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경도 출신 조선인(고려인)들이 1863년 최초로 정착한 마을, 지신허(地信墟, 러시아어 비노그라드노예)를 찾았다. 중국 훈춘 국경으로 가는 길, 크라스키노행 도로에서 포시예트 항구를 지나면 서쪽으로 갈라지는 길이다. 농로 길을 10여 분 차로 이동하면 철조망과 차단 초소가 나타난다. 중국 국경이 가까워 민간인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다. 우리는 사전에 지신허마을의 유일한 거주자인 러시아인 ‘엘레나’의 사전 승낙이 있어 통과할 수 있었다. 지신허 기념비 앞, 강철여인 엘레나와 함께 다시 차에서 내려 10여 분 숲길을 걸어가면 농촌주택과 멀리 언덕에 기념비 하나가 나타난다. 이곳이 바로 조선인 양응범과 최운보의 일행, 13가구 60여 명이 불법이주의 발길을 멈춰 집을 짓고 개척을 시작한 곳 지신허의 옛 땅이다. 지신허의 조선인(고려인)은 이주 5년 만에 165가구 인구가 천여 명에 달하였다. 기아와 압제를 피해 기하급수적으로 조선인이 유입된 것이다. 이 번창하던 지신허 부락에 1905년 이후 망국 조선의 망명 지사가 나타나고, 10여 년 뒤에는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의 손길을 벗어날 수 없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국영농장(콜호즈)으로 개편되며 지신허에서 개인의 농지소유권은 사라졌다. 그나마 안정적인 이민의 삶도 1937년 스탈린 정권의 강압정책에 따라 풍비박산의 지경을 맞는다. 지신허 초원의 동쪽, 동해와 두만강쪽 이곳에 거주하던 고려인 전원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하며 흔적조차 사라진 것이다. 이후 이곳은 인적없는 폐허의 불모지가 되었다. 지신허는 고려인의 머리에서 사라졌다. 역사는 성쇠와 흥망을 반복하며 발전하는가!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이 1990년 들어 붕괴하며, 이곳 지신허에도 러시아인 농부가 찾아들었다. 그는 ‘시지코브 보리스 알렉산드로비치’라는 인물로 이곳에서 농장을 경영하기 위해 귀향한 러시아인 농부였다. 가수 서태지의 지신허 기념비 1990년 9월 해빙기의 물결은 이념의 장벽을 넘어 한국-러시아 수교를 이루어냈다 물이 빠지면 땅이 드러나듯, 공산주의 하에서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한 고려인의 실상이 서서히 드러났다. 1990년대 후반부터 조심스럽게 고려인과 한국인 역사가들이 지신허의 실체를 찾기 시작했다. 살아있는 고려인들의 증언이 이어지고, 고려인의 유물들이 이 농장에서 발굴되기 시작했다. 연해주 고려인 역사는 또 한 번 드라마틱한 경로를 간다. 한국의 전위 음악인 가수 서태지가 개방의 물결을 타고 2004년 5월 8일 블라디보스토크 ‘디나모 스타디움’에서 ‘한러 수교 120주년 기념공연’을 열었다. 서태지는 전위 음악과 복장, 신장비와 조명으로 현대 음악에 갈증 나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젊은 영혼을 뒤흔들었다. 1863년 고려인의 집단 이주 이후 야외스타디움에서 러시아의 젊은이 2만여 명이 모인 기념비적인 공연이었다. 서태지는 공연 수익금으로 ‘지신허 마을 옛터’를 시지코브의 농장에 세워 헌정했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했는가! 음악인 서태지는 지신허에 그렇게 이름을 남겼다. 고려인의 이주 역사도 140년 만에 부활했다. 시지코브 보리스가 죽고 그의 딸 시지코바 엘레나(53세)가 상속을 받아 부친의 유지를 받들어 귀향했다. 엘레나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인터넷 마케팅과 웹 개발전문가로 일해왔으나, 지금은 자연에 귀의하여 친환경농업에 전념하고 있다고 말했다. 개, 고양이, 염소, 닭, 꿀벌과 함께하는 그녀는 고려인 개척지의 수호신 같은 인물이었다. 그녀는 고려인들이 개척한 땅에서 살고 있다는 감사함과 자부심으로 우리의 방문을 환대하고 있었다. 산 쪽에서 작업 중 개 짖는 소리에 뛰어 내려온 ‘엘레나’는 고려인들의 유물과 유적지를 자세히 보여주었다. 그 넓은 농장에는 곳곳에 당시 고려인이 사용하던 맷돌과 농기구 등 각종의 유물들이 발굴되어 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아! 고려인들의 오랜 영혼과 숨결은 그렇게 살아있었다. 집주인 엘레나는 우리 일행을 집안으로 안내하며, 흙투성이 농장 작업복을 순식간에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나타난다. 투박하고 무뚜뚝해 보이는 러시아인들이지만 일이 아무리 힘들어도 기쁜 일에는 옷을 갈아입고현재를 만끽한다는 것이다. 친절하면서도 의지가 돋보이는 강한 이 러시아 여성, 러시아인의 이미지를 다시 보여준다. 고려인들이 이런 러시아 여성의 도움을 받았다면 정착에 큰 도움이 되었을 텐데…. 엘레나는 즉석에서 염소 생우유와 샐러드를 요리해주는 엄청난 친절과 응대를 보여주었다. 지신허를 찾아온 최고의 빈객으로 우리를 맞아준 것이다. 이 러시아 숙녀의 우아한 면모는 두고두고 기억이 날 것 같다. 지신허 이주 160년, 고려인의 역사는 고목의 나이테 처럼 환희와 고통의 연륜을 더해간다. 함경도 출신 조선인 고려인들에게 신천지 지신허는 자유와 생존의 감격, 항일운동의 기지, 러시아 혁명의 광풍, 지옥 같은 강제이주의 빛바랜 사진 같은 추억의 대지였다. 1990년대 러시아에 또다시 역사의 광풍이 휘몰아친다. 공산주의 몰락과 새로운 체제의 혼란 속에서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개혁과 개방)는 고려인을 다시 극동으로 호출한다. 고려인의 연해주 귀향과 정착,역사의 드라마는 이어진다. 우리는 그들의 흔적을 따라 연해주(프리 모르스키)와 아무르(흑룡강)를 찾아다니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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