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항일연군의 쇠퇴와 연해주 도피

작성자Phogrho|작성시간15.10.30|조회수422 목록 댓글 0


 

김일성 등이 거느리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6사의 보천보 진입전투를 계기로 일제는 한반도 북동부지역에 대한 대대적 수색작전을 벌여 두 차례의 혜산사건을 빚어내면서 항일연군 및 조국광복회 관계자 739명을 검거하는 대탄압을 벌였다. 이 때문에 항일연군과 조국광복회에 관계된 인사들이 대거 체포되고 산하 조직의 대부분이 와해되고 말았다.

하지만 항일연군 제2·3방면군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함경북도 무산 진입전투19395, 일본군과 만주국군 100여 명을 섬멸한 안도현 대사하大沙河전투같은 해 8, 악명높던 마에다前田 토벌대’ 120여 명을 궤멸시킨 화룡현 홍기하紅旗河전투19403월 등을 전개하여 최후까지 적에 큰 손실을 주었다. 그러나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에 대한 일본군경 및 만주국군의 토벌도 강화되어 마침내 194021로군 사령관 양정우가 전사하고 만주지역의 잔존 항일연군도 거의 소멸되고 말았다. 그 뒤 만주지방에서 조직적 군사활동이 어려워진 잔존 동북항일연군은 1940년 겨울부터 동·북만 을 거쳐 소련연해주으로 이동하였다. 이들은 소련측의 도움을 받아 남야영南野營과 북야영으로 불리우는 거점조직을 세웠으나, 19427월 동북항일연군 교도려로 편제되었다. 교도려는 소련군 산하 국제홍군 제88특별여단이라고도 했다. 이 무렵 이들의 전체 대원은 600여 명이었는데, 이 가운데 한인은 150여 명이 있었다. 대부분의 동북항일연군 잔존 세력은 1940년대 초반 소련으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김책·허형식·박길송朴吉松 등은 소련으로 들어와 후일을 도모하라는 상부의 지시도 거부한 채 북만주지방에서 1942~1943년까지 완강하게 투쟁을 계속하였다. 소련으로 철수한 동북항일연군내 한인 대원들은 중국 동북에 소부대를 파견하여 정찰활동을 전개하고, 철도와 도로를 파괴하는 등 소규모 전투도 간헐적으로 벌였다. 이들은 해방 직전까지 꾸준히 소규모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한편, 조국광복회 재건활동을 전개하여 만주국 치안당국 및 일제 관헌측을 놀라게 하였다. 실제로 1943년 봄 강위룡姜渭龍 등 동북항일연군 교도려 소속 부대원 16명은 소부대 활동을 전개하면서 연변延邊지역에서 조국광복회 조직활동 을 전개하였다. 이때 결성된 개산둔開山屯지역 조국광복회 조직은 1944년 말 강위만姜渭滿, 강위룡의 형·김동길 등 30여 명의 관계자가 체포된 뒤 와해되고 말았다. 이러한 사례를 통해 동북항일연군 교도려 무장투쟁 세력이 지속적으로 대중화사업을 추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대중조직인 조국광복회 관련 하부조직이 여러 지역에서 다양한 양상을 보이며 무장투쟁세력과 연계하여 꾸준히 활동을 전개하였던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라고 하겠다.19458월 초 소련의 대일선전포고로 소·일전쟁이 발발하자 동북항일연군 교도려의 일부 한인들은 대일 군사작전에 참가했으나, 다수의 한인 대원들은 직접 독립전쟁조국해방전쟁에 참가할 기회를 갖지 못하고 이 해 9월경 소련군과 함께 귀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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