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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주변, 장흥의 미학

작성자보르도|작성시간26.06.17|조회수4 목록 댓글 0
문학의 주변, 장흥의 미학

해거름 혹은 해 뜰 녘 남포에서 밀물을 만나면 운수대통이다. 반짝이는 공기와 그만큼 반짝이는 물 위로 공중부양하듯 조심조심 발을 떼며 섬에 다가가는 이적(異蹟)을 경험할 수 있으니까. 남포에서 더 올라가면 나오는 득량만 여다지해변 갯벌은 낙지와 조개 천지다. 처연할 정도로 시뻘건 여다지 석양은 꼭 보아야 한다.

그러다 여행자는 숲으로 간다. 조림가 손석영이 1958년부터 억불산 황무지에 심은 편백나무가 진득하게 피톤치드를 내뿜는 숲이다. 숲만 찾아도 장흥에 들른 본전을 찾는다. 그 옆에는 해방 정국 때 좌와 우 모두에게서 존경을 받은 지주 출신 정치가 고영완이 살던 고택이 있다. 배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작은 인공호수가 반기는 마을 이름은 평화리다.


장흥 북쪽 신라 고찰 보림사도 가봐야 한다. 이 땅에 선종(禪宗)이 첫발을 디딘 가람이요, 아마도 이 땅에서 가장 위풍당당한 철불을 만날 수 있는 곳이며 신라 석탑의 전범(典範)인 석탑을 볼 수 있는 곳이다. 화려하되 절제미 가득한 보조선사탑도 반드시 본다.

 

폐쇄된 장흥교도소 외벽. 이 높은 벽을 사이에 두고 전혀 다른 삶이 펼쳐지곤 했다.


기이하게도, 다른 곳으로 이전된 옛 장흥교도소에 그 모든 아름다움이 숨어 있다. 빈한함과 풍요로움, 동학 패전과 신문물 흡수라는 모순된 현실과 이상이 이 폐쇄된 감옥소에 압축돼 있다. 장식 하나 없이 하얗게 칠해놓은 두꺼운 시멘트 외벽을 주목한본다. 거대한 벽이 구분해놓은 공간 이쪽과 저쪽 삶과 고뇌, 고민을 생각하며 기념사진 한 장. 그때 시인이 이리 묻는 것이었다. '울며 바닥을 혀로 기어본 적 있느냐?/ 강이 묻는다'(이대흠 '강이 묻는다' 전문) 문득, 장흥 이었다.
[42] 문경새재와 아리랑을 부르는 송옥자신충원 이야기
충주 사람 신충원(辛忠元)은 문경새재 한가운데에 성벽을 쌓았다. 지금 조곡관이라 부르는 문경새재 2관문이다. 신충원은 충주에서 군사를 일으켜 왜군과 맞선 의병이었다. 누가 시킨 일은 아니었다. 그저 새재 개울 앞 매바위 길목만 지키면 적은 병력으로도 나라를 지키리라 믿었다. 매바위 앞은 임진왜란 발발 직후 고니시 유키나가와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일본 육군 4만 병력이 무혈로 통과한 길목이었다. 성을 짓네 마네 하고 관료들이 말싸움을 벌이고 있을 때, 신충원은 사람을 모아 성을 쌓았다. 신충원을 찾아가 의지하는 전라·충청도 피란민들로 산중이 가득했다. 1594년, 임진왜란이 터지고 2년 뒤 이야기다. 역사는 이후 황당하게 흘러갔다.


영남대로와 문경새재

개국과 함께 조선 정부는 전국에서 한양에 닿는 고속도로 9개를 건설했다. 이 가운데 부산에서 한양까지 380㎞ 길을 영남대로라고 불렀다. 경부고속도로보다 48㎞ 짧았다. 걸어서 보름이 걸렸다. 경상도에서 충청도로 넘어가는 문경새재는 영남대로에서 가장 험준한 고개였다. 억새가 무성해 새재라고 했고 새도 넘기 어렵다고 해서 새재라고도 했다.
 

▲문경새재 제1관문 주흘관. 아무도, 아무것도 없던 이 새재를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가 무혈로 통과했다. 이후 조선은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박종인 기자
 
다양한 삶이 새재를 넘었다. 과거 보러 가는 선비도 있었고 가족 생계를 책임지는 보부상도 있었고 지방 출장을 떠난 공무원도 있었다. 선비들은 고개 중턱에 있는 책바위에 돌을 던지며 합격을 빌었다.


아리랑 부르는 송옥자

주흘산, 조령산 자락에는 물박달나무가 많았다. 재질이 단단하되 가지가 가늘고 크지 못한 물박달은 쓸모가 적었다. 부러지면 버리고 다시 깎아 망치 머리에 끼워넣는 연장 자루 정도? 그런 정서는 새재 사람들이 흥얼대는 아리랑 가락에도 남아 있다.
 

▲문경새재 아리랑을 복원한 송옥자.
 
새재 아리랑을 노래하는 여자, 송옥자(65)가 말했다. "낙락장송 좋은 나무는 잘 다듬어져 경복궁 만들었다. 몇 백 년 가도 안 썩는다. 우리 물박달은 경복궁 만들 때 연장 자루로 썼다.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갔다. 양반들에게 대들지도 못하고 항의도 못 하니, 저 물박달 신세와 내 신세가 뭐가 다른가."

대전 여자 송옥자는 1972년 1월 10일 경기도 광주에서 살다가 문경으로 시집을 왔다. 한 해 제사가 열 번이 넘었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라디오도 없는 촌구석에서 송옥숙은 베틀을 돌리며 우울증을 앓았다. 심하게 앓았다. 죽겠다고 농약도 먹었다. 1986년 마을 스피커 방송에서 문경 사람 송영철이 부르는 문경새재 아리랑을 들었다. 나훈아의 문경새재, 송춘희의 문경 아가씨, 조용필의 강원도 아리랑이 흘러나왔다. 송옥자가 말했다. "운명을 받아들였다. 노래로 한풀이하겠다고."

송옥자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소리를 배웠다. 시조에서 시작해 경기 민요로 넘어갔고, 아리랑에 정착했다. "문경에서 내 존재감 되찾고 이름 석 자 남기려면 아리랑밖에 없었다." 그리되었다. 송영철을 찾아가 소리를 배우고, 가사를 짓고, 노인들을 찾아가 가사를 채록했다. 세월이 흘러 2016년 송옥자는 문경새재 아리랑 전승자가 되었다. 새재 중턱에는 송영철과 송옥자가 복원한 문경새재 아리랑 기념비가 서 있다. 송옥자는 노래를 하며 여러 번 울었다. 연장 자루처럼 산 인생이 어쩌면 새재 아리랑 가사와 그리 똑같은지!


문경새재와 탄금대와 서울 남대문

1592년 4월 26일,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2만 일본 육군이 문경에 도착했다. 부산에 상륙한 지 열사흘 만이었다. 문제는 고모산성 토끼비리와 문경새재였다. 목이 좁고 외길이라, 자칫하면 병력 손실은 물론 패전까지도 우려되는 길목이었다. 그런데 수색을 갔다 돌아온 척후병 보고는 "조선 병사 단 한 명도 없음"이었다. 계략이라 의심한 고니시가 몇 번이나 거듭 척후병을 보냈어도 마찬가지였다. 징비록은 이렇게 기록했다. "적장이 '하늘이 도왔다'며 춤을 추며 지나갔다." 조선 정부는 북방 오랑캐를 무찌른 장군 신립에게 중앙 정예 부대를 주고 새재 방어를 맡겼다. "… 모두가 새재를 이용해 적을 막자고 했으나 신립은 따르지 않고 들판에서 싸우려 했다. 아군은 대패(大敗)했다. 신립은 물에 뛰어들어 죽었다."(선조실록)
 

▲맨발로 걷는 문경새재
 
새재는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마저도 두려움에 떨며 머뭇대던 요새였다. 그런데 평야 기마전에 익숙한 신립은 산성을 버리고 충주 달천변 들판을 택했다. 논투성이 들판은 말이 달릴 수 없었고, 배후에는 탄금대 절벽이 버티고 있었다. '땅을 진동하는 총소리와 하늘 가득한 먼지에'(징비록) 조선군 8000명은 전멸했다.

"토끼비리와 새재 사이에 활 잘 쏘는 군사 수천 명을 매복시켰어도 능히 적을 막아낼 수 있었다. 그 험한 요새를 버려둔 채 평지에 나와 싸웠으니 어찌 패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징비록) "대장 신립(申砬)은 조령을 지키지 않고 달천(達川)으로 물러나 주둔하여 한 차례 접전에 1만 군사가 섬멸되었으니, 말을 하자면 참혹하다."(선조실록)

고니시 부대는 그길로 양평을 거쳐 한양으로 진격했다. 탄금대 전투를 옆에서 지켜보던 라이벌 가토 기요마사 부대는 용인을 거쳐 같은 날 한양에 입성했다. 342년 뒤인 1934년 8월 27일 조선 총독부는 두 부대가 입성한 남대문과 동대문을 조선 고적 1·2호로 지정했다. 당시 여행 가이드북 '趣味の朝鮮の旅'에는 이렇게 소개돼 있다. "가토 기요마사 부대와 고니시 유키나가 부대가 남대문과 동대문으로 경성에 들어갔다." 남대문과 동대문은 대한민국 국보 1호, 보물 1호다.


새재를 걷다

전쟁이 끝나고 새재 고개에 평화가 왔다. 문경에 부임한 현감들도 태평천국을 누렸다. 현감이 떠나며 백성들은 선정비를 세웠다. 아니, 많은 현감이 재임 기간에 돈을 걷어 선정비를 세웠다. 그러니까 선정비라기보다 악정비다. 전국에 있는 많은 선정비가 부서져 있다. 원님이 떠나고 주민들이 한풀이를 한 흔적이다. 경상감사 이취임식이 벌어지던 새재 교귀정 옆에는 선정비가 여럿 서 있다. 이모(李某) 현감 선정비와 애휼비는 한풀이를 피하려고 아예 큰 바위에 조각으로 새겨놓았다.
 

의병 신충원이 축성한 문경새재 2관문 조곡관. 임진왜란 발발 2년 뒤인 1594년에 세웠다.
 
신충원이 2관문을 세우고 근 200년이 흐른 숙종 대에 1관문과 3관문이 축성됐다. 구한말 문경에 의병이 일어나자 일본 토벌대가 새재를 휩쓸었다. 그때 2관문과 3관문이 무너졌다. 1관문은 6·25 때 전화(戰禍)를 겪었다. 2관문 부근 소나무 밑동에는 일제강점기 후반 군용 연료로 송진을 채취한 V자 상처가 남아 있다.

관문들은 1974년 대대적 보수 끝에 복원됐다. 1976년 당시 대통령 박정희가 청년 시절 교사로 있던 문경을 찾았다. 그때 포장도로로 계획된 문경새재 개발이 전면 백지화됐다. 지금 새재길은 맨발로 걸을 수 있는 길로 남아 있다. 새재길은 관광공사가 선정한 '걷고 싶은 길' 1위에 늘상 오른다.


다시 신충원 이야기

유성룡에 따르면 새재에 관문을 세우고 정유재란 때 일본군 통과를 저지한 신충원의 인생은 이해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신충원이 모집한 사람 중에 노비가 많았는데 노예를 잃은 주인들 비방이 자자했다. 신충원 또한 지나치고 거슬리는 일이 없지 않았다. 이 때문에 끝내 금부에 잡혀 형을 백여 차례 받고 사면이 있어도 풀려나지 못했다." 이후 신충원의 행적은 전혀 기록이 없으니, 그 인생이 새재 골짜기에 무성한 물박달나무와 다를 바가 무엇인가.

오늘, 새재를 걸었다. 역사를 걸었다. 답습해선 아니 될 역사 속을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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