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월남 참전용사 위로회
2026년 6월 9일 월남 참전용사 위로회가 있었다. 우리 교회 성출이, 이민웅, 박상문, 양남진 원로장로와 최태영 원로권사 부부, 故 신성길의 미망인 정정숙 원로권사가 참석했다. 명동수 원로권사와 이종태 원로집사는 일신상의 이유로 함께하지 못했다. 성출이 원로장로는 한국전쟁도 참전했던 노병이고 이민웅 원로장로는 전역 날짜를 훌쩍 넘겨 1년 더 복무했고 최태영 원로권사는 두 번이나 참전한 용사다. 이날 행사는 호국보훈의 달 6월과 제71회 현충일을 맞이하여 처절했던 한국 현대사의 정점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온몸을 바친 우리 교회 참전용사를 기념하는 모임이었고 교회 역사상 최초의 행사였다.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 치열했던 전쟁의 한복판에서 땀과 피를 쏟은 그들의 공로가 뒷사람에게는 애국의 마음을 고취하자는 뜻도 담았다.
대한민국 현대사 중 가장 비극적인 사건은 단연코 전쟁이다. 1950년 북한 공산군의 기습남침한 한국전쟁은 말할 것도 없고 1964년부터 참전한 월남전이다. 월남에서 미국과 연합군이 전투부대를 파병하여 본격적인 전쟁이 전개된 시기는 1964년 통킹만 사건 이후였다. 한국 정부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우방국에 보답한다는 명분으로 해외 파병 동의안을 국회에 요청하였다. 1964년 7월 31일 이 안이 통과되어 정부는 그해 9월 11일 제1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 교관단을 최초로 파병하였다. 1965년 2월~3월 주월한국국군사원조단 비둘기부대가 인천항을 떠났다. 이때까지는 베트남 현지민을 돕고 파괴시설 복구 등 대민 지원하는 비전투부대였으나 1965년 9월 1일 주월한국군사령부 창설로 전투부대 파병이 본격화되었다. 1965년 10월~11월 육군 맹호부대(수도사단), 해병 청룡부대(제2여단), 1966년 3월~10월 육군 백마부대(제9사단)가 뒤를 이어 월남으로 향했다. 1966년 3월 제100 군수사령부 십자성 부대가 창설되어 한국군의 식량, 보급, 수송, 정비, 의무, 공병, 항공 등을 총괄하는 거대한 살림꾼 부대로 출격했다.
전투부대 파병 용사는 부산항에 집결했다. 출항을 알리는 뱃고동 소리가 울리자 오색테이프가 찢어지며 군함이 떠날 때 만세 합창과 함께 끝내 터져 버린 부모 형제의 울음보는 이별의 부산항을 눈물의 항으로 만들어 버렸다. 파병 용사들 역시 눈물을 훔치며 점점 멀어지는 조국을 뒤로하고 6일간의 긴 항해 끝에 전운이 감도는 월남에 도착했다. 부대별로 주월사령부는 사이공항에, 청룡 및 백마부대는 깜라인항에, 맹호부대는 퀴논항에 내려 작전 지역으로 이동했다. 이후 자랑스러운 한국군은 저마다 전사(戰史)에 길이 남을 전공을 세웠다. 1966년 맹호의 듀코전투, 1967년 청룡의 짜빈동전투, 백마의 홍길동작전, 맹호와 백마가 견우와 직녀처럼 합동한 오작교작전은 세계전쟁사에도 길이 빛날 전과였다. 그러나 이 전쟁은 10년의 지루한 장기전으로 전환되다가 마침내 1973년 1월 27일 프랑스 파리에서 미국, 남베트남(월남), 북베트남(월맹), 남베트남 민족해방전선(베트콩) 대표가 모여 파리평화협정에 서명하고 종전되었다. 한국군은 1964년 9월 파병 이래 1973년 3월 23일 완전 철수 때까지 누적 31만 명의 국군과 최대 5만 명의 상주군이 작전 임무를 수행했다. 참전국 중 미국 다음으로 대규모의 피해를 남긴 전쟁이 되었다.
월남전은 대한민국의 근대화를 앞당기는데 직간접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전쟁이라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오늘의 경제부국, 군사강국의 한국을 이룩하는 데 결정적이었으니 말이다. 당시 한국은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 중이었다. 개발 자금이 절실했던 때 파병의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대규모 군사 원조, 차관 제공을 약속받는 브라운 각서(1964년)를 체결하여 국가 근대화 자금을 마련했다. 파병 기간 중 벌어들인 외화는 약 50억 달러, 현재 한화로 64조 3천5백억 원의 가치다. 당시 한국의 1년 수출 총액은 1억 달러였으니 엄청난 거금이었다. 이 자금은 고스란히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 설립에 투자되었고 대한민국의 중화학 산업화의 종잣돈으로 고스란히 사용되었다. 당시 우리의 아들을 사지로 내몰고 목숨을 담보로 돈을 번다는 반전 여론이 있었지만 미국은 주한미군을 철수하여 월남전에 참전시킬 계획이어서 월남전은 자칫 국가 안보에 공백이 발생하게 되어 이를 막기 위해서 월남전 파병은 불가피했다. 동시에 국가 발전에 직결되는 대가를 받게 되었으니 따지고 보면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였다.
이런 조국의 근대화에 혁혁한 공을 세운 우리 교회 월남 참전용사들은 그 공로를 누군가가 기억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한 세월이 지났다. 이제 백발이 아름다운 이들은 이미 망각 속에 고이 저장되었을 아련한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마치 어제 월남에서 귀국한 용사처럼 전시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하며 그 얼굴에는 해맑은 미소와 진지함이 섞여 있었다. 가난했던 시절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하려고 사지의 전쟁현장이든 사막의 건설현장이든 마다하지 않고 달려갔던 그 발걸음은 오늘의 자유 대한민국을 올곧게 세운 밑거름이었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고 말한 백전노장 맥아더의 말처럼 노병의 죽지 않는 애국정신이 자유 민주 한국의 초석이 되었으니 그들이 지켜낸 자유의 깃발을 민주의 물결이 출렁이는 우리의 바다 위에서 힘차게 펄럭이도록 뜻을 모아야 한다. 참전용사 위로회에 함께한 노병들의 웃음꽃에는 혹독한 겨울을 이겨낸 설중매(雪中梅)의 기풍이 풍겨났다. 그들의 숭고한 얼을 이어받아서 또 밝은 미래를 준비할 사명은 뒷사람의 몫이리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한복음 12:24).
노병의 아내들의 장미아치가든에서 한 컷
최태영 원로권사와 장광숙 원로권사
위로회 만찬에서 위ㅏ로와 격려의 인사를 하는 홍성현 담임목사(작은굴식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