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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3성 관광 정보

발해시대의 석등

작성자Phogrho|작성시간16.02.12|조회수505 목록 댓글 0


발해는 698년 대조영이 건국한 이래 926년 거란에 의해 멸망되기까지 15대 왕조를 거치며 번성했다. 건국 이후 선왕(宣王)대에 이르러 정치적 안정과 영토 확장을 거치며 대국으로 성장했고, 13대 대현석(大玄錫) 때에 이르러서는 당으로부터 해동성국이라 불리울 정도로 정치·사회·문화적으로 번영을 구가했다. 문화적으로는 고구려를 계승하면서 동시에 당의 문화를 받아들여 발전을 이룩했는데, 그 중심선상에 자리했던 불교는 건국 초기부터 국가 통치 기반의 중요한 이념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이에 따라 발해의 영토 내에서 많은 수의 절터가 확인된 바 있고,1) 이곳에서 출토된 유물에 대한 연구도 활발히 진행되었다.2) 발해 전역에서 확인되는 절터와 유물은 불교가 성행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표로 생각되는데, 동경성에는 석등이 현존하고 있어 더욱 주목된다. 상경 용천부 석등은 중국 흑룡강성 영안현 상경용천부 제2절터에 소재한 높이 6.3m 규모의 석등이다. 이 석등에 대한 가장 이른 시기의 조사 연구는 1939년에 발간된 동경성-발해국(東京城-渤海國) 상경용천부의 발굴조사(上京龍泉府址發掘調査)이다.3) 이 책자에 기술된 내용 중 일부를 적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 석탑(실은 석등)은 고사기(高士奇)가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전체가 동남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서 있다. 그 구륜·입석·화대석·중대석·간석·기대석은 각각 별개의 돌로 만들어져 있다. 입석·화대석·기대석은 팔각형, 중대석은 연판을 형상화했고, 간석은 원주, 기대석은 그 상반에 연판이 새겨져 있지만 하반은 땅속에 매몰되어 있었다. 이 하반의 형상은 우리가 실측과 촬영을 위해 기대 주위를 적당한 깊이로 파내려갔을 때 그 팔각형의 각면에 웅혼(雄渾)한 연판장의 광협간(廣狹間)이 새겨져 있음이 드러났다. 그리하여 총 높이 19척 가량의 전체 형태를 볼 수 있었는데, 그 간의 두께와 둘레의 모습은 뭐라 말할 수 없는 강렬함과 안정감을 자아낸다. 그러나 이 기공이 많은 거무스름한 현무암의 석재가 갖는 묵직한 작풍을 접하면 누구라도 소박한 발해인의 혼의 기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위 기록을 보면 1939년의 조사 당시 하대석의 하부가 매몰되어 있어 전모를 노출시킨 정황과 더불어 모든 부재가 구비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기록은 현존하는 발해 석등에 대한 가장 초기적인 자료로 생각되는데, 조사 당시 실측 도면이 작성되어 지금도 연구의 주요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이후 방학봉 선생에 의해 간략히 소개된 된 바 있고, 정명호 선생에 의해 양식적인 고찰이 진행된 바 있다.5) 이후 중국 학자 주국침·주위(朱國忱·朱威)에 의해 비교적 상세한 내용이 소개된 바 있다. 이 석등은 현무암을 사용해 하대석으로부터 옥개석에 이르기까지 평면 팔각형으로 조성되었다. 여러 매의 석재로 이루어진 지대석 상면에 상·2단으로 구성된 하대석을 놓았다. 하단석에는 각 면 1구씩 좌·2괄호형의 안상이 조식되었는데, 높직한 하단석 각 면의 규모에 걸맞는 높이와 너비를 지녀 시원스러운 느낌을 준다. 상단석에는 3중의 단엽 8판 복연이 조식되었다. 연화문은 하면으로부터 상면으로 갈수록 일정한 비례로 크기가 줄어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서로 판단이 교차되며, 중첩되게 조식되어 매우 화사한 구도를 보이고 있다. 이처럼 하대석에 3중으로 연화문이 조식된 경우는 당나라나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어느 석등에서도 볼 수 없는 매우 특이한 양식이다. 더욱이 종선이 높고 강렬하게 표현되어 있어 마치 고구려시대의 연판을 보는 듯하다. 상면에는 낮은 각형 1단의 받침을 조출했다. 간주석은 원주형으로 엔타시스와 배흘림 기법이 모두 보이고 있는데, 석등의 규모와 어울리는 높이와 너비를 지녀 안정감을 부여하고 있다.7) 상대석에도 3중 앙연이 조식되었는데 중심부에 길쭉한 화문을 조식한 점은 하대석과 다르다. 상면에는 별석으로 조성한 받침석을 놓았는데 하면에는 각형 1단의 부연이, 상면에는 낮은 각형 1단의 받침을 조출했다. 팔각 받침석의 각 모서리에는 모두 방형의 홈이 조성되어 있다. 팔각의 화사석은 각 모서리에 우주를 모각하고 있는데 하면에는 도드라지게 초석과 하방을 표현했다. 상부 역시 평방과 더불어 주두와 주심포를 사실적으로 조식했다. 이처럼 목조 건축의 기둥으로 8분된 각 면에는 1단의 턱을 두고 8개소에 화창을 개설했고, 상부에는 주심포 사이에 목조 건축에서와 같이 포벽을 형성하였다. 옥개석의 하면에는 서까래와 추녀가 정교하게 표현되었다. 낙수면은 정상으로부터 1/3정도는 급하지만 나머지 부분에서 완만한 경사를 지니고 있다. 낙수면에는 정교한 기왓골과 함께 두툼하게 내림마루를 표현했는데, 처마에 이르러 암·수막새기와까지 정교하게 표현되었다.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가 전각에 이르러 경쾌한 반전을 이루고 있다. 정상에는 평면 원형의 상륜부를 놓았다. 동경성-발해국(東京城-渤海國) 상경용천부의 발굴조사(上京龍泉府址發掘調査)에 제시된 도면(아래 도면 45)를 보면, 앙연대 위에 수연으로 추정되는 부재와 보개가 표시되어 있다. 그러나 근래에 촬영한 사진에는 수연과 보개 없이 보주만 놓여 있어, 후대에 진행되었던 보수 시 손실된 것으로 생각된다. 보수 공사전의 상륜부 양식에 대해서는 주국침·주위 선생에 의해 상세히 소개된 바 있는데, 이를 적기해 보면 다음과 같다."현재 찰정(刹頂)은 만수상(饅首狀)으로 원래 찰정이 아니고, 묶은 후에 보충 제작한 것이다. 남아있는 원래 찰정 사진에서 보면, 정은 보개로 되어 있고, 모양은 복발(覆缽)과 같다. 그 아래는 장원형과상석각(長圓形瓜狀石刻)으로 되어 있는데, 곧 보병(寶甁)은 상륜정(相輪頂)의 노반 위에 설치하였다. 보병 위에는 간단한 무늬 장식이 새겨져 있다. 노반앙연상은 상륜과 연결 조각되어 있다. 상륜은 사륜중첩으로 되어 있고, 위에서 아래로 윤이 점점 커지고, 윤변(輪邊)은 무늬 장식이 오목하게 조각되어 있다. 상륜 아래는 연주(聯珠)가 새겨져 있는데 상륜보다 작다. 그 아래는 연상복발(蓮狀覆缽)이 새겨져 있고, 당개(幢蓋)의 상면에 설치하였다. 이상의 상황은 보수전 상륜부의 양식인 바, 현재의 상태를 보면, 가장 아랫단에는 판 내에 원문이 있는 단엽 8판의 복연을 두른 노반을 두었다. 연판은 길이에 비해 너비가 넓어 동글동글한 양식을 지니고 있다. 간지의 상단에는 삼각형의 문양이, 하단에는 간엽이 표현되어 이채롭다. 노반의 상면에는 중앙의 횡선을 중심으로 상·하에 소형 화문이 밀집 조식된 4개의 보륜이 중첩되어 있다. 가장 상면에는 8엽의 연화문으로 구성된 앙연대 위에 보주를 놓았다. 이같은 정황을 볼 때 보륜까지는 본래의 양식을 지니고 있지만, 이상의 부재는 결실되어 새로 보충한 것임이 분명하다. 이상에서 발해 동경성 제2사지10)에 건립되어 있는 석등의 양식에 대해 살펴보았다. 발해시대에 건립된 유일한 석등인 탓에 당시의 조형물과의 양식을 비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당시 당나라나 통일신라시대에는 이미 상당수의 석등이 건립되어 있어 발해 석등에 구현된 제반 양식이 어느 나라와 관련성을 지니고 있는가에 관한 문제는 고찰이 가능한데, 이를 살펴보면 첫째, 석등의 평면이 팔각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중국에는 북제와 당나라때 건립된 석등에서 부분적으로 원형이나 팔각형이 보이고 있지만,11) 이처럼 전체 부재가 팔각이 중심을 이루는 경우는 백제시대에 시작되어 통일신라시대에 확립된 양식이었다. 따라서 석등에 구현된 평면구도는 통일신라시대의 석등에 근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둘째, ·하대석에 구현된 연화문의 양식을 살펴보자. 이 석등에서는 상·하대석에 모두 3중 연화문이 중첩 시문되어 있는데, 먼저 하대석의 경우는 매우 특이한 양식이다. 이 같은 연화문은 당()대의 석등에서는 볼 수 없는 양식임에 비해, 9세기에 건립된 성주사지 석등에는 2중으로 연화문이 조성되어 있다. 이에 반해 상대석에 구현된 3중의 앙연은 당나라때 조성된 석불 대좌에서 간간이 보이는 양식이고, 9세기에 조성된 실상사 증각대사응료탑 및 수철화상능가보월탑에서도 확인된다. 따라서 이 양식의 연화문은 당나라와 통일신라시대에 모두 나타남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연화문이 지닌 양식을 보면 하대석에서는 고구려적인 요소가, 상대석에서는 고구려 및 고려시대의 수막새기와와 연관성을 보이는 요소가 존재한다.12) 결국 연화문의 배치 수법은 당시의 문화적 동향에서 찾을 수 있지만, 양식적인 면에서는 고구려의 수법을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셋째, 화사부의 양식이 팔각형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당나라 때 조성된 석등 중 팔각형의 화사석과 옥개석이 발견되는 것은 법흥사 석등이 유일하지만 한국의 석등에서는 이미 보편적인 양식이었다. 더욱이 곳곳에 구현된 목조 건축의 양식은 9세에 건립된 팔각원당형 석조 부도에서도 보이는 양식이다. 물론 당나라 때 건립된 불탑에서도 기둥과 공포 등 사실적인 표현을 볼 수 있지만 팔각형의 조성은 희귀한 양식이었다.13) 이와 같이 목조 건축의 양식이 완벽하게 반영된 것에는 당나라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팔각원당형 석조 부도와 실상사 백장암 석등에서와 같이 목조 건축을 재현하는 문화적 소양이 전파되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발해 용천부 석등에 구현된 제반 양식은 당나라의 문화를 계승한 것이 아니라 삼국과 통일신라시대에 확립된 석등의 계보에서 찾을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화사부의 조형은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팔각원당형 석조 부도의 탑신부와 밀접한 연관이 있음도 알 수 있었다. 부분적으로 연화문의 양식에 비록 고구려적인 요소가 있지만, 배치의 방식에 있어서도 통일신라시대의 그것과 같은 양상이라는 사실 또한 파악되었다. 결국 발해 용천부 석등에 구현된 평면 구도나, 연화문과 각부의 조성 수법은 통일신라시대에 확립된 일반형 석등의 양식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최근의 연구 성과에서도 발해와 통일신라의 교류에 대해 언급하고 있고, 발해시대에 조성된 수막새기와의 양식을 분석한 연구에서도 통일신라와 연관성이 있음을 규명한 바 있다. 이상과 같이 용천부 석등이 지닌 양식을 검토해 본 결과 이 석등은 당나라의 문화적 영향을 받아 건립된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고구려의 문화를 계승하면서 통일신라시대에 확립된 석등 양식의 영향을 받아 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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