 홀로 면하리라 생각지 말라』
더 4:14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너와 네 아비 집은 멸망하리라 네가 왕후의 위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아느냐』
우리는 안락한 생활에 안주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삶에 부족함이 없습니까? 기도의 제목을 찾으시고, 섬기고 헌신할 곳을 찾으십시오. 안락한 생활에 만족하는 현상유지는 믿음의 퇴보를 가져옵니다.
느헤미야에게 번민이 없었겠습니까? 갈등이 없었겠습니까? 다른 사람을 시키면 됩니다. 그에게는 그만한 권력이 있었습니다. 자기는 편안히 쉴 수 있었고 부담 가질 필요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 해도 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렇게 애써서 올라갔던 자신의 자리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가족 여러분! 하나님 안에서 성공을 꿈꾸십시오. 그러나 성공한 다음에 그 자리에 안주하지 마십시오.
3. 거룩한 기도생활.
느 1:6 『이제 이 종이 밤낮 주님 앞에서 주님의 종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드리는 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살펴 주십시오.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님을 거역하는 죄를 지은 것을 자복합니다. 저와 저의 집안까지도 죄를 지었습니다.
하나님의 믿는 백성의 특징 가운데 가장 중요한 특징은 삶의 문제를 만났을 때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를 보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달라는 기도, 자식이나 가족들이 잘 되게 해달라는 기도, 자신의 출세나 성공을 도와 달라는 기도가 대부분인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자기 중심적인 기도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나 중심의 이기적인 기도에서 벗어나 나라와 민족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도로 나아가야 합니다.
저는 느헤미야의 기도를 통해서 예수님의 거룩한 겟세마네 기도를 떠올리게 됩니다.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은 거룩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느헤미야의 기도는 자신을 위한 기도, 가족을 위한 기도를 넘어서 나라와 민족을 기도를 드렸습니다.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리는 가나안 농군학교를 세운 김용기 장로님은 기도실 문지망에 이런 글을 써 놓았습니다. "조국이여 안심하라 내가 기도하고 있다"
존 낙스(John Knox)가 스코틀랜드에서 복음을 전할 때 당시 통치자였던 메리여왕은 열심있는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개신교 신자들을 모두 죽이라고 명령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존 낙스는 자기 서재에 들어가 피를 토하는 마음으로 목표를 정하고 애끓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 스코틀랜드를 저에게 주십시오. 아니면, 저를 죽여주십시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자 메리여왕이 중병에 걸렸습니다. 여왕은 죽기 전에 "존낙스 한사람의 기도가 백만 대군보다 무섭다"는 말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우리가 느헤미야를 통해서 본받아야 할 것은 거룩한 기도생활입니다. 느헤미야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금식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회개합니다. 영적으로 성숙해가는 사람은 자기 뿐만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웃의 일을 남의 일이 아니라 자신의 일로 받아들입니다.
남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생각하고 기도합니다.
다른 사람의 질병을 자신의 질병으로 생각하고 기도합니다.
교회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고 회개하면서 기도합니다.
느헤미야는 개인적으로 금식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조국을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서 금식하면 기도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가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금식하며 기도를 하자 수척해졌습니다.
느헤미야를 사랑하는 아닥사스다 왕이 느헤미야에게 무슨 근심이 있느냐고 묻습니다.
느 2:3 『"임금님, 만수무강 하시기를 빕니다. 소신의 조상이 묻힌 성읍이 폐허가 되고 성문들이 모두 불에 탔다는 소식을 듣고서, 울적한 마음을 가누지 못한 탓입니다" 하고 아뢰었더니,』
느헤미야가 얼마나 기도을까요? 적어도 4개월을 기도했습니다. 이말을 들은 때가 기슬월입니다(11,12월). 그리고 왕 앞에 나간 때가 2장 1절을 보십시오. 니산 월(3,4월)입니다. 기도는 최후의 수단이 아니라 최선의 방책입니다.
느헤미야는 나라를 빼앗긴 것은 왕과 지도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회개합니다. 성읍의 폐허가 되고 성전 문이 불탄 것도 제사장과 종교 지도자들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느헤미야는 자신이 유대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는 페르시야 왕에게 부탁하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자신을 신뢰하고 기쁘게 여기는 아닥사스다 왕에게 부탁을 하면 들어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보내고 보지 않는 것은 페르시야 왕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페르시야 왕은 느헤미야가 안전하게 유대로 돌아갈 수 있도록 모든 조처를 다 취합니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있다는 야고보서의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